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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Jan 23. 2016

주술사가 된 시인

그의 이야기에 홀리고 그녀의 그림에 사로잡히다


그림책이 꽂혀 있는 칸, 이 책은 다른 책보다 더 깊숙이 박혀 책들의 그림자처럼 어둡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한 권 고르려고 책꽂이 앞에 의자를 돌려놓고 앉아 몇 번을 둘러보았다. 이 책의 제목을 천천히 읽으면서 시선을 돌릴 뿐 책꽂이에서 꺼낼 생각을 안 했다. 강렬하고 난해하다는 인상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꺼냈다. 책들이 모두 친근하여 이 책이 가장 새롭고 낯설어 보였다. 


『그림자』, 블레즈 상드라르 원작, 마샤 브라운 그림, 김서정 옮김, 보림, 200309 - 문틀 그림자가 드리워 책 가운데 부분이 어두워졌다.


프랑스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1887-1961)의 시에 그림책 작가 마샤 브라운Marcia Brown(1918-2015)이 그림을 그린 책이다. 


블레즈 상드라르.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의 박명욱은 ‘구두창에 바람이 든 사내’라고 이 프랑스 시인을 묘사했다. 14살 때 부모와 누이의 돈을 훔쳐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실었고 그렇게 시작된 방랑은 평생 지속되었다. 폴 모랑은 그에 대해 “아시아의 콜레라, 시베리아의 추위, 창부들의 관능적 사랑, 피지의 영원한 봄, 교수대, 들소, 배 밑창의 화물칸, 상드라르는 이미 이 모든 걸 보았다.”(위의 책 재인용)고 말했고 그는 스스로 말했다. 


파리에서 뉴욕까지

지금까지, 나는 살아오는 동안 내내 기차들과 경주했다

마드리드에서 스톡홀름까지

그리고는 내깃돈을 모두 잃어

이제 남은 것이라곤, 파타고니아, 내 거대한

슬픔에 어울릴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와 남부 대양을 향한 여정뿐

나는 길에 있다

나는 언제나 길에 있다

-장시 「프랑스의 소녀 잔느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산문」 중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158쪽 재이용)



프랑스 시단에 그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는데, 나는 아직 그의 다른 시는 읽어 보지 못했다. 다만 위의 책에 따르면 상징주의 시, 어두침침한 실내, 멜랑콜리한 정서에 빠져 있던 프랑스 시 문단에서 블레즈의 실제 체험이 담긴 시어는 그 자체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듯하다. 도시 생활자가 따라올 수 없는 건강함과 모험 같은 것 말이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블레즈 상드라르(1917). 이 사내는 방랑만 한 게 아니다. 많은 예술가와 교류하고 전쟁터에 나가 팔 한 쪽을 잃고 특파원도 했다. 심지어 결혼도 했다. 


세계와 자기 생을 탐험하고, 정착할 수 있음에도 끊임없이 자리를 박차고 다른 곳을 향했던 방랑자. 

지금은 탐험도 가능하지 않은 시대다. 미지란 없고 여행도 탐험이 될 수 없다. 떠난다 해도 네트워크를 놓지 않으며 방랑은, 그야말로 목적 없는 방랑은… 현대에 존재하는가? 무어라도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행위가 의뭉스러워지는 시대. 근현대의 경계를 거쳐 살며 한 육체로, 생 전체를 방랑에 전념한 그야말로 제대로 세계를 방랑한 마지막 인간 아닐까.  


그런 그가 아프리카를 주류할 때, 여러 마을의 주술사와 대화를 나누고 모닥불 가에서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춤추는 영상을 떠올리는데 그것이 그림자였다.


면지를 넘기면 첫 페이지, 희끗희끗 거친 붓선으로 표현된 사람 얼굴 또는 가면을 연상시키는 마르고 갸름한 형태가 둥둥 떠 있다. 화면 바닥에는 누워 있는 듯한 사람의 얼굴이 놓여 있다. 블레즈 상드라르의 원작 제목은 주술사La Féticheuse다. 그림책 작가 마샤 브라운은 그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림자’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첫 페이지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주문을 거는 주술사의 얼굴 같다. 마력을 뿜듯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빨아들인다. 


면지를 넘기면 바로 나오는 첫 그림. 얼굴과 마주한다. 


이 얼굴 그림은 이 두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 이들이 이야기해 주는 세계로 끌어들이는 장치로서도 역할을 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그와 눈을 마주치고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인물이 되고 만다. 또 그림자 없는 것들을 말하는 첫 구절부터 원초적 심상과 주술적 느낌으로 가득하다. 최면에 걸린 듯 이야기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간다. 



화면에 둥둥 뜬 당신은 주술사인가, 이야기꾼인가. 모닥불을 가운데 둔 채 당신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신을 빤히 쳐다보던 내 눈과 당신 이야기에 온통 집중하던 내 머리는 불빛에 일렁이는 당신의 그림자, 우리들의 일렁이는 그림자에서 어느덧 당신 이야기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그림자에는 이야기 속 혼령, 과거의 혼령이 있고 그림자는 이야기에 따라 흥분하고 움직인다. 



이야기꾼이 입을 연다. 그림자가 없는 것들을 말한다.

눈, 모든 달의 아이, 해의 아이, 땅의 아이, 물과 공기와 불의 아이. 

그리고 그림자에게도 그림자가 없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물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밤이 온다.


숲에 사는 그림자는 밤이면 기어나와 불 가에서 춤추는 이들 틈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그림자는 조용하다. 절대로 말이 없이 듣기만 한다. 그러다 불길이 사그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림자가 잠든 게 아니다. 자다 살짝 눈을 떠도 그림자는 내가 있는 곳 어딘가에서 날 본다. 

불길이 사위면 그림자는 점점 힘을 잃어간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기대지도 못하는 채 흐늘거리는 그림자. 그러나 그림자는 울지 않고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그림자는 목소리가 없다. 


 해가 떠오르면 세상에 온갖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늘 거기에 있고 내 몸짓에 따라 그림자는 나를 찌르고 깨물 수도 있다. 


그림자는 놀라운 존재.

하지만 무서워할 건 없어. 

그림자는 죽음이 아니야.

틀림없단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아침마다 나타나서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죽음은 다가올 때

비명을 지르거든.

그리고 그림자는 아무것도 달라지 않다.

그림자는 배고픈 걸 모르니까. (23쪽)



그림자는 어디든 사람을 따라다닌다. 전쟁터까지. 그림자는 장식물도, 문신도 필요 없다. 얼룩말 그림자에게는 줄무늬가 없다. 해의 위치에 따라 그림자는 자기 자리도 바꾸고 때로는 사방에 다 나타난다. 


저녁이 되면 그림자는 점점 넓어져, 무겁게 오솔길에 드러눕고 만다. 물끄러미 춤추는 이들 주변을 서성이는 그림자, 바닥을 기는 그림자를 보면 무기력해 보였으나, 저녁 무렵 그림자는 매도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무거워 끝내 매가 땅에 내려앉도록 굴복시킨다. 아무도 그림자와 싸울 수 없다. 


블레즈 상드라르는 그림자에 영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자라는 제목을 듣지 않았다면, 이 시가 의미하는 게 그림자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을까? 시인이 주술사가 된 듯, 그림자에 생명을 불어놓고 그림자의 특성을 말한다. 그림자의 생명은 그림자의 주인에게 오는 것. 그리고 그림자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검은 형체이자 내가 늘 밟고 오는 과거이기도 하다. 내가 현재라면 내게 바짝 붙은 그림자는 현재라는 과거. 찰나 다음이라고도 할 수 없이 동시. 그러나 나는 스스로 행동하고 그림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따른다. 내 뒤에 바짝 붙어오는 내 밖의 나이자 내가 지나온 흔적. 그림 작가인 마샤 브라운은 이야기꾼의 이야기와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과거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대한 믿음, 과거 속의 혼령들 말이다.  

그림자는, 가면 안에도 따라온다.


마샤 브라운은 콜라주로 이 시를 표현했다. 초록-주황, 남색-빨강 등 색의 대비도 강하고 그림자 색으로는 새까만 종이를 선택해서 대비 효과가 더 강렬해진다. 숲, 나무의 그림자에서도 얼굴 형태를 연상하게 되고 그림자도 사람도 너울대며 춤을 추지만 형상은 곧잘 기괴해진다. 밤길을 나아가는 그림자를 보라. 부딪치고 갈가리 찢기면서, 몸을 한껏 늘여 땅 위를 긴다. 아무리 처절해도 그림자는 우는 법이 없다. 목소리가 없으니까. 이쯤 되면 그림자는 저주받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림자는 내 안의 어두운 것이 만들어낸 기괴한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블레이즈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시 밤이 되자 블레즈는 불을 피우고 그림자를 보라고 한다. 모닥불에 비추는 그림자는 불길 모양에 따라 움직임을 바꾼다. 일렁이며 커졌다 불빛이 어두워질 때면 작아지고 어둠에 금세라도 묻힐 듯하다. 그 자체로 이야기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그림자.  


그림자는 무엇일까?

타닥거리는 장작에서 

튀는 불꽃일까?

불을 밝히렴!

불꽃은 그림자가 없고,

눈도 그림자가 없지만,

그림자는 눈 안에 있단다.

그것은 눈동자!

내쉬는 숨마다 그림자는 살아난단다.

그림자는 놀이,

그리고 춤. (40쪽)



도시 사람들이라면 이 책 속 그림자에서 무의식과 내면의 두려움을 찾아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이야기 말하기 – 스토리텔링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이 시는 구태여 상징을 찾아낼 이유가 없는, 흡입력 높은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꾼은 그림자에 생명을 준다. “하지만 그림자는 잠들지 않아. 그림자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에서 약간은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눈을 살짝 찌그리며 겁을 주듯 말하겠지. 아이들은 그림에서 마냥 이야기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그의 이야기를, 그의 커다랗게 일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테다. 한낮의 그림자는 사방에 생기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의 그림자는 무겁고 길게 땅바닥에 늘러 붙는 모양을 떠올릴 거다. 이야기가 끝날 때, 이야기꾼이 “그림자는 놀이, 그리고 춤.”이라고 말하고 씨익 웃으면 비로소 아이들은 이야기꾼의 마법에서 서서히 깨어나 온몸의 긴장을 풀고 웃기 시작하고 몸을 이완하듯 리듬에 맞길 것이다. 

아이들은 이야기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림 작가인 마샤 브라운 역시 아프리카를 여행했고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을 살려 콜라주로 표현했다. 마샤 브라운은 동시대의 글 작가와 함께 작업하기보다 옛이야기를 선택하고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택하는 작가이다. 『신데렐라』, 『돌멩이 수프』, Dick Whittington and His Cat(딕 휘팅튼과 고양이) 등 세계 곳곳의 옛이야기 그림책을 냈고 유럽뿐 아니라 인도, 아프리카 등지의 이야기도 선택했다. 책마다 표현 방법은 다양하나 색을 한정해서 쓰거나 여러 색을 쓰더라도 채도를 낮춰서 색의 대비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이 책은 예외다. 그림자라는 무채색의 형체를 드러내기 위함인지 다른 사물, 배경에서는 색을 한정 없이 풀어놓는다. 색은 서로 충돌하여 때로는 형상이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하다. 빛에 따라 크기와 무게를 달리하는 그림자는 내 외면의 흔적이자 내면의 자아가 나도 모르는 새에 밖으로 표출된 양 내가 의도하지 않는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그림자와 사람 형체는 검은색 종이로 오려 붙이고 배경의 산과 바위는 막스 에른스트 그림처럼 데칼코마니로 표현한 듯 종이를 겹쳤다 떼어낸 모습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의 색을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했는데, 색감과 색의 조화가 탁월하다. 밝거나 명료한 느낌은 아니나 시시때때로 변하는 색을 담아내며 시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바위산이나 저녁 무렵의 초원의 색이 특히 그렇다. 이 색들의 조합이 주는 이질적이고 불길한 느낌은 시의 주술성을 살리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사진이 책의 색을 제대로 담아내지는 못했다. 탁한 색들의 조합은 살짝은 불길한 느낌. 해가 질 무렵, 문득 고요함 속에 찾아드는 적막감, 엄습하는 두려움을 떠올리게 한다.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또 한 명의 이야기꾼이 있다.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1885-1962). 블레즈 상드라르와 생몰연도가 거의 같다. 블레즈와 같은 시기를 공유한 작가이고 그녀 역시 아프리카에 머물렀다. 그녀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이자 영화 속 여주인공 카렌의 실제 모델이다. 카렌 블렉센이 진짜 이름이고 이자크 디네센은 필명이다. 영화가 광활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펼쳐지듯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그녀는 유럽 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져가는 독특하고 오래된 전통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전에, 나는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완벽한 관객이 있었어요. 백인들은 이제 더는 낭독하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들은 지루해 못 견디거나 졸고 말지요. 그러나 원주민들은 아직 들으려 해요. 나는 그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어요. 모든 넌센스도요. 나는 말했지요.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머리가 두 개인 코끼리를 갖고 있었지….” 그러면 당장 그들은 더 듣고 싶어 했어요. “뭐라고요? 그래요, 그렇지만 마님, 그가 그것을 어떻게 찾았나요, 그는 어떻게 그 코끼리를 먹였나요?” 또는 그 무엇이든. 그들은 이런 발명을 사랑했어요. 나는 각운에 맞추어 말하며 그들을 기쁘게 해 주었지요; 그들은 각운을 알아낸 적이 없거든요.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Wakamba na kula mamba” (“와캄바 부족이 뱀을 먹는다”), 이 문장은 그들을 화나게 하지만 각운으로 매우 즐겁게 만들어주었지요. 그런 뒤에 그들을 말했어요. “마님, 비처럼 얘기해 주세요.” 그래서 나는 그들이 즐거워했다는 것을 알았지요. 왜냐하면 비는 그곳에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거든요. (1956년 「파리 리뷰Paris Review」 인터뷰 중에서) 


스토리텔링의 전통이 살아있는 곳에서는 단어 하나에 생명력, 주술성을 훨씬 더 많이 부여하게 된다. 이야기꾼은 단어 하나하나가 인물로, 형체로 살아나게 해야 하고 청자들은 이야기꾼의 억양과 발음에서 이야기의 상상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자크 디네센은 자신에 대해 소설가도 저자도 아닌, 이야기꾼storyteller라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문득 내 그림자를 찾으려고 바닥을 둘러보았다. 빛이라는 현상이 있고 사람이란 무게 나가는 몸뚱이가 있어서 내게도 그림자가 생긴다. 길어졌다 짧아졌다, 사방에 있다 때로는 내가 삼킨 듯 잘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 낮이면 나타나고 밤이면 사라지나 한 줌이라도 빛이 있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제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 만약 어떤 지식도 없다면 그림자는 신비하고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림자는 놀이의 대상이지만 두려움의 대상도 될 수 있다. 


아무 지식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현대인이 더 잘 살까, 구석기 인이 더 잘 살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언어도, 기계 문명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놓인 아기라면 태초의 인류와 지식의 수준이 같겠지. 그렇다면 그림자를 두고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까? 혼자서 이야기를 상상하는 게 가능할까? 자연과 우주를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은 보편적이겠으나 정말 아무 지식도 없는 세상의 첫 인간이 해, 달, 그림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 단계에 이를 수 있을까? 


나는 사람들이 구축해 온 커다란 세계관을 학교와 책을 통해 알았고 지식과 보편적 세계관은 내게 체화되었다. 나는 혼자 상상할 수 있고 활자를 보고 연상 작용을 하며 강렬한 이미지 세계를 떠올릴 수 있다. 그건 참 멋있다. 독서가 은밀한 경험이라는 데에 아직도 강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공적으로 은밀한 영역의 경험을 함께한다면 그것도 참 멋질 것 같다. 이 그림책처럼. 열 명 남짓한 이들이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꾼의 목소리에 몰입하는 순간,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꾼의 말을 재현하는 마법 같고 주술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까?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에서 저자 박명욱은 현대를 체험이 부족한 시대라 했다. 직접 체험은 물론이고 이야기꾼에게 실제로 듣는 실감나는 간접 체험의 기회마저 없어지는 듯하다. 책이나 미디어, 마이크나 기계음 말고. 강연이나 북콘서트도 말고. 친구 두서너 명이 카페에서 나누는 수다 말고. 좋긴 하지만 이것과 다른 경험 말이다. 한 이야기꾼의 목소리에 집중하여 말없이 같은 이미지 세계를 펼치는 경험. 


어떻게 하면 이야기꾼이 연출하는 주술적 현장, 상상을 공유하는 마력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을까. 상상마저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구축해 온 커다란 세계관의 일부이며 지식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다만 의문을 품는다. 태초의 이미지 세계-상상 세계-원형적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은 과거에만 존재했으며 새로운 신화는, 원형적 이야기는 더 이상 창조될 수 없는 걸까.  


오늘의 책. 『그림자』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젋게 이 세상에 오다』『바베트의 만찬』. 가지와 꽃은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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