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계절이 간다

남은 자의 일

by 은정냥이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여자와 의대생인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둘은 탄광촌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여자는 임신을 하지만 아이를 지우기로 결정한다. 의대를 다녔던 남자가 중절수술을 시도하나 여자는 그 때문에 죽고 남자는 체포된다.

남자에게 여자의 가족이 독약을 권한다. 생의 모멸만 남았지만 남자는 독약을 거절한다. 살기로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 그 여자와의 사랑도, 괴롭거나 징그러웠던 삶의 시간도 다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 대신 슬픔을 택한다.


비탄


수많은 책들이 떠난 사람과 떠난 뒤 남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한다. 그림책도 그렇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온다. 나이가 들며 더 경험하게 되지만 어려도,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결혼이나 출산은 예상하고 일어나는 일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기에 죽음, 죽음 뒤의 상황을 설명해 줄 책이 필요하다.

내 기억에 그림책에서 누군가를 잃고난 뒤 비탄의 정서를 그대로 표출하는 책은 별로 없다.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도 최대한 담담히 말한다. 대상이 어찌 되었든 그런 전달 방법과 그렇게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맞다. 삶은 죽음을 향해간다. 죽은 자에게는 모르겠지만 산 자에게 죽음마저도 삶의 일부이다. 슬픔은 슬픔대로 표출해야 하나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이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임을 최대한 담담히, 우아하게 말해 줄 필요도 있다.


언젠가부터 ‘영영 이별’(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책을 눈여겨보았다. 그중 최고는 『내가 함께 있을게』였다. 삶과 죽음의 정체가 궁금할 때, 그들이 서로 그 안에 있음을, 그리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말해 주는 그림책이다. 놀라운 책이다. 어떻게 그렇게 정제된 언어로, 어떻게 그렇게 간결한 스토리로 삶과 죽음의 맞물림을 전할까.

언젠가 내 격렬한 슬픔이 세월에 닦이고 닦여 평온해지면, 내가 내게 거리를 두어 비로소 정확한 언어로 말할 때가 되면 삶과 죽음에 대한 그림책을 쓰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러다 이 책을 다시 보았을 때, 생각했다.

‘완벽한데! 내가 굳이 또 보탤 필요가 있을까.’


『내가 함께 있을게』, 볼프 에를브루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웅진주니어, 2007


『곰과 작은 새』는 참 특이한 책이다. 곰이 사랑스런 친구인 작은 새를 갑자기 떠나 보냈다. 곰은 작은 새를 기억하고 함께한 날들을 떠올리는데, 곰의 상실감, 절망,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에 대한 허무함, 무기력함이 너무 무거워 정말이지 내 등짝을 내리누르는 듯하다. 흑백톤과 아트만지에 크레용이나 목탄으로 칠한 듯한 그림도 독특한데, 이 그림은 이 이야기를 묘하게 판타지로 만든다. 나는 이 책을 보면 흑백 집시영화, 아님 안소니 홉킨스가 젤소미나를 부르던 『길』이 연상된다.

『곰과 작은 새』를 읽고 나면 남은 자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일단 슬픔을 고스란히 견디는 것, 그리고 그 슬픔을 승화시키는 것이다.



2013년 말에 모리스 샌닥Maurice Sendak의 마지막 책이 나왔다. 『나의 형 이야기』.

이 책은 비탄으로 가득하다. 내가 본 그림책 중 『나의 형 이야기』는 비탄의 최고봉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비탄을 고스란히 말하는 그림책은 보지 못했다.


『나의 형 이야기』, 모리스 샌닥 글·그림, 서남희 옮김, 시공주니어, 2013


책 표지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신화풍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이야기 또는 이 시(서남희 번역가는 ‘비가’라고 칭한다)는 여러 문학 작품의 대사를 차용하고 변주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에밀리 디킨스의 시, 자신의 그림책 『쌀을 넣은 닭고기 수프』 등이다.


책을 펼치고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둘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우주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본문 첫 장면, 바로 이별이 닥친다.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새 별이 돋고,

그 빛살에 단단한 지구는 두 동강이 나 버렸네.

잭은 얼음대륙에 던져져 코가 꽁꽁 얼고

가이는 가파른 공중을 빙빙 돌다 보헤미아 땅에 떨어졌다네.

곰의 굴속으로 쿵,

곰은 가이의 숨통을 끊으려 했지.

가이는 곰에게 얼어붙은 잭이 있는 곳이 어딘지 수수께끼를 냈네.

곰은 대답 대신 자신의 몸을 찢어 큰곰자리가 되었네.

가이는 큰 곰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광대한 시간 속으로 뛰어들었지.

세상은 녹고

5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잭은 이제 초록빛 신비로운 꽃들 속에 있었지.

가이가 잭의 코를 깍, 깨물자 잭은 훅, 숨을 쉬네.

“희망 한 줌 없는, 바로 지금 살아났구나.”

이제 잭은 동생의 팔에 안겨 편안하게 잠드네.

가이는 속삭이지.

“잘 자, 우린 꿈속에서 보게 될 거야.”




이별 뒤 가이. 가파른 공중을 빙빙 돌다 곰의 굴 속으로 떨어진다.


형과의 이별 뒤 형을 찾는 동생의 모험은 신화처럼 원초적이고 상징적이며 온 세계를 포괄한다. 동생의 슬픔이 그의 세상 전부를 잠식했음을, 슬픔이 그의 심층부의 생명력까지 파고들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한 번도 소리질러 부른다거나 우는 장면이 없는데도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절규', '절절하다', '절박하다'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특히 가이가 세상을 하염없이 떠돌고 험악한 곰을 마주하는 장면은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추스리지도 못한 채 마냥 휘청거리는 모습처럼 보여 더 위태롭다.

시간이 지나 가이는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인다. 세상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형을 깨운 가이는 비로소 인사를 한다. 평온하게 안녕을 말한다.


가이의 마지막 인사


그러나 이 평온한 인사는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

잭은 평온히 잠들고 가이는 잭과 평화롭게 인사하나 마지막을 향해가는 길은 비탄으로 가득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걸 알아차린다면, 마지막의 평온한 인사마저 슬픔이 꾹꾹 억눌려 있음도 알아차리고 만다. 가이는 완전한 평온을 되찾은 것이 아니다. 이별을 완전히 자기 속으로 끌어안았을 뿐이다.

작가인 모리스 샌닥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 원고를 마무리할 무렵, 모리스 샌닥의 슬픔은 다른 국면을 맞았을 것이다. 그에게 슬픔은 이미 체화된 것이니 익숙했다. 그보다 더 격정적으로 비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때가 되었다. 끝도 없는 생이라면 어느 순간에 슬픔이 격렬한 감정으로 분출될지 모른다. 그러나 삶이 저물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줄어드는 생의 에너지만큼 슬픔의 격정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모리스 샌닥은 이 원고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 5년 전 그의 형 잭 샌닥이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서 슬픔에 처한 동생 가이는 작가인 모리스 샌닥 그 자신이다. 형 잭은 그의 형 잭 샌닥이다. 형의 죽음. 남은 동생이 형을 그리는 마음은 절망이 되고 함께한 시간을 돌이킬 수 없음은 통탄스럽다. 그런데 작가에게 죽음이 가까워지자 비탄은 옅어지고 말도 안 되는 희망이 번져갔다. ‘영영 이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이제 재회할 수 있음을 알리는 때가 다가왔다.

영혼도, 사후세계도 다 거짓일 수 있다. 인간이 확인 못하는 거의 유일한 영역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라도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것만큼 원하지 않는 이별을 겪은 인간을 위로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말들이 세상의 이 켠에서 저 켠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쓰였다고 믿는다.


다시 첫 장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형제, 잭과 가이"




추석 즈음하여 여기저기서 몇 건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추석 지나자마자 지방 장례식장에 내려갔고 달랑 얄팍한 숄더백 안에 든 초간단 여행도구로 며칠을 지냈다.

몇 번째이던가, 내가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 장례식을 치르고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졌다. 내겐 내내 이 말이 맴돌았다.


또 한 번 계절이 간다.


찰나를 경계로 계절은 스산해졌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나는 같으나, 뭔가가 또 달라져버렸다.

이 말이 무엇인지, 이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난 아직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마음속 단추 하나가 툭 풀린 느낌? 계절의 물리적 경계이자 사람 마음의 심리적 경계를, 높지 않은 계단 또는 넓지 않은 틈이나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을 또 넘어서버렸다. 내가 애쓴 것이 아닌데 속수무책으로 삶은 깊어졌다. 스산한데 겸허해지고 입은 더 무거워졌다.


20대 마지막에 아주 가까운 사람과 영영 이별을 경험했다. 그 뒤에도 몇 번의 어처구니없는 부고 소식을 듣고 황망해하며, 내 삶은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란 것 자체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이번에도 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지만 내게 죽음은 기억하는 게 아니다. 일부다. 어느 하루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있을까.

외로움과 고독에 천성적으로 강하지만, 그 천성적 능력에 생의 쓸쓸함, 깊은 외로움, 두려움이 더해졌다. 내가 스스로 그 깊숙하고 무거운 감정을 도저히 놓아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엇나가버렸다.

외로움을 이해받으려 하지도 않고 그냥 고스란히 견딘다.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인양.

솔직히 말하면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게 너무 큰 바람이라는 생각에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실은, 누가 나를 알아주면 좋겠다. 내가 그렇다고. 처절한 슬픔과 외로움에서 뒤돌지 않았다고.

그런데 만약 내게 그러지 말라고 그 비탄을 그만두라고 한다면, 나는 당장 말할 거다.


“싫어!”

슬픔을 간직해서라도 기억하려는 거다.

그리고… 말도 안 되고 볼품없으나 내게는 중요한, 저항이다. 슬픔, 컴플렉스, 상처에 대해- 힐링과 치유를 필요 이상으로 부르짖는 거대하고 일방적인 말들에 대한. 치유법 다수가 결국은 소비와 상업으로 연결되는 데 대한.


이 책은 여는 글도, 추천사도, 번역가의 후기 글도, 모두모두 아름답다. 절실한 아름다움. 각자의 언어로 결국은 모리스 샌닥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별인사를 했는지에 대해 말해 준다.

조금씩만 발췌한다.


“이제까지의 작품들은 물론, 세상을 떠난 형 잭과의 재회를 갈구하는 마지막 표현인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듯, 샌닥은 셰익스피어 희곡의 한 인물이 지적한 도전에 스스로 뛰어들었던 것만 같습니다. ‘자욱길조차 없는 바다, 꿈조차 꾸지 못한 해안을 향해/그대들은 격렬하게 몸을 던지고.’ ” _스티븐 그린블래트(셰익스피어 연구자, 하버드 대학 교수)


“이 책은 모리스 샌닥의 작품에서 자주 보인 이별 혹은 분리와 고통스러운 모험, 재회로 이어지는 둥근 고리를 그대로 밟아 갑니다. 모리스 샌닥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누워 이 책의 최종 원고에 마지막 눈길을 주고 나흘 뒤 세상을 떠났지요. 결국 형과 연인을 위한 비가는 샌닥 자신을 위한 것이자, 우리에게 남긴 작별 인사가 되었습니다.” _서남희(번역가, 그림책 평론가)


“이것은 모리스가 형인 잭, 50년간 연인이었던 유진 글린, 그리고 자기 자신 및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창조한 지극히 아름다운 세계를 위한 비가입니다. 펼쳐지는 장면마다 모리스는 그 세계를, 그곳의 모든 것과 구석구석을, 그림책 작가로서 모리스 샌닥이라는 이름이 연상시키는 모든 주제와, 모든 리듬과, 모든 시적이고 시각적인 비유로, 화려하고 격렬하고 대단히 충격적으로 압축해서 모았다가 풀어낸 듯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를 안개로 흩어 버립니다. 사랑과 절막 속에서, 단념하는 듯하면서도 간절히 바라고, 지혜로우면서도 매우 어린아이 같은 《나의 형 이야기》는 모리스의 즐거운 외침이자 어른스러운 작별 인사입니다.”_토니 쿠쉬너(극작가, 퓰리처 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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