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감옥, 그 좁은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
‘나라는 감옥’ 안에 산다고 생각했다. 갇혀있다. 내 몸뚱아리 그리고 내 정신에. 내 몸뚱아리의 능력과 생김새에 발목 잡히고 내 경험과 내 천성이 만들어낸 정신체계 안에서 사유한다. 그 한계가 꽤 견고하다. 벗어나지 못한다. 살살 구슬려 그 한계를 벗어나 보려 하지만 드라마틱한 탈출이나 감옥 붕괴 같은 일은 없다. 내가 좀 더 성장하면서 감옥도 똑같은 비율로 커진다거나 내부 환경이 더 보송보송해진다거나 할 뿐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나라는 감옥 특유의 아늑함과 장점을 알고 있다. 함부로 떠날 생각이 없는 거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고맙게도 나를 좀 더 보려는 상대의 불빛에 내 감옥이 드러날 때면, 순간 난 너무 부끄러워진다. 그러면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이게 나다, 이게 내가 사는 곳이고 내가 사유하는 방식이다. 이 누추함과 유별남을, 폐쇄적임을 부끄러워 마라.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감옥문을 열어제끼며 나가지 않을 거다. 나라는 감옥은 나를 가두지만 나는 이 안에서, 좁은 세계나마 풍요롭게 운영할 능력이 있다. 그런 능력 하나는 용케 키웠다. 누군가 이 감옥을 부숴주거나 그가 비춘 내 감옥이 부끄러워 감옥문을 나선다고 해서 내 마음이 열리는 게 아니다. 아마 나 역시 부서져버릴 것이다. 나를 인정하니 않는 혁명은, 탈출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책 『에밀리Emily』는 내가 스물두 살 때 처음 봤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어린이책 코너에 서 있었고 책 속 무언가가 나를 찌릿찌릿 자극하여 배가 살살 아파왔다. 은둔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son에게서 나의 한 면을 보았을 거다. 그때는 ‘감옥’이란 단어는 생각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보았을 때, ‘나라는 감옥’을 타이틀로 나와 그녀 이야기를 묶고 풀어내고 싶었다. 둘 다 갇혀 산다. 그렇다고 우주의 신비, 생의 신비에 마음 닫은 것이 아니다. 예민하고, 특히 언어 표현에서 더 그러려 한다. 개인주의적이다. 폐쇄적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감수성이 남들보다 덜하지 않다. 십 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선에서 나는 에밀리 파(派) 인간형이다. 절대 기준은 모르겠지만 내 주변인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평균 수치 이상으로 에밀리스럽다.
『에밀리』는 19세기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한 꼬마의 교감을 담고 있다. 꼬마가 주인공이다. 피아노를 치는 꼬마의 엄마가 노란 집에 사는 ‘신비의 여인’에게 초대를 받는다. 와서 피아노 연주를 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눈이 녹아가는 어느 날, 꼬마와 함께 노란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엄마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이 꼬마는 하얀 옷의 여인과 마주한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는 신비의 여인 에밀리다.
에밀리는 시인이다. 꼬마의 엄마가 피아노 연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듯, 에밀리는 단어로, 마치 말이 살아 숨 쉬는 듯한 감동을 준다. 음악, 시, 그런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지만 이것들은 어느 새인가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 그건 사람을 감동시킨다. 예술은 그런 일을 한다. 에밀리는 무척 신비로운 일을 해 내는 시인이지만 오히려 꼬마에게 말한다. “시는 바로 너란다.”
꼬마는 에밀리에게 백합 알뿌리를 주고 에밀리는 꼬마에게 시를 준다. 곧 봄이 되었다. 꼬마는 백합 알뿌리를 심으며 노란 집에서 백합 알뿌리를 심을 에밀리 아줌마를 생각한다. 또 이 백합에서 싹이 나고 꽃이 필 것을 떠올린다. 그건 신비롭다. 음악처럼 시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사실 아주 많은 일들이 그렇다. 일상에서 감동과 신비를 느끼게 하는 것은 예술 작품만이 아니고 봄이 올 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정은 움직이고 우리는 곧잘 감동할 수 있다. 세상과 교감하는 순간이 온다.
에밀리는 낯선 어른은 피했지만 아이들은 좋아했고 아이들에게는 곧잘 미소 지었다고 한다. 때로는 노란 집 2층에서 아이들에게 줄 생강빵 바구니를 내려줬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런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마이클 베다드Michael Bedard라는 글 작가가 쓴 픽션이다. 그는 에밀리가 살던 암허스트 생가에도 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나는 그녀가 살던 방 창문 아래에 서 있었고, 그녀는 이 이야기를 나에게 내려보내 주었다.”
후대의 작가들은 에밀리의 섬세한 시와 삶에서 모티브를 얻는다. 에밀리를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은둔시인’이다. 그녀는 이십여 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를 설명하는 글에는 독신이었다는 말이 늘 있다. 아무리 19세기라 해도 그렇지 결혼 안 했다는 설명이 왜 이렇게까지 따라붙나 하는 생각이 든 적 있는데, 아마도 그녀가 그 정도의 고독을 택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특징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에밀리는 극도로 타인과 직접 교류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가족을 만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생 외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도 않았다. 에밀리 디킨슨을 쉽게 소개하려면 ‘예민함’‘섬세함’‘수줍음’ 같은 형용사로 묘사할 수 있다. 그녀를 알기 시작하는 이들에게 일단 무어라도 첫 인상을 설명해야 한다면 말이다. 한 단계 더 들어가면 ‘개인주의’‘심오함’‘격렬함’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과 비교해 보면 그녀의 은둔, 섬세함, 개인주의를 잘 느낄 수 있다. 휘트먼의 시는 마치 ‘미국 찬가’ 또는 ‘개발과 발전 찬가’ 같다. 미국이란 자국을 향한 애국심이 아니다. 휘트먼은 발전하는 문명, 기계 문명의 속도에 대한 가슴 벅참을 노래한다. 그의 시는 외부로 향한다. 진취적이고 상승하고 고양한다. 활자에 소리가 없어도 그의 시는 힘차다. 가슴이 넓고 단단한 사람이 산등성이나 언덕에서 읊는 듯 힘이 넘친다.
에밀리는, 치우쳐있다. 자기 세계에. 철저히 ‘자기’가 안으로 파고든다. 자기 감정을 들여다보고 정확한 말을 찾는다. 그렇다고 절대 ‘미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심오하다. 시야가 한정된 대신 깊은 거다. 에밀리의 탐구 대상이란 그녀 자신, 둘레 자연의 미세한 변화와 흐름, 외부세계에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이다. 말이 모호한 것은 일부러 무언가를 숨기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이 나오는 또 다른 그림책이 있다. 『나의 삼촌 에밀리』라는 책인데, 역시 흰 옷을 입은 에밀리와 조카 아이의 일화를 담았다. 그 책에 나오는 에밀리의 시는 ‘진실을 말하라’로 시작한다. 진실이라는 주제는 보편적일지 모르나 그 속에 담긴 생각은 다른 이들이 쓴 문구들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그 시의 구절처럼 그녀의 주제에 이르는 길은 비스듬하고 빙빙 돈다. 에밀리는 세심하게 말한다. 에밀리는 감정의 미묘한 부분을 뭉뚱그려 정의하지 않는다. 미묘한 부분을 뭉개지 않고 표현하려다 보니 보편적인 개념을 말해도 다른 생각처럼 보인다. 진실이라는 넓은 영지에서도 오직 한 장소, 한 점에만 안착하려는 시도처럼 말이다. 그런 것들이 에밀리의 주제에 다가가는 길을 결코 쉽지 않게 만든다. 그러나 말의 미묘함, 감정의 미묘함을 뭉개버리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던 나는, 그녀가 이런 언어와 표현을 구사하려고 집요하게 단어를 찾는 활동을 했을 것이고,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 느낌을 가장 알맞게 드러낼 언어를 찾으려는 욕망이나 습관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나는 대학 세계문학 강독 시간에 처음으로 에밀리 디킨스의 시를 알았다. 시는 형식상 간결했지만 의미는 모호했다. 죽음을 연상시켰는데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시와 시인의 아우라는 내게 매우 인상 깊었다. 『에밀리』 그림책은 그 이후에 보았다. 그림책을 보면서 그 시절 나는 아마 그녀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이 예민했다. 겁이 많고 그런데 장난기 많고 마음속 불이 강렬했다. 이 요소들이 서로 모순되어 야릇하게 남들과 달랐고 그래서 불안했다. 에밀리의 교류하지 않는 삶도 부러웠을 것이다. 조금. 조금 많이. 나는 늘 남들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시절 내 유별난 성향을 잘 알지도 못했고 알지 못하니 불편할 뿐 남들에게 주장할 생각도 못했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이 책을 보고 그녀의 시를 읽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그때와는 다른 강함이 보였다. 자신의 유별남을 견디고 표출할 만한 강함이다. 겉보기에는 고독해 보이는 삶이나 실제 그 삶은 하루하루가 많은 감정으로 가득 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고독은 그녀에게 필요하고 견딜 만했으며 그녀의 외로움은 즐길 만했을 거다. 확신하여 말하면 안 되지만 어느 정도는, 그랬을 것 같다.
아이의 잔잔한 독백이 좋으나 내게 에밀리의 시가 그랬듯, 이 책도 속속들이 설명하기는 어렵다. 플롯이 완전한 이야기라기보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감성과 신비를 전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책은 즉각적인 인상을 남기고 생에서 우리가 각자 느끼는 신비로움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시를 누군가의 예술 작품, 문학으로서만 생각하기보다 ‘시적’이라는 감정과 느낌 체계, 그러니까 시적 정서로 보면 이 책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에 더 쉬울 것이다. 어떤 감미로운 분위기,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수성, 자연에서 느끼는 낭만, 사람과 눈을 마주할 때 느끼는 설렘 같은 것 말이다. 그건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본능적이니까.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에밀리 디킨스의 시는 의미가 꽤 또렷하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간에,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그녀도 그녀라는 감옥 안에 살았다. 그것도 꽤 견고한 감옥이었다. 그러나 이 시를 보면 그녀가 자기 감옥에 갇혀 무게에 짓눌리거나 어두컴컴하게 산 것이 아니다. 그보다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세상의 미세한 변화와 흐름에 집중했음을 느낀다. 세상의 신비를 알았다. 그 이상의 세계가 펼쳐지지 않아도, 그녀의 세계는 풍요로웠다. 환희로웠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부족하지 않았다.
이 책을 다시 보는데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에 나름의 기쁨과 풍요로움이 있었을 거라고 더 확신하게 한 요소가 있었다. 그림,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림작가 바바라 쿠니Barbara Cooney다. 바바라 쿠니는 여러 그림책에서 주인공이 몸으로 자연을 일구고 몸으로 느끼는 세상, 그리하여 허상이 아닌 구체적 삶을 그렸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바바라 쿠니가 이 이야기를 선택하고 그림을 그렸다는 데서도 에밀리 디킨슨의 삶이 단순히 멜랑콜리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삶의 방식은 좀 다를지라도 자기 삶에 성실했던 이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