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와 각본집
영화의 감동을 두 배로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감독의 극본을 황석희 조은정 임지윤 번역가가 옮긴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대본을 읽기 시작하자 영화의 장면장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결국 한달음에 끝까지 읽게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나영과 해성은 초등학교 시절 친구다. 나영의 갑작스러운 이민으로 인해, 두 사람은 헤어져야 하고, 떠나기 전 추억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잘가라는 짧은 인사만 나눈 뒤 이별한다.
12년 후, 나영은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둘은 온라인상에서 재회하게 된다.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만남을 계속 이어가진 않는다. 상황이, 연애에만 몰입할 여유는 없나 보다.
다시 만남을 중단한 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나영은 백인 남자와 결혼을 했고, 해성은 이 사실을 알지만 나영을 찾아 미국땅을 밟는다. 24년의 세월이 지나 조우하게 된 나영과 해성, 그리고 두 사람은 짧게나마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해성은 떠나기 전, 나영의 남편과 함께 자리를 갖는다. 한국어로 계속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속, 남편은 그저 침묵을 지킬 뿐. 나영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두 남자 사이에는 어색함만 감돈다.
나영이 해성을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집을 나서고, 남편은 그렇게 다시 나영을 기다린다.
해성과 포옹하고 작별한 나영은 이제 집까지 혼자 걸어간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파트 문밖에 서성이던 남편이 보이고, 나영은 남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를 생각하는 지금도, 마음이 몽글몽글, 자꾸만 애틋한 감정이 든다. 내 일도 아닌데.
헤어지고 만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너무 어렵다.
남녀 사이가 아님에도, 친구나 동료가 아닌 경우라도, 그 자연스러운 일이 힘들고, 아쉽다. 자꾸 돌아보게 된다. 붙잡고 싶고. 겉으로는 아주 쿨하다.
영화를 보며 안타까웠던 건, 나영과 해성은 분명 "인연"인데, 부부의 연은 아니라는 점.
우리의 인연은 딱 여기까지 라는 말이 떠오른다.
간혹 인연이라 믿었던 사람과 재회했는데, 그때의 느낌과 판이하게 달라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상황이 달라져서일까, 나름대로 좋게 해석했다. 그래서, 한때의 좋은 추억을 삭제하지는 않았다. 다만 거리를 유지하고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 뿐. 그 당시의 감정은 진실했으므로. 무엇보다, 이 영화가 반드시 첫사랑과의 재회, 남녀 간의 사랑에만 한정 지어 보지 않게 되었다. 그저 모든 관계로 넓혀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 본인은 인연을 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에, 사소한 인연도 간직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노력하면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질 거라 믿었다. 연락을 꾸준히 하지 않더라도.
하지만 모든 인연은 유효기간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인연은 내 노력여하와는 달리, 딱 거기까지인 경우도 제법 많았음을, 돌이켜보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좁고 깊은 관계만 남겨두니, 에너지 소모도 적다.)
내 욕심이고 내 착각이었다.
그래도 어떤가, 수많은 만남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좋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도 멋지다.
패스트 라이브즈... 전생...
전생의 인연, 그리고 다시 이번 생으로 이어질 만큼 강한 그 운명 같은 만남이 (내게) 주어질지는 의문이다.
그게 반드시 부부의 연이 아니면 어떤가.
살면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고 싶다.
혹시 아직도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서로 도움이 되고 작은 기쁨이라도 나눌, 좋은 인연을 알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