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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Mar 22. 2016

[책 말고 번외편]나와 인공지능

나는 인공지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1 사람처럼 생각하는 법밖에 모르는 나 

핀터레스트를 한다. 동물 사진 보는 게 좋아서 동물 사진만 모으는 보드도 하나 마련했는데, 보드 타이틀은 animal, man, story이다. 그 보드에 사람만 나오는 사진은 없다. 꼭 이야기가 있는 사진들만 모은 것도 아니다. 핀터레스트에는 온갖 동물들의 새끼, 사랑스러운 모습, 흐뭇해하는 동물들 사진이 아주 많다. 그런 것들 보면서 나도 기분 좋아지지만 정작 동물들도 스스로 흐뭇해하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지만 사람들은 흐뭇한 표정의 동물에게 열렬히 환호하고 보면서 심장이 녹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을 경험한다. 나라는 man은 animal의 일상과 몸짓을 보면서 story화 한다. 인간 표정답게, 인간 몸짓답게, 인간 감정답게 받아들이고 인간 이야기답게 이야기를 짐작하고 느낀다. 


이것은 나의 핀터레스트 보드 animal, man, story. 조롷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가득하다.


사람의 짐작이 맞을 수도 있다. 특히 오랑우탄, 침팬지 같은 유인원이나 고양이가 새끼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사랑하고 보호하는 몸짓이 사람과 아주 많이 닮아 있다. 아니, 똑같다?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모른다. 모든 동물이 그런지 아닌지는. 곁 사람도 이해 못하는 주제에 세상 만물 이해한다고 하기는 좀 그렇다.


사람인 나는 기계에도, 게임 캐릭터에도 감정을 부여한다. 이십대 초반에 RPG게임을 할 때, 나는 마음이 아파서 게임을 제대로 못했다. 지지리 게임 룰도 모르고 스킬도 없는 나는 자꾸만 주인공을 죽게 만들었다. 그 과정을 반복해서 내 캐릭터의 레벨을 높이고 숙련된 기사처럼 난관을 헤쳐 나가게 하는 게 내 몫이지만 나는 주인공 전사가 죽는 게 마음이 아파서 몇 번 하고서는 더는 그 게임을 반복하지 못했다. 게임 캐릭터가 그런 감정을 내보인 게 아니라 그 캐릭터를 보고 조종하는 내가 그런 감정을 캐릭터에 심었다. 


나는 자꾸만 감정을 싣는다. 사람에게 그러는 것은 맞으리라. 그러나 사람 아닌 존재에도 그렇게 되고 심지어 감정 없는 것에도 마음을 준다. 



2 이세돌 드라마 

이세돌 vs 알파고 경기 2국을 보면서 엄청 충격 받았다. 엄청… 아주 엄청나게 충격 받아서 한 시간 정도는 말없이 있다그 날 저녁 내내 엄마한테 조잘조잘조잘조잘거렸다. 


졌다는 사실보다 경기 끝나기 몇 분 전까지 아무도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실수 아닐까 심은 수마저 사실은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라는 것 때문에 엄청나게 충격 받았다. 그러니까, 알파고에게 처음과 끝은 정해져 있었다. 시작한다-이긴다. 그리고 그 중간 과정 동안 인간 기사는 아주 열심히,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즐겁거나 치열하게 바둑을 두었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고 결과에 이르는 마지막 과정은 이세돌이라는 영웅도, 주변의 반半영웅들도 짐작하지 못한 거였다. 


나는 무어가 그리 충격일까, 무어가 그리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고 입을 다물게 했는가, 생각해 보았다. 


인간답게 사유하는 법만 아는 나에게는 그게 ‘인공지능이 이겼다’라는 객관적 사실로 인지되는 데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비유로 통한다. 그들의 대결과 결과는 꼭 신화를 읽던 느낌과 비슷했다. 신화와 상징은 내게 영감을 주거나 영성을 좋은 방향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꼭 신과 인간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았다. 내 눈 앞에서 그리스 신화 속 신, 운명, 영웅의 구도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인간 영웅이 이기기를 바라며 가슴 졸이며 읽었지만 그건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신은 인간에게 과제를 내고 성장하게 한다고 하지만 과제 자체가 부당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신’ 또는 ‘운명’이라는 굴레와 틀 안에서 인간 스스로 만든 과제가 아닌 강제로 주어진 과제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시작부터 정해져 있는데 ‘운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운명의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신이 또 개입하기도 한다. 영화 「타이탄의 분노」도 그렇고 「신들의 전쟁」도 그렇고, 신들이 떠나거나 인간이 신을 도와주어야 하는 설정이 나온다. 고전적 신은 떠나는 마당에 기계가 그런 상징적 장면을 연출할 줄이야. 신과의 차이라면 신은 감정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인간에게 설득되거나 감화 받거나 때로는 더 분노하며, 그에 따라 인간 영웅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기계도 그러한가? 


바둑 대결에서 인간이 기계의 계산에 말려들고 손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건 마치, 아주 재능 있고 노력도 하는 신화 속 영웅이 한 순간 운명에 말려들어 순식간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눈 앞에서 그걸 고스란히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의 초월성, 우월성이 그러하듯이 기계의 초월성, 우월함이 인간을 무기력해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쓸모없어질까 봐 겁이 났다. 그러고 나자 이세돌이 교감할 수 없는 대상과 대결하는 것도 싫었다. 눈을 바라볼 수 없고 통하는 느낌이 없는 상대와 몇 시간을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대국 날. 


이세돌은 열심히 했다. TV 해설자는 이세돌이 불리한 상황이지만 처절하게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이세돌은 알파고의 수를 조금씩 파악하려 계속 애썼고 상대에게 불리한 형태를 만들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졌다. 판을 향해 마지막 손을 내딛을 때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손은 떨리는 듯했다.


그런데 묘하게.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두 번째 대국까지 나는 이세돌이 그만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운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인간의 삶의 비유 같았고 운명의 여신들이 변덕스럽게 운명의 실을 조종할 때마다 무기력하게 흔들려야 하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했지만 또 지고 만 세 번째 대국. 그러나 끝까지 치고받고 또 치고받는 모습을 보며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지고 무언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지만 그 매번은 의미가 있으며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또 매번 무언가를 배운다. 그리고 매번 그것을 시도하고 시험해 보려 애쓴다. 꼭 시지프스처럼. 삶은 동일한 하루를 얼마나 많이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는가. 바위를 올려놨다 떨어뜨렸다 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은 형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형벌을 인지하고 괴로움까지 받아들이며 성실히 행하고 심지어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은, 형벌을 넘어서는 묘한 승리다. 신을 뒤엎는 전복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인간은 묘하게 승리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은 인간의 그런 묘한 승리를 보여 주었다. 결과는 1:4이지만 인간의 감정과 도전과 패배는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승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했다. 


그는 계속 도전할 것이다. 사람은 계속 도전할 것이고 상대가 어떤지를 배울 것이고 그것을 실전에서 다시 써 보려 할 것이고 또 진다고 해도 여전히 계속 성장한다. 기술이 성장할 수도 있고 그의 됨됨이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며 변해갈 수도 있다. 

이것을 깨닫자 패배감은 사라지고 경이로움이 남았다. 두려움은 옅어지고 자유로워졌다.  


16세기 중반, 티치아노가 그린 시지프스다. 사전에는 시시푸스라고 나온다. 프라도미술관 소장, 나는 위키백과에서 가져왔다.


무기력한 시지프스에서 창조적 시지프스로

사람들은 인류 대 기계라고 했다. 인간의 패배 또는 인간의 승리라고 했다.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류 대 기계의 대결이고 거기에서 인간이 패배해서 싫다면, 실은 그 대결에서 이길 방법은 하나다. 이세돌이 대결에 나서주지 않는 것. 그래서 알파고가 얼마나 유능한지 시험할 기회를 주지 않고 보완할 점이 무엇인지 알게 할 기회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호기심 때문에 도전을 받아들이고 자신감 때문에, 때로는 오만함으로 도전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이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졌다. 또 졌다. 그럼에도 바둑기사는 시간을 아껴가며 판을 계산하고 바둑알을 두고 또 두었다. 극도로 긴장된 모습도 보여주었다. 질 것이 예상된 상황에서도 다시 한 번 수를 두고 새로운 판으로 이끌려고 했다. 그건 승리다. 무기력한 시지프스가 아닌 창조적인 시지프스이다. 


이기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기니까 좋긴 좋았다. 다들 나서서 인류의 승리라고 표현하는 건 좀 그랬다. 이세돌이라는 인간 드라마를 보는 것은 정말 가슴 뛰고 동기 부여가 되는 스토리였지만 그걸 인류의 승리라고 하는 순간 인류가 너무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기계도 인간의 산물이건만 그 산물과 대결 구도를 이끌어가는 건 신문과 매체를 장식하는 대세 논조로는 부족해 보인다. 세련되지도, 건설적이지도 않다. 더욱 식상함이 든 이유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에서 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고 비슷한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되었든, 기계가 지금보다 더 효율적이고 유능해질 것이라는 건 사실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 생각보다 큰 생각할 거리라는 점도 사실이다. 누구나 그것을 감지했기에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두려워했다. 그 경계점에서 이세돌의 승리를 부여잡고 인류가 승리했다고 하는 건, 눈앞의 거대한 파도를 안 보이는 척하고서는 잔치 벌이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 가장 우월한 세상을 그리워하고 그 자리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변화의 가능성에서는 외면하는 것 같아 왠지 서글프기도 했다. 인간이 가장 우월해도 된다. 다만 지금보다 현명하다면 더 좋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거대한 파도를 자유롭게 타는 법이지 파도를 막는 법은 아닐 거다.


이세돌의 국적을 강조하는 건 더 좀 그랬다. 이세돌 드라마는 소중했다. 그가 꼭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긴장, 불안, 초조, 패배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도전,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집념과 집중력, 패배를 앞두고도 또 수를 놓는 손짓,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와 탄탄한 감정은 가슴 벅차는 이야기였다. 내게 그의 드라마는 2009년 이래 최고의 뉴스였던 것 같다. 희망, 창조, 인간다움, 혁신을 생각하게 한 강력한 드라마였다. 그의 인간 드라마에 가슴이 뛴다. 그리고 다섯 번의 대국이 끝난 뒤 그가 한 말은 정말 멋있었다. 



다만, 이번 대국을 통해 "바둑에 대한 이해보다는 인간의 창의력이라든지 바둑 격언에(기존 바둑 관념에) 의문이 들었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알파고 수법들을 보며 '과연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다 맞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앞으로 조금 더 연구해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http://www.nocutnews.co.kr/news/4562818#csidx116b25b50eb86beb7a67181773ea4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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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아닌 시작이다. 그것도 지금껏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에 뛰어드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는 성장할 것이며 그 덕분에 우리도 성장할 것이다. 



4 내게 다가온 인공지능의 사회

사실 답은 이세돌의 저 말에 담겨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두고도 또 방황을 했다. 


작년부터 로봇 기사가 올 때면 주의 깊게 들었다. 과연 나는 로봇 시대에서 무얼 하고 살까. 내 일은, 내 능력은 로봇 시대에도 유용한가, 내게 밥 먹고 품위 있게 살 돈을 가져다줄 것인가. 나는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실업자 상태여서 더 그렇다. 길게 보고 방향을 정할 수 있는 때이고 변신하기에 좋은 때이니까. 어느 정도 생각해 왔음에도 이번에는 큰 후폭풍이 몰려왔다. 


나는 내가 하는 일로, 내가 만드는 콘텐츠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세상의 막히거나 단절된 부분을 이야기로 잇고 흐르게 하고 싶다. 이게 나의 가장 큰 서원誓願이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록과 편집으로 다듬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가치 있는 콘텐츠물을 남기고 그 콘텐츠로 인류의 정신 흐름에 참여하고 싶다. 아마 더 좋은 것, 인간의 매력에 반하는 불완전함을 현명함으로 이끌어 내는 데에 일조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이음과 흐름이라는 역할도, 기록과 편집이라는 업무도 모두 미래를 상정하는 일이다. 여기에 반해서, 알파고의 능력이 나타나자 인류의 먼 미래가 갑자기 앞으로 닥친 기분이었다.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가 속속들이 나타나 생활 속에서 쓰이고, 더 나아가 기존의 사고와 사건,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뽑아낸 알고리즘을 장착한 기계가 대부분의 경우에서 인간보다 결정하는 게 나아지는 시점이 온다면 어떨까? 인간은 아무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고 노동이나 갈등 때문에 피로해질 이유가 없다면, 그래서 사회를 더 낫게 개선할 이유도, 개인이 마음을 수양할 이유도 없다면, 내가 하는 일은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이런 생각이 들자 무척 심난해졌다. 그 사이 나는 인공지능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다. 세미나 전에 토론의 좌장은 인공지능 때문에 생긴 불안감을 없애준다고 했지만 어쩐다, 듣고 나서 나는 더 심난해졌다. 콘텐츠를 창작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여서 직장에 속할 때보다 더 에너지를 내고 더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할 때인데 갑자기 나의 노력이 가까운 시일 내에 쓸모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힘이 나지 않았다. 한 옛 학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고 했지만 내 그릇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 사과나무 심을 생각이 안 들었다.    



5  사람에 대한 과잉 평가와 신뢰 

내 고민을 풀 실마리는 하나 발견했다. 인공지능 세미나를 들으려고 접수하는데 질문을 쓰라는 칸이 있었다. ‘질문 없는데’ 하다가 문득 질문이 생겼다. 인공지능이 소설 문장을 쓸 수 있는가, 그러니까 사람 심리를 파악할 뿐 아니라 그걸 미묘한 단어로 표현하는 일까지도 가능한지 궁금했다. 요는, 인공지능이 인간 감정과 교감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질문을 쓰다 나는 내 질문의 답을 알 것 같았다. 그건 인공지능의 미래를 예측한 답은 아니었다. 자꾸 나는 인공지능이라는 바깥 현상만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문득 사람이라는 내부로 향했다. 문제는 내가 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인데 나는 자꾸 외부 현상만 놓고 그것이 어떻게 할까만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계의 교감 능력을 물었지만 사람은 과연 다 그렇게 타인과,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가, 하는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니다. 사람이라고 다 심오한 것도 아니다. 단순한 게 좋은 거라고 하지만 그냥 정말 단순하기만 한 사람도 있다. 복잡하지 못하고 미묘하지 못하고 복잡한 걸 감당하기도 싫어서 그냥 단순하기만 한 사람도 있다. 그가 능력이 무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그냥 그런 거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사람에게 생각하고 미묘한 느낌을 아는 능력이 특출 난 듯 말하지만 모두가 그 능력을 인지하고 살지도 않으며 그 능력이 왜 특별한지 모르는 이들도 있다. 왜 교감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이 별로 없는 거다. 


또는 스스로에게 무심하여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겉으로는 “그럼요, 그게 제 생각이에요.”라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경우도 있다. 너무 바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정과 정보가 너무 많으면, 사람은 자기가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별 관심이 없다. 진짜 말초적이고 큰 감정에만 신경 곤두세워도 버겁다. 그럴 때는 “네, 나도 원해요.”라고 해도 정말 원하는지 스스로 물으면 혼란스러워진다. 옆 사람이나 TV 속 인물의 말이 내 것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내 것과 합치거나 그 의견을 참고로 내 의견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내 의견인 줄 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경우도, 그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지능이 약해서가 아니다. 너무 바쁘면, 돌아볼 여유가 없고 습관이 안 되어 있으면 그리 된다. 무서운 것은 그런 체계에 빠져들면 정말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안다. 그런 순간에도 인간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인간답게' 살고 있다. 개별적으로 들여다보면 매우 활기차고 복잡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건 기계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전체주의나 획일적 유행에의 무비판적 동조. 순간, 사람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이 도래하는 시기, 사람은 과연 어찌 변할까. 


인간다움이 무언지 나도 정의하지 못한다. 이보다 더 근본적 질문, 과연 인간다운 게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때도 있다. 징글맞도록 자기계발인지 자기 고갈인지에 지쳐 방향을 잃었을 때다. 자존감이 아주 낮은 채로 세상이 나서니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해 ‘해야 될 것’들로 가득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너무 피로했고 그러다 보니 날카롭고 차가웠다. 사람다운 게 뭔지도 비웃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사람다움이라는 인류 정서를 비웃었던 것 같다. 그 답을 찾은 건 재미있게도 미드를 볼 때였다. 「수퍼내추럴」. B급 드라마라고 생각했지만 그 드라마는 천사, 악마, 퇴마사, 악마와 천사에 조종되는 사람들을 내세우며 묘하게 인간다움이 무언지 느끼게 한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퇴마사 형제를 돕는 마녀가 나온다. 퇴마사 형인 딘이 마녀에게 묻는다. 자기들을 왜 돕느냐고. 천사도 아닌 마녀, 악마 쪽 존재가 퇴마사를 돕는 건 악마의 본성이 아니니. 마녀는 말한다. “다른 악마들은 지옥에 갔다 오면 자기가 인간이었을 때를 잊어. 나는 아니야.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인간이었을 때를 기억해.” 문구는 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뜻은 이렇다. 


인간다움이 무언지 나는 정의하지 못한다. 정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무언가,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그게 보편적으로 좋고 매력적이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이 드라마에서 인간은 꽤 매력적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천사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물들어 가고 악마의 왕마저도 인간을 닮아간다.  


「수퍼내추럴」에서 퇴마사인 샘과 딘 윈체스터 형제. 시즌 11까지 나왔는데 사람들이 이제는 의리로 본다고 말하는 프로. 이미지는 http://www.cwtv.co에서.


다시 인공지능 세미나. 패널들은 말했다. 인공지능이 더 활발히 쓰이는 세상이 온다면 창의성도, 부의 개념도 새로 정립해야 할 것이라고. 실은 그 전에 그 논의를 시작하고 잡아가야 한다고.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영역을 실은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하며 인간의 특별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너무 당연하여 귀히 여기지 않거나 때로는 무시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정신의 힘, 마음의 신비라는 능력을 내세워 기계와 대립하자거나 기계보다 우위라며 인간의 자리를 확고히 하자는 게 아니다. 그건 인간-기계 공존 시대의 입구에서 “인류는 위대해. 인류가 이길 거야, 인공지능을.”이라고 중얼거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면 인공지능이 이길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인간을 닮은 것에 당황하다 상대가 무언지도 잊고 만다. 사람이기에, 사람답게 생각하는 법밖에 우리는 모르기에 상대에 사람의 감정을 상대에게 부여하고 그 감정대로 행동해 버린다. 그것이 배려나 즐거움이 될 수도 있지만 두려움이 과하거나 자꾸 보답을 바라면 폭력이 될 수 있고 의도하지 않아도 상호간의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인간의 고유함이 왜 귀한지 진심으로 인식하지도 않으면서 인간 감성이 기계를 이긴다는 대결 구조를 믿고 우월함만 내세우다가는, 기계가 확률과 알고리즘으로 인간의 감성 비슷한 것을 실행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당혹하고 말 거다. 이세돌뿐 아니라 우리도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탐구할 시간이 왔다. 기계라는 사물이지만 인간과 너무 닮은 것, 기존에 우리가 알아왔던 생명체가 아니나 움직이고 말하는 것과 공존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지.  


철학이 필요한 시기다.  


인공지능 세미나 다음 날, 지방에 사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작년에 아기 아빠가 된 친구다. 그 친구한테 면접 본 얘기며, 인공지능 얘기며 하였다. 친구는 자기 직업도 인공지능 기계가 대체할 직업 중 10위 안에 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럼에도 사람 사는 세상은 사람살이 특성 때문에 그렇게 빨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둥 이야기를 했다. 


이 애기 아빠의 얘기를 듣는데 좋았다. 고민을 해결해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대화가 좋았다. 그 통화가 선물 같아서 나는 친구에게 고맙다고 했다. 친구가 내 고민에 선선히 응해 주는 것도 좋았고 아기 아빠가 된 뒤 또 달라진 듯한, 친구가 더 원숙해진 듯한 느낌도 멋있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고 지금의 조용한 활력이 좋아서 자꾸만 다른 사회관계를 소홀히 한다. 그러나 사람은 기댈 수밖에 없다는, 그 친구가 한 말을 들으며 나는 기계타령하며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교감. 접촉.  


철학이 필요하고 또 교감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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