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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책장에는 여백이 있습니까?

새 학기를 시작하며

by 코딩하는 수학쌤

봄방학, 교무실 자리 옮기기

학교에서는 2월 말이 되면 새 학기 준비로 많이 분주해집니다. 그중에 분주함의 꽃은 교무실 자리 옮기기입니다. 포장이사 부를까 농담으로 이야기할만큼 뭐가 책상에 이렇게 많았는지..;


잠시 편의를 위해 가져다 놨던 소품들이 애물단지가 되는 순간도 많습니다. 버리기는 아까워서 서랍에 넣어둔지 벌써 10년이 된 물건도 나오고.. 가끔 고대 유물 같은 물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서랍 정리하다가 뜬금없이 5만원 지폐가 나오기도 하고, 제자에게 받았던 편지들이 나오기도 하죠. 여하튼 새 학기를 준비하고 바뀐 자리로 짐을 옮길 때가 가장 바쁘면서도 한 편으론 설레기도 하죠.


새로 정리한 교무실 책상. 퀴즈. 저의 MBTI는? (힌트 : 불필요한 건 없앰. 같은 책상 구성은 한 명도 없음. 구석진 자리를 좋아함. 집돌이 스타일. 유행에 둔감.)

선생님들의 책상도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마치 각자의 MBTI를 대변하는 듯 선생님들의 특성에 따라 책상도 다양한 모습들입니다. 먼지 하나 앉지 않을 것 같이 정리 정돈이 딱 되어 있는 분이 있는 반면 책으로 탑을 쌓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컴퓨터 키보드 외엔 모든게 태풍이 쓸고 간 듯 뭐가 잔뜩 흐트러져 있는데 희한하게도 뭐가 어디 있는지는 다 압니다. 보다 못한 친한 선생님이 한 마디 합니다.


"아우~ 쌤. 자리 정리 좀 하세요. 정신 하나도 없네"


"왜요~ 나름 질서가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런 선생님은 자리를 옮겨도 그대로 Ctrl-C, Ctrl-V가 된 듯 어지러움까지 그대로 옮깁니다. 마치 새 집을 장만하듯 자리를 정리하면서 묵은 먼지도 털고 버릴 것들도 버리고, 옆자리에 만난 선생님이랑 인사도 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갑니다. 이삿짐 싸듯, 정리하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상도 닦고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죠.




30%의 여백을 늘 남겨둬야 하는 이유


예전 제 책상엔 온갖 자료가 널려있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하루는 학교 교목실에 계신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선생님. 힘들지 않아요?"

"힘들죠. 할게 너무 많네요."

"이런 이야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70%만 최선을 다하세요."

"네? 왜요?"

"책장에 여백이 있어야 새로운 책을 담을 수 있거든요. 여백이 적절하게 있어야 멋진 그림이지. 삶도 마찬가지고."


라는 묘한 말을 미소와 함께 던지고는 총총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봄철에 집에 청소를 하는데 마침 계시던 장모님이 그러셨어요.


"아이고, 좀 버려. 뭐 이렇게 꽉꽉 채워놔?"

"아깝잖아요. 충분히 다 들어가요."

"정리는 잘 집어넣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걸 잘해야 해. 항상 1/3 정도는 좀 비워놔. 그 공간이 없으면 또 금방 어지러워져. 좀 지나면 뭐 넣을 일이 꼭 생기는데 빈 공간이 없으니 맨날 집이 정신이 없지."


아이고.. 갑자기 목사님의 말씀과 장모님의 말씀이 딱 맞아서 뒤통수가 땡~ 하고 울렸습니다.




당신의 책장에는 여백이 있습니까?


첫째 책상 정리를 하다 보니 책상 서랍에서 접어놓았던 종이비행기와 딱지 같은 것들이 한가득 쏟아집니다. 책장에는 책들이 꽂히다 못해 위에 쌓이고 난리가 아닙니다. 뭐 버리려고 하면 절대 아끼는 거라며 못 버리게 합니다. 비닐봉지에 이것저것 담아서 여기저기 쑤셔놨습니다. 이게 뭐냐니까 나중에 쓸 거라고 하네요.


때로는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것들이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할 때가 많습니다. 작년에 육아휴직을 하면서 자리를 아예 비워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10년 가까이 뭐가 아까웠는지 책꽂이 구석에 꽂혀있던 자료와 각종 연수 책자들이 있었어요. 압니다. 올해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런 면에서 저나 첫째 딸이나 똑같죠.


작년에 책 90 kg 버렸는데 또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폐지는 kg당 60원을 줍니다. 5400원 벌어서 커피 사 먹었습니다.


목사님과 장모님에게서 배운 후로 언젠가부터 자리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매일 버립니다. 그러면서 일상도 좀 달라지더라구요. 악착같이 시간을 쪼개 살다가 좀 여유를 부려보기도 했습니다. 농땡이도 슬쩍 부려보고 때로는 멍을 때려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졸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깨우기도 하지만 때로는 좀 모르는 척 놔두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장이 비워지고 책상이 비워지니 뭔가 마음도 묘하게 좀 비워지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삶이 확 바뀌지는 않습니다.


책장과 책상은 삶의 모습을 대변하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여백이 없는 책상은 곧 흐트러지고 어지러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테트리스처럼 책장이 터질 정도로 책을 욱여넣기보다는 어차피 안 볼 책들을 버리고 적절한 여백을 한 번 만들어보세요. 아까워서 못 버리고 계속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는 걸 의미해요. 책장을 비우는 것은 일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책장뿐이겠어요? 일에서도, 삶에서도 여백을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뭔가 몰입하고 답답할 때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일부는 담배를 피우는 등의 시간을 통해 잠시 쉬어가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순간을 idling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만 창의력이 생겨난답니다. 마치 책장을 비워야 새 책이 들어오듯,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가져보세요.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얻는 것은 절대 비효율이 아닙니다.


뭔가를 할 때도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70% 정도만 최선을 다하고 30%의 여유를 남겨두세요. 그렇게 기준을 낮추고 여백을 가졌을 때 비로소 다른 이들을 품어주고 담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생겨납니다.


당신의 책장은 여백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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