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만지다
비교적 근래에 나온 책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다시 고전이라 불릴 그림책을 고르고 말았다. 꽃 때문이다. 꽃시장에 가고 싶고 꽃을 만지고 싶고 꽃선물을 하고 싶은데 어쩌다 보니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났다. 『리디아의 정원』.
책 속 주인공 리디아와 나는 닮았다. 나는 어깨가 좁고 리디아만큼 마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호리하다. 언제일까, 이십 대 초반에 이 그림책 주인공 리디아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패브릭 인형을 선물 받은 적도 있다. 그때는 이 그림책을 몰랐다. 나중에서야 붉은빛 갈색 머리에 하늘색 원피스, 연두 모자를 쓴 그 인형이 이 책의 주인공 리디아란 걸 알았다.
생긴 건 닮았어도 내게는 없는 능력, 나는 리디아의 원예 능력이 부럽다. 리디아는 생활 속에서 길러진 원예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식구들과 함께 식물을 가꾸며 자랐다. 책표지를 넘기면 앞면지에 토마토, 양배추, 해바라기 등등이 풍성하다. 그림 가운데 리디아와 리디아의 원예 능력에 큰 영향을 주었음직한 할머니가 있다. 바구니 가득 담긴 야채, 잎이 무럭무럭 자라는 밭만으로도 풍요로운 식사, 적당한 노동으로 건강한 일상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풍요로움은 이 장면뿐, 한 장을 넘기면 집 앞에 어깨를 구부정히 맞댄 부부가 보인다. 무슨 일일까.
리디아의 아빠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지 오래고 이제는 아무도 리디아의 엄마에게 옷 짓는 일을 맡기지 않는다. 어려운 시절. (나는 이 책의 배경이 미국 대공황시대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이 책 어디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식구들은 리디아를 도시에 사는 외삼촌에 보내기로 한다.
리디아는 홀로 도시에 도착한다. 어두운 모노톤으로 표현된 기차역은 황량하고 거대하다. 작고 마른 리디아 주변에만 빛이 들 뿐 온통 어두고 사람 형체도 뚜렷하지 않다. 리디아는 거대하고 건조한 건축물 가운데 있지만 동떨어져 보인다. 어리둥절함이 외로움을 살짝 감춰주지만 높은 천장과 기둥에 비해 리디아는 작기만 하다.
하지만 천성이 원예사인데다 긍정적이고 건강한 이 아이는 곧 기대에 부푼다. 외삼촌과 함께 새로운 동네로 오면서부터이다. 시골집 식구들에게 쓴 말을 직접 들어보자. “보고 싶은 엄마, 아빠, 할머니. 가슴이 너무 떨립니다!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창 밖에 화분이 있어요. 마치 화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중략)”
그러나.
그림 어디에도 화분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들 사이 빨랫줄에 가득 널린 빨래들, 철제 사다리, 검은색 쇠 테라스에 빈 화분 받침대가 있을 뿐이다.
부모에 대한 속 깊은 소녀의 배려라고 너무 짠하게 여기지는 않아도 된다. 리디아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본 거다. 이 삭막한 거주지 앞에서 리디아는 눈이 반짝거렸을 거다. 앞으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니. 리디아는 큼직한 캔버스를 본 거다. 무미건조한 건물과 거리는 앞으로 자기가 꾸밀 큼직한 캔버스였다. 원예사다운 야망이다.
외삼촌의 빵집에 꽃이 하나씩 생겨난다. 꽃은 주변을 환하게 밝혀준다. 리디아처럼. 다음 해가 되자 외삼촌에 빵집 건물 틈이란 틈에는 온통 화분으로 가득하고 빵 진열대 앞에도 꽃이 가득하다. 도시는 회색빛이어도 리디아네 빵집은 환히 빛나고 꽃을 보는 사람들은 즐거움에 취해 있다. 꽃은 거렁뱅이처럼 보이는 허름한 사내도 빛나게 한다.
꽃과 리디아의 능력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정도라면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어땠을까?
배불뚝이 외삼촌은 삶의 무게를 지고 묵묵히 수행하는 듯 무뚝뚝하고 말이 없다. 표정도 없고 웃음도 없고 리디아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일만 한다. 그러다가 중반부를 넘어서면 빵집 창 너머 리디아를 보며 슬며시 웃는 것 같고, 리디아와 빵집 식구들의 아름다운 선물에는 처음으로 정면을 향해 눈을 활짝 뜨고 눈썹이 치켜 올라간 표정을 짓는다. 무표정했던 인물의 생생한 표정 변화는 즐겁다. 무거운 몸을 버티는 것처럼 단단히 바닥을 딛고 선 두 발하며 생각 없이 나온 배, 무방비로 펼쳐진 다섯 손가락까지, 인물과 공간의 디테일을 찾아낼수록 인물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이야기의 생동감도 더한다. 경쾌한 선이 거침없어 보이지만 그림 작가는 디테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에 화답하여 독자는 이 디테일들을 발견하는 과정이 즐겁다. 디테일은 장면을 보충하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또 다른 부분을 상상하거나 짐작하게 한다.
시골집의 사정이 좋아져 리디아가 돌아가게 된 날, 기차역 풍경은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와는 아주 다르다. 밝고 따스한 노란 빛이 퍼지고 각자의 존재감으로 화면은 가득 차 있다.
이 책의 글 작가 사라 스튜어트Sarah Stewart와 그림 작가 데이비드 스몰David Small은 부부다. 특히 데이비드 스몰은 아내인 사라뿐만 아니라 여러 글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며 그림책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린 책들은 유머 넘치거나 엉뚱하고, 따뜻한 결말을 이루거나 따뜻한 정서가 깔려 독자를 안심하게 하고 안온하게 이끌어준다.
데이비드 스몰을 알고 싶다면 그의 자전적 작품 『바늘땀』을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제목인 '바늘땀'은 그의 몸에 남은 수술자국을 뜻하지만, 동시에 바늘로 찌르는 듯 가혹했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어울린다. 밝고 유머러스한 작품이 떠오르는 작가이기에 더욱, 그의 가족사, 성장사가 너무 날카롭고 어두워서 놀랄 수밖에 없다. 다행인지 데이비드는 적절한 상담사를 만났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매진하며 자기 세계를 만들었다. 그는 부모 대대로 내리물린 담벼락 안의 병든 세계에서 벗어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멀찍이서 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을 풀어놓은 책이 그래픽노블 『바늘땀』이다.
그리고 사라 스튜어트. 철학과 라틴어를 공부했다는 이 작가는 할머니가 된 지금도 소녀 이미지를 폴폴 풍긴다. 사라 스튜어트는 데이비드 스몰을 가리켜 ‘영혼의 샴쌍둥이’라고 표현했다(서남희,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중). 데이비드는 여러 글 작가와 그림책 작업을 함께 했지만 그중에서 그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그림책은 그의 아내와 함께한 『리디아의 정원』과 『도서관』이다.
화려한 모험 없이도 완벽한 이야기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의 자유로움이 드러난다. 글을 쓴 사라 스튜어트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사라 스튜어트의 사진을 보면 『리디아의 정원』의 리디아나 『도서관』의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작가인 사라를 어떤 방식으로든 차용하고 모델로 삼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책 속 인물들과 작가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닮은 듯하다. 어떻게 이토록 작가와 작중 인물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될까, 글 작가의 영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림 작가가 리디아와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모습을 창조해서일까. 두 작가의 창작과정을 상상하다 보면 사라 스튜어트가 자신의 남편이자 작업 파트너인 데이비드 스몰을 ‘영혼의 샴쌍둥이’라고 한 데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게 된다.
두 책 모두 무겁지도 않은 내용이요, 따스한 데다 보는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감동이 있되 너무 가볍거나 상스럽거나 인위적이지도 않다. 그림책 자체의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특별히 상처나 굴곡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호감과 감동 정도로 그칠 뿐 파괴적인 독서 경험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지만, 두 그림책은 또 다른 영역에서 책의 놀라움, 책읽기의 경이로움을 알려준다.
책 읽기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세계에서 그렇다. 글과 그림이 화합하여 보이는 것 이상, 더 큰 이미지 세계를 연출해 낸다. 어떤 책이든, 특히 그림책이라면 이미지 세계의 연출이 당연하나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의 묘미나 깊이, 자연스러움이 이 정도면 그림책에서 마스터피스의 경지가 아닐까 한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림책이라는 장르로 여러 주제, 여러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화합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때로는 공식이 지나쳐 인위적인 도식처럼 되는 경우도 있다. 사라와 데이비드 부부처럼 한 명도 아닌 두 작가가, 자신들이 펼쳐놓은 재료로 이만한 화학적 융합 효과를 거두는 것은 놀랍다. 게다가 이 대단한 능력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욕심 없고 소박하게 다가온다. 온 건물을 꽃으로 도배하고 집을 도서관으로 만들었다면 꽤 큰 야망이자 업적일 법도 한데, 주인공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생활이다.
『리디아의 정원』도 『도서관』도, 둘 다 사랑스러운 그림책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그림책이다. 작아도 힘이 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고, 힘이 더 세지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래서 또 닮고 싶다. 원래도 닮아 있지만 볼 때마다 더 닮고 싶다.
닮아가긴 한다. 지금은 나도 꽃을 만지고 꽃으로 주변을 장식하고 꽃을 다듬어 선물할 줄 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편집자로 더 큰 기쁨을 주었을까, 꽃 만지는 사람으로서 더 큰 기쁨을 주었을까.
나에게 꽃은 구원 같았다. 꽃을 다듬고 꽃꽂이를 할 때 그나마 활자로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났고 어느 때인가는 무아지경으로 꽃만 갖고 놀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