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보다

by 은정냥이

내가 스무 살 때였다. 나는 유럽 근대 시기의 그림, 그중에서도 상징주의 미술을 아주 좋아했다. 서점만 가면 그 그림들이 있는 책을 찾아 다녔는데, 더는 볼 게 없을 지경이었다. 상징주의 미술은 인상파 같은 주류 미술도 아니고 피카소 같은 대표 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국내에 소개된 상징주의 미술 작품은 한정돼 있었고 책 컨텐츠 역시 그랬다. 그러다 그림책 코너까지 갔다. ‘그림이 있는 책’이니까.


처음에는 옛이야기, 페로 이야기, 그림형제 이야기에 그림을 붙인 그림책부터 본 것 같다. 내가 처음 산 책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인 것을 보면.


IMG_20150830_2.png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시공사, 1995


내 눈에는 이 그림과 글이 상징주의 미술의 연장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섬세했고, 어느 정도는 기괴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인물들이 웃음이 없다. 경직되어 있다. 모두들 움직이고 있고 몸의 움직임이 제각기 다른데도 불구하고 활달함보다 경직됨을 느낀다. 마법에 걸려 멈춰버린 도시의 곳곳을 보는 듯하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옛이야기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다음 산 책은 『에밀리』였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딕킨스의 한 면모를 그린 책이다. 에밀리 딕킨스는 은둔 시인으로 알려져있다. 이 책 뒷부분, 작가 후기를 보면 에밀리는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결혼한 적이 없으며 생애 마지막 25년은 집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써 있다.


IMG_20150830_3.png 『에밀리』, 비룡소, 1998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의 신비를 모르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작은 곳에서도 세상의 신비를 마음 가득 느꼈기 때문에 큰 세상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세상의 미세한 흐름에서도 충만한 기쁨, 큰 감동을 느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이해했고 이 책에 마음을 열었고 책이 내어 준 문을 통해 평범하고도 새로운 순간을 경험했다.


IMG_20150830_4.png 『에밀리』중 한 장면


『에밀리』로는 국문학 교수님의 교양 시간에 발표 수업도 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림책에 관심도 없는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표 수업을 한다고 번쩍 손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이 그림책에 대해 뭔가 열망에 휩싸여 있었을 테고 그래도 잠깐 망설였을 테고 그러면서도 발표를 하겠다고 자원했을 것이나, 발표에 대한 호응은 별로였다.


초창기에 보았던 그림책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은 『웨슬리 나라』일 것이다. 웨슬리라는 소년 - 안경잡이에다 취향도 남달라 학교에서는 왕따, 집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가 꿈꾸는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자 세상이 웨슬리 편으로 돌아선다. 웨슬리의 승리, 나를 돌린 세상을 향한 이 완벽한 복수! 너무 완벽해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모두가 즐겁다.


내 나라, 내 장소 하나 갖는 것에 대한 바람과 공상이 이만큼 후련하게 펼쳐진 책이 있을까. 내 못남을 가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내 다름을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무심함이 좋다. 다름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마음껏 펼쳐내는 순간 책은 즐거움으로 가득해진다. 보고나면 나와 다른 세상 사이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서 홀가분해지고, 이것저것 망설이던 감정이 확 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노력 없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노력에 신명이 붙어서, 그게 노동인지, 놀이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림책은 놀라웠다. 볼 때마다 내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래서 난 서점 그림책 코너에 있을 때면 자주 긴장과 흥분 때문에 배가 아파왔다. 아주 얇은 종이일 뿐인데, 그 종이 이면에 그토록 풍성한 세계가 있고, 그 건조한 종이에 감정이 흐르는 것을 느낄 때마다 황홀했다. 그것을 깊이라고 할까. 흠뻑 취했다. 흠뻑.


이 좋은 장르를 왜 어린이만 보아야 하는지 늘 안타까웠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림책은 나이 장벽을 잘 넘나들지 못한다. 글자는 적고 페이지 수도 적은데 책은 거의 하드커버이니 가격이 만 원 이하로 내려가기도 어렵다. 시집도 시가 수십 편인데, 그림책은 한 편의 시와 그림이라 할 분량이니 가격 대비 효율성은 떨어진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책 작가들은 많은 말을 쳐내고 함축과 리듬을 택하며 독자들이 더 폭넓은 이미지 세계를 취하도록 노력했다. 그림은 같게, 또 다르게 글과 어우러지며 상상의 영역과 힘을 더욱 키워갔다.


많은 글자보다 짧고 함축된 말이 내 마음에 큰 설렘과 두근거림을 주었고, 그 감정이 흘러나와 내게 글을 쓰게 했다. 내가 그림책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이루려는 목표보다 글쓰기 본능, 흘러나옴이 맞다. 쓸 수밖에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이상. 당신들에게도 말하고 싶은 거다. 이런 설렘과 두근거림. 무미하지 않고 무기력하지 않은 감정을. 일상을 풍성하게 할 마법 같은 순간을. 책은 비교적 적은 분량이나 감동은 그 이상, 그 곱절의 곱절이다.


그림책에 홀딱 빠진 나는, 인터넷 서점 컨텐츠팀에서 일하며 그림책을 보고 책 정보를 썼고 그림책 편집자로도 일했다.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어느 오전, 시중에 새로 나온 그림책을 읽으며 벅찬 감정에 심장이 둥둥거림을 가만히 음미했다. 생각했다. 이 숭고한 감정을 느끼게 한, 이 특별한 직업에 감사를.



그림책은 내게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