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레벨 찾기(+글덕후와 문구점)

스물여섯 번째

by 쿠키

몰입

(沒빠질 몰, 入들 입)

1. 깊이 파고들거나 빠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호기심 레이더가 반짝이기 시작하면, 나는 호기심 모드로 돌입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지금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건지. 나노 단위로 쪼개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몰입해서 얻은 정보를 나만의 지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호기심 레이더가 꽤 민감한 나는 몰입상태를 즐긴다.

몰입은 무언가에 깊이 파고들거나 빠진 상태를 뜻하는 단어다. 한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몰입 상태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쉬고 있을 때보다 삶의 만족도가 더 높게 측정된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쉬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에 깊게 빠져들 때 더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몰입에는 조건이 있다. 너무 쉬우면 지루해지고, 너무 어려우면 불안해서 포기하게 된다. 적당히 도전적일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래서 게임 디자이너들은 무엇보다 레벨 디자인에 가장 큰 에너지를 쏟는다고 한다.


내가 주인공인 삶에서, 우리는 스스로 레벨을 잘 설계하여 몰입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몰입경험은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



몰입레벨 찾기

문제는, 나는 지금 그 레벨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표물만 생기면 몰입할 자신은 있는데, 정작 그 목표물을 찾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었던 기억은 분명히 있는데, 지금은 그 감각이 무엇이었을까 희미하다.

몰입레벨을 정하지 못했을 뿐, 하고 싶은 것은 많다. 동화작가, 경영전문대학원 진학, 창업까지. 한 달 사이에도 몇번씩 바뀌는 나의 관심사를 보며, 스스로도 어지러울 때가 있다. 옆에서 듣는 남편은 오죽할까.

직설적으로 말하는 남편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수십 번씩 바뀌는 나의 몰입 대상을 듣고, 남편은 꽤 날카로운 직설가가 되었다.

“쿠키야. 문구점 해보는 거 어때?”

-“무슨 갑자기 문구점이야, 오빠 좋아하는 거 해보려고 하는 거지? 내가 테스트베드야??”
“아~니. 어떤 사업을 해보고 싶은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데, 대학원부터 간다니까 그렇지. 대학원 가면, 생각보다 더 큰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보다 더 큰 바다?”

“응ㅋㅋㅋ 나 그 바다에서 간신히 나왔잖아. 내가 진짜 관심 있는 게 뭔지 모르고 대학원 가면, 가서도 똑같아. 어차피 뭔가를 찾아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니까. ”

-“그래도 문구점은 너무 뜬금없잖아!”

“왜 뜬금없어. 쿠키가 나한테 종종 이야기하던 거 있잖아, 그거 사업모델로 작게나마 실현해 보는 거지.”


‘속도 보단, 방향’이라는 말을 책에서 읽고 새기고, 글을 쓰며 또 새겨도, 어느새 다시 속도를 쫒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사람이 참 쉽게 안 바뀐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남편은 요즘 내 가속페달을 고장 내느라 바쁘다. 대학원이라는 막연한 목표를 내세워서 단기적으로 가속페달을 밟는 것 같은 모습에 남편은 문구점이라는 뜬금없고, 신선한 아이템을 제안했다. 속도 보단 방향이라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고 있다.


난 진짜 오타쿠잖아?

주말 오후, 거실 탁자에 마주 앉아 남편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나는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남편이 그림을 그리다 말고 불쑥 물었다.


“쿠키는 무슨 덕후야?”

-“뭔 소리야?”

“진짜 좋아하는 거. 그런 사람을 뭐뭐 덕후라고 부르기도 하잖아.”

-“아하. 나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럼 돼보고 싶은 덕후는 없어?”

-“나 요즘에 차덕후 해보고 싶어. 다도가 매력 있어 보이던데?”

“차? 그것도 재밌겠다. 근데, 내가 봤을 때 쿠키는 글 덕후야. 하루 종일 글자랑 있잖아.”

-“오?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나 요즘 시력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시간이 많으니까 이글저글 진짜 많이 봐. 오빤? 무슨 덕훈데?”

“나?? 나는 진짜 오타쿠잖아. 만화랑 애니메이션 좋아해.”


뉴욕여행 때, 시차적응이 안 된 남편은 히어로 아카데미를 보며 시차를 극복하곤 했다. 아직도 포켓몬스터를 좋아하고,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 나를 보면서 원피스 조로 같다며 키득거린다. 당시엔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삶의 장면도 남편의 말을 듣곤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하니, 최근에 애니메이션을 보고 감동받았던 남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글덕후라고 말하는 남편을 보니, 남편은 나에게서 글을 읽고 있는 장면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여행을 가면 현지 서점에 들르고, 카페에 앉으면 책을 펼치고, 자기 전에도 무언가를 읽는다. 남편 눈에는 내가 늘 글자와 함께 있는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내 모습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나

몰입의 대상을 찾지 못해 조급해하던 나에게, 남편은 문구점과 글덕후라는 말을 건넸다. 답을 건네기보단, 그냥 오래 지켜보면서 나는 보지 못했을 내 모습을 가볍게 전달해 주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눈이 빛나는지, 무엇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지. 그 장면들을 조용히 쌓아두었다가, 필요한 순간에 넌지시 던져주곤 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해 제삼자의 시선으로 쉽게 말하곤 한다. 주인공이 진짜 뭘 원했는지, 그 행동이 옳은 행동이었는지, 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제삼자가 되면, 숲을 보듯 전체를 보는 것이 쉬워진다. 반면, 그 주인공이 내가 되는 순간. 숲을 보기보다 나무를 보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리 숲을 보려고 해도, 나무밖에 봐지지 않을 때가 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라는 제3의 시선이 생긴다. 내가 스쳐 지나가듯 한 말, 무심코 반복한 행동, 순간의 내 표정까지. 그 사람 눈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시선을 통해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몰입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남편의 시선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장면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connecting the dots 란 말이 있다. 결국, 삶이란 수많은 점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찍고 있는 점들이 언젠간 하나의 몰입대상으로 응축되겠지라고 안도를 하며, 오늘은 몰입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잠시 해방되었다.




에필로그-

몰입의 대상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어렸을 땐, 쉽게 찾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예전 같진 않아요. 신중해진 걸까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걸까요?!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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