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더니..
한창 책 쓴다는 핑계로 집돌이 생활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집에만 있으면 머리도 아프고 답답하다며 하루에 한두 번은 산책을 꼭 나가는 반면 저는 그냥 집에서만 보내도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은 전형적인 집돌이 스타일이죠.
그러던 어느 날 허리를 두드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오늘 공기가 참 좋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창밖으로 가까이 보이는 수리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어봅니다.
"작년에 한참 산에 다닐 때 어땠어? 관악산 금방 올라갔다며?"
"아, 그때? 안양 종합운동장 뒤에서 관악산 정상까지 1시간 20분 만에 올라갔어. 체력 좋았지."
"오. 관악산 말고 또 어디 갔더라? 여하튼 그때 다리랑 허리 안 아팠어?"
"다리는 워낙에 타고났고. 허리는 그땐 안 아팠던 거 같은데."
그 말을 하는 순간 허리를 두드리던 저의 손이 멈추어집니다. 그리고 살짝 불안함을 느낍니다. 아내는 역시 저를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처방을 내려주네요.
"요새 허리 아픈 거 다 운동 부족이네. 얼른 산에 다녀와. 요 집 뒤 비봉산이라도."
"Um.. 요새 책 집필에 좀 바빠서..."
"물리치료 10번보다 등산 한 번이 더 나을걸? 제발 좀 아프다 징징대지 말고. 얼른. 관악산 1시간 20분에 올라간 사람이 왜 이러실까. 많이도 말고 집 뒷산에 딱 왕복 1시간 정도로 몸만 풀어봐."
"...."
미적미적한 내 반응에 못마땅한 표정과 함께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합니다.
"알. 아. 서. 선택하세요. 걱정해주는 거지, 내가 뭐 싫다는 사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그렇게 옷을 주섬 주섬 갈아입고 등산화를 신습니다. 그리곤 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등산로로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습니다. 거의 8개월 만에 신은 등산화.. 작년 여름 이후로 처음이네요.
백두산도 아니고 30분이면 올라가는 작은 뒷산 하나 오르는데도 헉헉 거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합니다. 분명 예전에 산에 한창 다닐 때는 완만한 곳에서는 뛰어가기도 했는데.. 요 몇 개월 사이에 체력은 어디론가 다 증발해버렸습니다. 요 8개월 사이 체력을 체중과 바꾼 느낌입니다.
대림대 옆 경수대로에서 올라가는 비봉산 자락은 올라갈 때부터 경사도가 꽤 있습니다. 게다가 마스크까지 착용해서 산길을 오르자니, 마치 신병교육대에서 화생방 교육실 앞에서 방독면 쓰고 PT 체조하는 기분입니다. 사람이 없으니 마스크를 턱스크로 고치고 올라가다 보니 땀이 턱으로 흘러 마스크가 축축해졌네요.. 한 10분 오르면서 근육이 좀 적응을 했는지 조금 오를만하다는 느낌이 드는 타이밍에 예쁜 산길이 나타납니다.
산은 참 묘합니다. 멀리 떨어져서 산을 보면 그렇게 높을 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높은 산을 도대체 어떻게 올라가나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산에 가까이 와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놓은 예쁜 길들이 나타납니다. 산길은 밖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고, 산속에 들어가야만 보입니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뷰 포인트가 나타나죠. 확 트인 전경은 산 위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이 됩니다. 이러한 풍경은 사진으로는 10%도 느낄 수 없는 시원함이 있죠. 아무리 드론으로 촬영을 멋있게 한다고 해도 직접 보는 풍경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죠. 오늘은 멀리 인천의 송도까지도 보이는 좋은 날씨네요. 내일 비가 온다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촉촉합니다.
혼자 산을 오르다 보면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처음 10분 동안은
'내가 미쳤구나. 이 힘든 산에 오르다니.'
로 시작해서
'오늘은 절대 다 못 올라갈 것 같다. 체력도 없고..'
로 이어지다가 한 20분 정도 올라가면
'그래도 할만하네. 아직 죽지 않았어.'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시간 정도 올라가서 탁 트인 전경이 보일 때가 되면
'아. 올라오길 잘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면 힘이 들든 숨이 차든 일단 오르고 봅니다. 막상 여기까지 왔는데 내려갈 바에는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 이런 오기가 작동하죠. 이미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까우니까요. 이놈의 자존심이 뭔지, 산을 오른 지 5분쯤 되면 힘들면서도 내려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까지 와서 뭐라도 하나 해보자는 오기가 좀 발동을 하죠.
정작 힘든 건 등산화를 신는 것입니다. 아직 시작을 하지 않았으니 쉽게 포기할 수 있거든요. 등산화를 신으려다가 슬쩍 슬리퍼를 신고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사도 자연스럽잖아요. 등산화를 신는 것은 이런 수많은 유혹들을 모두 물리치는 위대한 행동이라는 것을 오늘 배웁니다.
뭐든 시작이 반이란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