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한 오필리어 in 첫사랑, 늙은 오필리어 in 실업 상태
[설명1]
시옷ㅅ은 남자다. 내가 몇 년 전 처음 본 남자다. 미처 친해지지도 못했을 때, 내가 와락 성질내는 바람에 더 친해지지 못했다. 나는 취직하면 취직 핑계 삼아 연락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취직이란 것을… 일단 2016년 5월 15일까지는 못했다. 핑계가 없어서 나는 그 남자에게 연락을 못한다. 그냥 하면 된다고 하시겠지. 나도 실업자 초장기엔 그렇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실업이, 장기 불황이, 저성장 사회가 개인에게, 개인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서글픈 영향이다. 어쨌든 시옷은 그 사람 이름의 첫 자음이다.
이 책을 처음 본 건 2007년이던가… 그리고 시옷을 알던 봄에 이 그림책을 다시 읽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사랑이라 말하기엔 너무 헛된 사랑, 또는 너무 절실한 감정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게 사랑이었다면 그 사랑은 꼭 햄릿 같고 로미오 같았다. 정말 편하지 않은데다 절박하게 뜨거워 쉽게 식지도 않았다.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속내까지 거침없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찌끄러기가 여전할 때, 난 시옷을 보았다. 시옷의 눈을 보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TV에 방영되는 「코스모스」를 보던 중이어서 더 그랬다. 책과 TV가, 그것도 로맨스 장르도 아닌 과학에 가까운 장르가 연심戀心에 영향을 준다는 게 일부러 의미부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맞다. 그때는 그랬다. 난 이 책과 TV 시리즈를 온 마음과 몸으로 보고 받아들였으니까. 책은 마지막을 향해갈수록 내 세계가 확장되는 것 같아 벅찼고, TV 시리즈는 매회 2-3번씩 반복해서 보면서도 매번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내가 짐작조차 못할 우주다. 짐작으로조차 다 닿지 못할 시간이다. 그 속에서 내가 시옷이라는 사람의 두 눈동자를 몇 초 동안 오롯이 바라보고 있던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분명 그 시기에 시옷 말고도 다른 이들을 보았다. 그러나 시옷을 보던 느낌은 사소해질 줄을 몰랐다. 우주 안에 마주보는 두 쌍의 눈동자만 있는 것처럼 시옷의 눈을 보던 기억은 상징처럼 남았다.
그 봄, 나는 직장에서 해방되어 맞는 첫 봄을 마음껏 누렸다. 하루하루는 꿀처럼 달콤했고 나는 매일 설렜다. 봄 아가씨, 봄바람에 온통 바람 들어버린 봄 아가씨. 사람에게 처음 빠지는 아가씨, 금세라도 망가질 듯 위태롭고 눈부시게 투명한 아가씨처럼 봄바람이 단단히 들었다. 그 봄은 너무 설렜고 달콤했다.
그때 보던 게 이 책이다. 그때 내가 이 책 속의 오필리어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건 시옷과 바라보던 그 순간 때문이다.
그리고 이 봄, 이 그림책을 또 보았다. 이 책과 나의 교류는, 어떤 면에서는 더 깊어졌고 어떤 면에서는 어둑하니 더 고통스러워졌다. 그 시절 나는 시옷과 제대로 친해지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시옷이든 이응이든을 떠나 사랑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실업자라는 이 따위 상황이란 보이지 않는 쇠사슬처럼 내 마음의 자유를 갉아먹으려 든다. 나이 든 오필리어는 절망한다. 내가 마음을 열고 사랑을 하려면 직장인이 되든가, 실업가가 돼야 한다.
[설명 2]
그림책 『햄릿』은 이런 책이다.
그림책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그 『햄릿』이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는 오필리어가 중요하다.
그림책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햄릿이 연극을 무대에 올린 상황을 중심으로, 햄릿과 오필리어의 사랑이 엇갈리고 두 남녀가 젊음의 총기를 잃어가는 과정까지 나온다. 원작의 기승전에 해당한다.
이 그림책 전체가 하나의 연극과 같다. 틀 안에 각 장면과 인물들의 대사가 나온다. 틀 밖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지문이 나온다. 틀 속의 배경은 디테일하지 않다. 그러나 각 장면을 충분히 설명할 정도의 연극 무대 구성을 갖췄다. 필요한 인물과 사건만 과감하게 강조했다.
그림책 『햄릿』에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은 어릿광대와 곰 인형인데, 이 둘은 햄릿의 친구이기도 하고 연극 무대 위의 배우이기도 하다. 완역본에서 보면 호레이쇼와 가장 가까워 보인다. 선왕의 유령을 발견하고 모든 진실을 공유하며 햄릿 왕자를 있는 그대로 두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호레이쇼이기 때문이다.
그림책 『햄릿』에 나오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기승전을 이끌어가는 주요 장면, 또 오필리어의 감정과 관련하여 꼭 필요한 말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삶이냐, 죽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나오지 않는다.
그림책에 나오는 말을 완역본에서 찾으려 했지만 다 찾지는 못했다.(완역본 참고도서: 김재남 역 『햄릿』, 한국도서출판중앙회, 오래 전 발행)
[오필리어와 사랑의 말]
이 책은 햄릿의 책이지만, 여자인 내가 본다면 이 책은 오필리어의 책이다.
첫 장의 주인공도 오필리어다. 오필리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첫 장에서 어릿광대와 곰의 관심의 대상도, 다리만 보이는 햄릿 왕자가 편지를 쓰는 대상도, 오필리어다.
처음으로 사람 형태를 온전히 드러낸 것도 오필리어가 먼저다.
오필리어는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말은 섬세하고 강렬하다.
“
하늘에도 땅에도 봄이 왔구나.
모든 것이 다 새로워.
나도 완전히 달라졌어.
이제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다시 알아보지도 못할 거야.
”
아버지인 재상은 오필리어를 걱정한다. 아주 많이. 젊은 남자의 말을 믿지 말란다.
“
감정이 살기 위해선 양분이 필요하단다.
그에게 양분을 주지 마라!
”
잔인한 말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애써 양분을 주지 않으면 감정은 말라비틀어진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 감정이 너무 소중하고 강렬하여 내 말은 말도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내가 비정해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난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이런 말이 싫었다. 마음을 놓고 미련을 버리라는 건 정말 너무 야속한 말이라고.
그런데 그게 가능한 것을 보았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해 버렸다. 애써 눈에 보이는 사람을 외면했다. 다가오려는 것을 아예 차단해 버렸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아버렸다. 그러자 나는 애써 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차근차근 집어주었다. 내가 왜 그 사람에게 더 미련을 갖지 않으려 했는지 이유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렇게 하는 거다. 내가 만들고 살린 감정에 양분을 더는 주지 않고 말려댄다는 건. 내 나름의 이유야 있지만 이건 권할 짓은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 나는 많은 착각을 한다. 그런 착각을 끊어버린다는 면에서 이 냉정한 사고 과정이 현명한 구석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내 심정을 묻는다면… 난 서글프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더 이어질 수도, 우습게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말려버리는 건… 서글프다.
내 경우는 스스로 해댄 짓이며 나의 경험치에 따랐으니 설득력이라도 있지, 오필리어의 아버지는 딸에게 자신의 젊은 날의 경험을 강요했다. 사랑에 부푼 딸에게 안 했으면 좋았을 말이다.
*
그 무렵 햄릿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햄릿 왕자는 왕과 왕비의 침대 밑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는다. 왕인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왕비는 아버지의 동생과 결혼한 상태. 햄릿은 아버지가 떠난 것이 슬프다. 게다가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 같아 납득할 수가 없다. 괴로운 햄릿에게 어릿광대와 곰이 나타난 것은 이때이다. 햄릿은 어릿광대와 곰의 말을 듣고 아버지 유령을 만나 사건의 전말을 듣는다.
햄릿은 연극을 쓴다. 모든 것을 밝히고 모두를 파멸시킬 연극 <덫>.
*
오필리어는 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햄릿 왕자를 그리워한다.
오필리어는 말한다.
“
나의 왕자님, 당신은 아시나요?
당신은 나를 바꾸어 놓았어요. 봄이 일곱 번 거듭된다 해도
이토록 나를 달라지게 할 순 없을 거예요.
당신은 나를 새롭게 만들었어요.
”
이 사랑은 급진적이다. 부딪쳐서 실망하고 그런 다음 헤어지거나 또는 그것까지 받아들이며 사랑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각자의 감정에 도취하고 소비하는 면이 더 커 보이는 사랑이다. 지금 시대로 치면 연애의 초반부에 불과할 텐데 옛 시절에는 이것을 사랑의 대부분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랬다. 첫 눈에 반하고 사랑을 상상한다. 실망조차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 모든 것을 불태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언어와 감정은 어느 시대건 절박하기에 이 또한 과장이나 비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마법이다.
하지만 사랑은, 오필리어를 불안하게 한다. 햄릿이 만든 연극이 끝나고 오필리어의 아버지가 햄릿의 손에 죽고, 곱고 여린 오필리어는 정신이 나가버렸다. 완역본에는 미친 오필리어가 순결을 잃은 처녀에 대한 노래를 한다. 그 장면을 읽다 생각했다. 오필리어의 사랑은 너무 깊고 강렬하여 자신의 온 순결을 잃었구나! 흔히들 말하는 육체적 관계를 맺어 순결을 잃었다 함이 아니다.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강렬한 사랑의 기운과 비극적 사건으로 고요하던 삶의 순결은 깨졌다.
햄릿이 변해가는 모습과 아버지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이 한 순간에 아버지의 원수가 되어 사랑의 종말이 정해졌을 때. 사랑의 마법이 깨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오필리어는 현실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세계로 넘어가고 만다. 오필리어는 이성을 잃었다. 한 사건의 실체보다 그로 인한 감정-상실과 연민, 고통-이 안개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아직 사랑을 기억한다. 오필리어는 햄릿을 조이던 쇠사슬을 풀어준다.
“
쇠사슬이 목을 이토록 조이고 있다니.
이리 와, 새야, 널 날게 해 줄게.
집으로 날아가렴.
”
그러나 햄릿은… 풀려날 줄 모른다. 햄릿은 물리적 쇠사슬이 아닌 보이지도 않는 쇠사슬에 묶여있다.
그림책이 끝나도록 햄릿은 날지 못한다.
어쩌면 이 책은 제목을 ‘햄릿’이 아니라 햄릿이 만든 연극의 제목인 ‘덫’이라고 해도 맞을 것 같다. 햄릿 왕자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너무 빠른 변심에 괴로워한다. 고뇌는 덫처럼 햄릿을 옭아맨다. 햄릿은 다시 연극이란 덫을 놓아 새로 왕이 된 자를 옥죈다. 그럼에도 햄릿은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오히려 남이 놓고 자신이 놓은 덫에 휘말린다. 얽히고설킨 생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햄릿. 사랑에 취한 오필리어에게는 사랑이 덫이 된다.
그뿐이랴. 완역본에 보면 햄릿에게 결투를 청한 레어티스, 오필리어의 오빠는 햄릿의 칼에 맞아 쓰러지며 말한다. “왜가리 모양으로 내 덫에 걸렸어! 바로 내 술책에 죽게 됐어.” 이 문장은 이 책 속 주요인물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모두, 스스로 덫을 만든다. 남이 만든 덫에 걸려들고 자신이 만든 덫에도 걸려들고 그 덫이 엉켜 만들어낸 또 다른 그물뭉텅이에 걸려들고 만다. 나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 한 명은 이 덫 놓기를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그들만큼의 덫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모두가 걸려든다.
그림책은 원작의 결말까지 보여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얽어맨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햄릿의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고뇌, 삶의 무게를 형상화한 장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마지막 장면에서 문득 내 현실의 비유를 보았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몇 해 전과 지금, 내가 이 책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그때 이 책은 사랑의 설렘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은 햄릿과 오필리어의 감옥,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과 삶의 무게에 더 생각이 실린다. 실업의 무게가 서글픈 내게는 이런 것도 현실의 비유로 보이나 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거 내 이력으로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데이트 비용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란 감정에 마음껏 물을 줄 수가 없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다. 실업자 시절 동안 경험한 거다. 상대와 맞지 않아서 더 만나지 않은 것이지만 누구를 만나든 나는 데이트 하는 내내 ‘내가 직장을 다닌다면.’ ‘내가 직장인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불완전하게 느껴지는 거다.
이렇게 해서 햄릿과 오필리어의 이야기는 다시 실업의 쇠사슬을 아는 시옷과 내 것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햄릿과 오필리어처럼 비극적인 건 아니다. 이야기만 읽어도 냉기가 느껴지는 성에 살지도 않고 손대면 불타 버릴 것 같은 연애편지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나는 시옷을 열렬히 원하는 것은 아니며 시옷도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난 시옷이 이 글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시옷에게 절절히 공감해 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그 시절 시옷에게 승질 부린 게 미안하다.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의무처럼 돼 버렸고, 몇 주 전엔가는 꿈에 시옷이 나와 버렸다. 그래서 난 종종 생각나는 시옷과 시옷하면 생각나는 이 책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은 내 생각과 내 감정을 쓴 것이지만 이 중 일부는 시옷한테 하는 말이다.
이게 … 웃기다. 적어도 나는 시옷을 만나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면서 친구가 되고 싶은 것도 맞다. 그런데 그걸 못한다. 우린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 난 시옷에게 연락하지 못한다. 나 혼자로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친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나를 내밀기가 참 주저된다. 그게 서럽다.
취준생의 현실을 감싸준 상대가 있다지만 문제는 상대가 아니다. 나다. 나는 내 정체 없음이 서럽다. 실업 기간에 하고 싶던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했고 프리랜서로 일이 잘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늘 과도기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나보다 먼저 실업자의 무게를 경험했을 시옷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동지애인지, 이 힘든 시기에 또 다른 나이 든 실업자에 대한 전우애인지, 연심戀心보다 시옷이 원하는 직장 다니면서 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더 크다.
난 오필리어가 아니고 시옷은 햄릿이 아니다. 삶의 무게는 무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쥐덫처럼 옥죄이지 않을 거고 발버둥 치다 삶의 그물에 꽁꽁 묶이지도 않을 거다. 어느새 연심은 사라지고 투쟁심만 남았다.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굴복하냐 넘어서냐가 남았다. 남을 이겨먹는 데는 별 관심 없으나 세상 무게에 질 생각은 없다. 하여, 난 애쓸 거고 내 일을 할 거고 만날 사람을 만날 거다.
가슴 설렌 심정을 담으려 시작한 이야기를 이렇게 끝낼 줄은 몰랐다. 일관되게 로맨틱한 정서를 끌어내려다 그만둔다. 이대로 두련다. 2016년 5월 16일 오전의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