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일본 회사에서 일하며 경험 부족, 역량 부족인 HR 사원으로서 느끼는 점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원 고민 들어주기가 참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인사담당자면 커리어에 대해 좀 더 잘 알 거 같고, 답을 제시해줄 것 같고, 뭐 그런 기대감이 있는 걸까.
비단 커리어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페이롤 담당자로 있을 땐 사내 직원들에게서 많은 문의들을 받았다.
'아니 그 설명문대로 그대로 쓰라는 곳에 쓰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아주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이건 HR이 아니라 세무서에 직접 문의하셔야 할 개인적인 내용이겠는데요...' 등 내가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까지.
어떻게 하면 좋은 경청자, 좋은 조언자가 될 수 있을까? 늘 고민해보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같은 부서 내의 매니저나 디렉터를 보면 어떤 고민을 얘기하더라도 척척 대답해준다.
이게 바로 경험에서 나오는 연륜인가 싶으면서도 많이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 내가 몇 년 전, 친한 후배 N에게서 이직 상담을 받았다.
(지금도 이런 기분이니 몇 년 전 나는 그냥 갓 태어난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나랑 나이는 동갑이지만 대학을 중도 편입해서 조금 늦게 신입사원이 된 N이었다.
N으로 말할 것 같으면, 책과 영화를 늘 가까이 두고 지내며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였다.
그리고 주말에는 카페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N이 회사에서 배치된 부서는 생산관리부서로, 그 부서는 매일 영업에서 들어오는 발주량을 확인하여 한 달치 공장 생산량 계획을 스스로 짜고, 제조 라인에 계획을 전달해, 공장장 및 공장 라인 직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생산량 달성을 목표로 열심히 뛰는 곳이었다.
처음 N이 해당 부서 배치가 되었을 때, 내정자 때부터 봐왔던 나는 '감수성 풍부하고 섬세한 N이 그곳에 어울릴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N과 나는 회사에서 마주칠 일이 잘 없었지만, 매일 아침 출근길 10~20분 정도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
이때가 N과 나의 하루 중 유일한 대화 시간이었다.
추천할만한 책이나 영화 얘기를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가끔 내가 부서나 일은 적응할만하냐고 물으면 '괜찮다'며 사람 좋은 웃음으로 웃고 넘기던 N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N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사실 아무한테도 말 한 적 없는데, 오와라이(お笑い, 개그) 좋아해요. 비밀로 해주세요."
이어서 한 말은, 하루의 낙이 유튜브에서 오와라이 동영상을 보거나 네타를 짜는 것*.
(*네타를 짜는 것: 일본 오와라이는 보통 2인 1조로 서로 주고받는 만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게 많은데, 그 각본을 쓰는 걸 말한다)
언젠간 그 네타가 쓰일 길이 있을거라 생각한다며.
공장장, 생산직 직원들한테 하루 종일 혼나더라도 집에 가서 오와라이 동영상을 보면 다 잊어버린다는 거다.
그리고 회사의 문화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했다.
처음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N이 본인의 취향과 너무 맞지 않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감히, 방송 계통의 일을 찾아보길 권했다. 그리고 그의 이직과 꿈을 응원했다.
그는 잘 모르겠다며 말을 얼버무렸지만,
그 뒤로 매일 아침 우리의 주제는 '어떤 일을 하고 살 것인가'였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 이 곳에서 이직 준비를 한다는 건 쉽지 않았고, 안정적인 회사를 떠나는 것도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의 대화에는 꿈이 넘쳐흘렀다.
N은, AI나 기술이 더 발달하는 미래일수록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이 더 중요해질 거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는 정말 중요한 업계이며 동경한다는 말을 했다.
그런 얘기를 할 때 N은 눈이 빛났다.
그 와중에, 나는 이직을 준비했다. 나의 경우에는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회사가 있었는데 그쪽 HR 구인이 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직을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N에게는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알렸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바로 행동에 옮기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는지, 자극을 받았으니 앞으로 마음먹고 준비를 해보겠다며 이직 준비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의 이직을 축하해주었다.
결국 나는 몇 개월 뒤 원하던 회사로 이직을 했고, N과는 연락이 자연스레 뜸해졌다.
1년 뒤 N에게서 라인이 왔다.
내가 회사를 떠난 뒤 본인도 매일 아침 나누던 대화를 떠올리며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불합격도 많았지만 결국 방송 제작회사에 합격했다는 것.
내 일처럼 기뻤고 N이 정말로 이직에 성공해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뒤론 가볍게 퇴직 시 준비해야 할 점, 주의해야 할 점 등에 대해 실무적인 얘기를 하고 끝났다.
그리고 얼마 전, 여느 때처럼 좋아하는 티브이 방송을 보고 있는데,
마지막에 흘러가는 엔딩 자막에 N의 이름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오랜만에 N에게 연락을 하니, 그 방송은 본인이 제작에 참가하고 있는 방송이 맞으며, 도쿄 생활도, 방송국 생활도 너무도 행복하다 한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 다양한 장소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직업상 연예인을 정말 많이 만나는데, 좋은 향기를 내는 게 그들의 본업인 거처럼 다들 한결같이 좋은 향만 나는 게 신기하다며 농담도 던진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맞고 안 맞는 일이 있는데 당시를 생각하면 안 맞는 일을 꾸역꾸역 했던 것 같다고. 내가 이직을 권했던 게 N에게는 큰 전환점이었다 한다.
그렇게 말해주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내가 인사담당자로서, 혹은 커리어 전문가로서 N에게 어떤 명확한 조언을 준 건 아니지만, 그의 방송국 생활에 내 말이 한 몫 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N이 언젠간 틈틈이 써온 오와라이 네타를 쓸 때가 오겠지. 그때를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N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