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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kie Run Jul 09. 2019

대학원도, 회사도 갈 마음이 없어요.

네, 그렇군요. 아니요, 싫어요. 네니요.

20대로서의 마지막 해. 어느덧 퇴사한 지 2개월이 되어간다. (아니 왜 벌써..!)

그간 아무 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어느 하루는 헤드헌터로부터 지난 3년간 경력을 쌓아온 동종업계의 다른 외국계 회사(총 네 개의 회사 중 유일하게 안 가본, 이제 마지막 남은 곳이다 ㅎ)에 지원해볼 테냐고 연락이 왔다.

네니요. 네, 경력 쌓기 좋겠죠. 아니요, 지원 안 해요.  

이제 그만 그 업계의 늪에서 벗어날래요. ㅎ


주변에서는 대학원에 가거나 일을 구하라고 한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야 인간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몫을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주변에서는 대학원에 갈 준비를 하거나 다른 회사에 지원하라고 한다. 나 또한 한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력에 공백기가 생기는 걸 원치 않아 어디에든 속하려 조급해했던 나날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적어도 아무 데나 속하지는 말자. 세 번째 회사의 사람들을 보며 굳이 어딘가에 속해있어야만 가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치 있는 역할을 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의 목적이 아무리 이윤 창출이라고 해도 업무에 대한 프로페셔널리즘도, 윤리의식도, 사람에 대한 존중도 없는 모습들을 보며 그 조직은 어디에도 제대로 된 가치를 더하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비뚤어진 가치관으로 뭉치고 서로를 격려하며 미래를 그리는 모습이 보기에 안 좋았다. 그러한 사람들이 인정받는 조직에서 생존하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면 나도 결국 그들의 모습을 갖춰야 할 것만 같았고, 갖추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도 딱히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 조직의 사람들을 닮아가고 그 속에서 인정받게 된다는 건 업무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 회사에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조직에서 나옴으로써 현재 및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내 주변인들과 사회에 가치를 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해를 끼치는 일은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은 싫어요.

대학교 시절 심리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원에 갈 뜻은 없었지만 졸업하기 전 논문 하나는 써보겠다며 지도 교수님을 찾아 리서치 과목에 신청했고, 덕분에 대학원 생활의 일부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봤다.  


당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수많은 책과 논문을 읽고, 데이터를 정리/분석하고, 논문 제출 마감일이 1-2주 남았던 시점에서는 엄청난 양의 믹스커피를 마시며 논문을 쓰다 정신을 놓았다 겨우 다시 정신을 붙잡고 논문을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feat. Final, Final_v1, Final_v2,..., Final_v14, Final_FINAL)


성적은 잘 받았고, 지도 교수님이 이메일로 두 줄의 피드백을 남겨주셨다:
I am very impressed by your great research paper.
Bravo! You deserve the best grade for it, I think.


하지만 논문을 쓴 이후 내게 남은 건 논문 주제도, 내용도, 추가적인 궁금증도 아닌, 힘들었던 나날들의 기억..;; 덕분에 공부를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공부에 더더욱 미련을 안 남기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만약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학문이 있다거나 확실히 가고 싶은 방향을 가는 데 있어 대학원이 도움이 된다면 고려해볼 만하겠지만, 둘 다 아니다 보니 현재 대학원은 내키는 옵션이 아니다.


일하는 것도 딱히 내키지 않는데요?

지난 3년간 근무했던 업계는 이 정도면 충분히 경험했고, 여러모로 충분히 데였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이직이 잦은 업계라고는 하나 뜻하지 않게 짧은 기간 동안 이미 네 곳 중 세 곳을 경험했고, 그간의 경험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따라서 동종업계에 돌아갈 마음은 없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뭘 할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지난 3년간 일한 열매를 먹으며 누릴 테다 - 책, 술, 여행.

책 - 지난 3년간 읽고 싶다며 구매했지만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던 책들이 책장에 쌓여있다. 덕분에 무엇부터 읽을지 골라 읽는 재미를 맛보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사 관련 책을 읽었는데,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고, 발전 및 확장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회사들의 모습과 연결 지어보며 나름 흥미롭게 읽었다.


술 - 그간 일하며 힘들 때마다 퇴근길에 맥주나 소주를 사왔지만, 이미 피곤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더 피곤해진다는 이유로 냉장고에 넣어두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다. 이 술들을 마실 테다.


여행 - 그 외에는 제주도에 일주일 간 여행 다녀왔다. 어느 하루, 오전에는 햇빛이 쨍쨍한 맑은 하늘, 저녁에는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하늘, 그리고 바다가 있는 풍경이 보고싶어졌다. 때마침 제주→김포 9,900원짜리 티켓이 보여 지금이다! 하며 곧바로 티켓을 샀다. 여행을 떠난 주에 제주도에서 장마가 시작되어 대부분의 날이 흐렸고, 덕분에 내가 바라던 풍경은 보지 못했으나, 바닷소리를 맘껏 들으며 여유로운 여행을 즐기고 왔다.


온전한 '나'를 알아가는 시간

현재 회사에도, 학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를 주변인들에게 간편하게 소개하기 힘들다. 그런 만큼 이 시간은 온전한 '나'를 파악하고 주변인들에게 '나'를 소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참에 내가 알기를 미뤄뒀던 나를 차근차근 알아가보려 한다.



지금 이렇게 대학원에 갈 준비도, 회사에 들어갈 준비도 안 하며 (a.k.a. 돈 벌 고민을 안 하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당장 밥벌이를 안 해도 나 하나는 먹고 살만큼의 경제적 뒷받침이 돼서 그렇다. 물론 수입 없이 지출만 있으니 곧 정신 차리고 구직활동을 시작해야 할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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