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교무실에서 기말고사 채점이 한참 하고 있던 사이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한 선생님께서 난처한 표정으로 종이 가방에 뭔가를 담아 와서 부탁을 하셨다.
“선생님, 바빠요? 미안하지만 시간 좀 있어요?”
“네, 시간 괜찮아요. 뭐 도와드릴 일이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고2 올라가는 우리 아들이 아두이노인가 뭔가로 RC카를 조립했다는데 문제는 바퀴가 동작을 안 해요. 제 딴에는 열심히 했다는데..”
같은 학교 선생님의 자녀가 조립한 Hummer-Bot-4.0. (매뉴얼 사진 첨부)
매뉴얼을 살펴보고 회로를 점검하고 보니 무슨 스위치 하나의 문제로 간단히 해결이 되었다. 그 선생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뭐야~ 스위치 하나가 문제였다니!”
“아이들은 대부분 95%는 혼자 해결해요. 나머지 5%만 도와줘도 쑥쑥 자라는 애들이 많잖아요.”
“선생님이니까 이런 거 딱 해결하지, 우리 인문계 선생님들은 백날 봐도 몰라요. ㅋㅋ”
“자연계 선생님들이 인문계 내용 봐도 똑같죠. OO이가 코딩 관련 부분에 관심이 많나 봐요?”
“이 부분도 관심이 있지만 인공지능 분야에 제일 관심이 많대요. 우리야 인공지능이라면 터미네이터? 그런 이야기를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봤지 실제로 이런 세상이 올 줄 알았나.. 선생님, 혹시 인공지능 분야도 좀 아세요?”
“네. 요즘 한창 공부하고 있기도 해요. 수학이랑 코딩이랑 만나는 점이기도 하고요.”
“아이고! 딱 내가 잘 찾아왔네. 인공지능 스피커만 써봤지, 인공지능 관련 진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막상 고2 올라가면 진짜 달려야 하는데 뭐 하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막막하기만 해요. 아니, 당장 신학기에 담임 면담할 때 학생이 인공지능 진로 물어보면? 선생님 도와주셔야 해요!”
이 대화를 나누면서 눈 앞에 청소년의 진로와 관련한 3가지 집단의 모습이 다 스쳐 지나갔다.
- 학생 : 인공지능 진로를 희망하고 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어디 마땅히 물어볼 곳도 없다.
- 학부모 :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인공지능을 만나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모른다.
- 학교 및 교사 : 인공지능과 관련한 진로 교육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선생님과 학교.
교육 현장에서 인공지능에 관한 연수나 교육 프로그램이 보급되고 있고 열심히 연수에 참여하지만 막상 인공지능 자체를 이해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기에는 막막하기만 하다. 학교도 이런데 가정에서는 어떨까. 당사자인 학생들은 얼마나 막연할까.
무난한 학과에서 Hot한 과로 급부상한 컴퓨터 관련 학과
고등학교에서 고3 담임으로서 학생들의 진학 지도를 담당했던 2012년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공학과의 인기는 보통이거나 그 이하였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반도체 및 하드웨어 쪽으로의 학과인 전자공학과, 신소재공학과 등의인기는 높았지만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컴퓨터과학과, 컴퓨터공학과 등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는 2000년 초중반에 있었던 닷컴 버블이라 불리는 현상 때문이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2000년을 전후로 벤처와 중소기업 위주의 육성책을 내어놓았고 이로 인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IT 산업이 급부상을 하였다. 하지만 2000년 중 하반기를 지나면서 이러한 거품은 가라앉았다. 폭등했던 주가는 급락을 거듭했으며 수많은 기업이 부도를 맞으며 사라졌다.
이 시기 동안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고3이 되었다. 비롯해서 이 현상을 사회에서 지켜본 학부모들은 막상 진로를 선택해야 할 때 컴퓨터를 일단 후순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기업 문화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밤낮이 바뀌는 업무 환경, 고된 작업, 많은 잔업, 수시로 바뀌는 할당 업무, 낮은 임금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프로그래머는 고된 3D 업종으로 분류되었다. 버블 거품이 일기 전 인터넷의 가능성을 보고 수많은 컴퓨터학과 졸업생이 배출된 탓에 고용주들은 프로그래머들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이 넘쳐나는 업종’으로 생각하던 인식도 있었다. 당시 이러한 현상을 풍자한 만화도 인터넷에서 돌아다녔다.
2000년대 중반에 돌았던 SW 관련 업계의 어두운 현실을 풍자한 웹툰
고3 담임을 처음 맡았던 2012년은 이와 같은 닷컴 붕괴를 지난 지 10년도 채 안되었던 시기였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우리 반의 분위기와 비슷했는데 당시 배치표를 보면 일부 컴퓨터에서 강세를 보였던 학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에서 컴퓨터와 관련한 학과들은 중위권에 위치하고 있었다.화학, 생명과학 등은 취업도 잘 된다는 인식도 있었고 의전원이나 약학대학원을 가려는 학생들이 이쪽으로 일단 진학하려는 추세도 있어서 (의치한을 제외한) 부동의 최고 인기학과로 손꼽히고 있었었다.
한편 조금이나마 컴퓨터에 관해 관심을 가졌던 학생들은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았고, 이를 진로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이러한 노력은 입시에서 실제로 꽤 주목할 만한 성과를 많이 거두기도 했다. 비록 컴퓨터와 관련한 동아리 활동도 없었고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정보 수업도 없어서 학교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학생들은 눈물겨운 개인적인 노력으로 버티고 있었고 소중히 가능성을 꽃피우고자 노력했다. 이를 생활기록부 기재요령에 맞게 진로활동, 교과 세부능력 특기 사항 등에 기록을 해주었고, 학생들은 이러한 기록을 더욱 활용하면서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조그마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학으로 SW 방면에서 진학한 학생들이 졸업할 때가 되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SW계에 획을 그은 아주 커다란 세계적인 이벤트가 하나 일어났다. 바로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었다. 이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사회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등장은 입시에서도 큰 변화를 이룰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16년의 입시 및 진로 교육의 뜨거운 주제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아닌 빅데이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