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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플 Sep 26. 2022

짧거나 끊어내거나

글을 시작하며

단상 斷想
1.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
2. 생각을 끊음

 

 언어라는 것이 그렇다. 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 대략 짐작하지만 정확하게 뜻을 설명하라면 어물거리게 되는 그런 것. ‘단상’이라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다. 글을 쓰거나 대화할 때 심심찮게 사용하나 무슨 뜻인지 서술하라 한다면 글쎄, 쉬지 않고 말을 뱉어내던 입을 조용히 닫게 되는 것이다. 새삼스레 국어사전에 검색해본 그의 뜻은 두 개 다 마음에 들었다. 짧거나 끊어내거나. 오히려 좋았다. 길어진다는 건 자칫 지리멸렬해지기 마련이니.

 생이 버거우면 책을 읽었다. ‘읽어낸다’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기보단 자해에 가까웠다. 생보다는 사, 행동보다는 행위와 밀접했다. 눈과 뇌에 활자를 쑤셔 박지 않으면 갖은 상념이 쉴 새 없이 나를 가격했다. 어떤 타격엔 멍이 들곤 했다. 그것들은 쉽사리 낫지 않은 채 오랜 시간 통증을 유발했고, 덕분에 나는 자주 아팠다.

 최근 쓴 글에서 ‘나는 한껏 물이 고여있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묘사했는데, 그 표현이 오랫동안 남아 잔상이 사라지질 않았다. 심지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요즘 나는 자주 어지러웠고 늘 울 준비가 되어있다.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이때다 싶어 그를 물고 늘어지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대성통곡을 할지도 몰랐다. 나는 거대한 물풍선과 진배없었다. 바늘로 톡 건드리면 빵! 터져 사방으로 물을 뿜어댈지도 모르니 내 주변에 출입 통제선을 설치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혼자 있으면 뭐 해요?

 -카페에서 책 읽고, 집에서 영화도 보고, 집 근처에서 산책도 하고, 가끔 맥주도 마셔요.

 -가끔요?

 -하하. 사실은 꽤 자주요.

 -심심하지 않아요?

 -글쎄요. 생각보다 괜찮아요.

 사람들은 혼자가 두려운 모양이다. 대학생 때부터 자취했으니, 나는 심심하지 않냐는 말을 십여 년간 듣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같은 말을 주야장천 듣고 있으니 저 말은 아무래도 수정이 필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의 장점은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 그렇다면 단점은 무언가요? 단점은 생각이 너무 많아지는 것. 생각이 많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사색은 사람을 깊게 하지만 너무 깊어지면 헤어나지 못하고 끝내 익사하고 말 테니.

 감정이 넘치는 순간이 있다. 삶의 편린은 차곡차곡 쌓이다 순식간에 장마철 둑이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졌다. 그럴 때면 핸드폰을 집어 들고 연락처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냈다. 엄지가   거듭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고 전화를  사람  명을 찾아내지 못하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눈물이 터져 나올 때도 있었고 감정의 와류가 진정될 때도 있었다. 뭐든 좋았다. 눈물은 감정의 분출이니 넘쳐흐른 뒤엔 잠잠해질 터였고, 진정된다면 폭풍 후의 고요를 즐기면 그뿐이었다. 삶이란 그런  아니겠는가. 무수히 많은 범람 속에서 나만의 평안에 도달하는 . 삶의 법칙은 제법 단순했으나, 안녕으로 향하는  결단코 쉽지 않아 나는  길목에서 수시로 멀미했다.

 -세상에 내가 한 명 더 있으면 좋겠어. 속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 말이야.


 과거 S가 했던 말이 잊히지 않고 자주 생각난다. 엉겨 붙어 잔뜩 꼬인 실뭉치처럼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긴 쉽지 않았고 입 밖으로 나오는 와해된 문장들은 나조차도 해독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말할 순 없기에 군데군데 구멍 난 대화에서 놓쳐버린 단서를 찾아내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생의 마지막까지 나는 오롯이 이해받을 수 없다, 고집스레 혼자 결론 내렸다. 타인에게 굳게 닫은 마음은 나를 더더욱 외롭게 했다. 공수래공수거, 생애는 외로움을 수반하는 수밖에 없고, 그걸 견디는 건 인간의 숙명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면 며칠을 견디어낼 힘이 생겼다.

 삶은 견뎌내고 버티는 것의 반복이다. 친구들과 농담처럼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생은 고(苦) 요. 고통 사이를 비집고 존재하는 찰나의 환희가 생을 찬란하게 했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 분명했다. 혹은 신의 질 나쁜 농담이거나. 기억력이 나빠지면 생이 사랑스럽다. 둘 중 뭐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지막 순간은 삶이 사랑스럽길, 조심스레 바란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냥 일상의 단상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분명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거니까요.

 네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 너 정도면 잘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다들 그렇게 살아, 남들도 다 힘들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민음사


 저 문장이 긴 시간 동안 사랑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에요. 모두가 제각각의 불행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저 문장과 이 말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요. 크든 작든 각자의 비극이 조미료처럼 삶에 양념을 치고 있으니까요.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불행의 원인을 나의 나약함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건 저한테 하는 위로의 말이에요.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이 다르고 그렇기에 견딜 수 있는 역치 또한 상이하니까요. 그러니 위에 적어놓은 것과 같은 타인의 말에 상처받지 마세요. 그들은 내가 쉽게 견디는 것들로 힘들 수 있으니까요.


 그저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좀 더 단순하고 살기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여기서 글을 줄이려고 해요. 시작부터 말이 지지부진하면 지루해지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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