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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요리를 하시다니

by 코딩하는 수학쌤

아버지가 요리를..?

지난주, 애들과 함께 영상통화로 부모님께 세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놀라운 사실 하나 가르쳐주까. 내 요새 요리도 한데이."


"오~ 아버지. 요리도 하세요?"


아버지와 엄마는 커다란 비닐하우스에서 농사를 지으셨답니다. 2년 전 연세도 많이 드시고 해서 농사일에서 은퇴를 하셨죠. 이후 엄마는 농협에서 풋고추 포장하시는 곳에 취직을 하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 혼자 집에 계실 때가 종종 많아요. 그래서 혼자 끼니를 챙기시나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요리라니.. 라면? 계란 프라이? 음.. 많이 양보해서 된장찌개? 그런데 옆에서 엄마가 불쑥 이러시네요.


"아버지 요리 애법(제법) 잘하신데이. 내려오거들랑 아부지표 등갈비찜 함 무봐라(먹어봐라). 기똥차데이."


순간 귀를 의심.. 엄마는 남이 하신 요리에 대해 칭찬 거의 안 하시는 분인데요. 기똥차다고요??


저희 엄마는 제가 취사병 할 때도 요리 잘한다는 말씀은 한 번도 안 하셨어요. 어느 식당을 다니셔도 아무리 맛집이라도 늘 만족을 못하시거든요. 그런 엄마가 칭찬을? 그것도 다른 분도 아닌 아버지의 요리 실력을 칭찬을 하시다니요.




아버지의 요리 비법 노트


설날 이후 바뀐 거리두기로 가족과 함께 시골 부모님 댁에 내려왔습니다. 오늘은 오후에 커피가 당겨서 커피를 사러 잠시 차를 타고 시내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 아버지가 이미 등갈비찜 요리를 이미 시작하셨네요.

이 많은 걸 한 번에..ㄷㄷ 손도 크셔라 ㅠ

아버지는 약간 어색해 보이는 칼질로 채소도 썰으시네요. 그리고 침침한 눈으로 계량컵의 눈금을 보시며 간장도 부으십니다. 등갈비찜이 그렇게 만만치 않으실 텐데.. 그런데 식탁 한 편에 뭔가 정성스럽게 빼곡히 적힌 아버지만의 레시피가 담긴 요리 노트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이거 뭐예요?"


"아부지 요리 노트 아이가. 첨에 인터넷에서 찾아서 그대로 해봤드마는 맛있기는 한데 달고 매운 맛도 쪼매 모자리는기라. 그래서 설탕 대신 꿀을 넣고 청량 땡초도 쪼매 더 넣고.. 고기도 쪼매 찔기가꼬 한 10분 더 삶았거든. 나름 조금씩 바꿔서 해봤는데 괘안터라고. 너거 엄마도 맛있단다. 겸이(제 조카)도 할아버지 등갈비가 최고라 카더라."


그렇게 아버지의 노트를 보니 하나하나 써놓으신 레시피가 정성스럽습니다. 엄마가 힘들게 퇴근했을 때 맛있는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해주며 반갑게 맞이해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아들, 손주들이 모였을 때 맛있게 먹는 행복한 장면을 그리시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쓰셨나 봅니다.



처음 맛 본 아버지의 요리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요리는 엄마가 평생을 해오신 일인데 이제는 아버지께서 하시네요. 이 일을 통해 아버지는 엄마를 더 이해하실 수 았어 좋으시고, 또한 우리에게 음식이라는 통로로 사랑을 주실 수 있어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열심히 고기를 볶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느 때보다 행복과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가족의 사랑은 또 커져갑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신 부모님은 어느새 서로의 역할을 바꾸셨습니다. 늦게까지 일터에 남이서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오시던 아버지. 농사일이 다 고되지만 힘든 일을 주로 맡아하시느라 집에서는 가사를 돌보시기 어려우셨어요. 반면 농사일도 같이 하시고 가사도 하셔야 했던 엄마. 같이 농사일을 하셨지만 그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셔서 저녁 준비를 하셔야 했죠.


요새는 두 분의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농사에서 퇴직하신 후 엄마는 농협에서 마트에 납품하는 고추를 포장하는 곳에 취직을 하셨고, 아버지는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십니다. 엄마가 아침 일찍 나가셔서 주로 늦게 들어오시니 가사는 아버지가 맡게 되셨습니다. 수십 년간 하지 않으셨던 익숙지 않은 일을 하시게 되신 거죠. 어색함은 적응 아니면 회피 둘 중 하나를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당당하게 적응을 택하셨네요.


고기가 익는 사이 등갈비찜, 나박김치, LA갈비찜, 김치찌개 등 여러 요리법을 천천히 읽어봤습니다. 글 속에서 돋보기안경을 쓰시고 모니터를 보시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받아쓰기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왔는데 기대도 못했던 깨끗한 집과 정말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저녁 밥상을 받으신 엄마도 떠올랐습니다. 두 분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엄마는 밥상을 받으시면서 좋으셨겠죠. 그 기분은 사실 그동안 우리 가족이 저녁 밥상을 통해 받던 엄마의 사랑입니다. 피곤하지만 맛있게 저녁을 드시는 엄마를 보시면서 아버지께서는 뿌듯하셨겠죠. 하루를 버텨낸 엄마의 식사하시는 모습은 사실 늘 우리가 봐왔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서로에게서 서로의 모습을 보시지 않으셨을까요?


함께 모여 서로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더 잘 알게 된 저녁 식사가 더없이 다정하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두 분의 웃음이 어느 때보다 푸근하고 띠뜻하게만 느껴집니다.



고기는 사랑으로 볶는 겁니다.

고기 맛이요? 저희 엄마가 인정하셨다니까요. 엄마가 인정하신 맛은 세상 어디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전국 맛집보다 좋다는 걸 자부합니다. 거기에 사랑이란 조미료가 들어가 있는데 뭐 더 바랄게 뭐가 있나요. 객관적으로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사랑은 또 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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