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번째
(餘남을 여 裕넉넉할 유)
1. 물질적·공간적·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2.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연말이 되면 다이어리 사는 루틴이 있을 정도로 계획과 기록을 좋아하는 나는, 주말 약속이 있을 때면 맛집과 카페를 미리 정해놓고, 별점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갑자기 훅- 떠나버리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MBTI의 J형은 흔히, 계획을 꼼꼼히 하는 사람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J형이란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 얼마나 유연하게 적응하는지를 알아보는 유형이기도 하다. 계획을 세우려고 하는 것 역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반면 P유형의 사람들은 물 흐르는 대로 변수에 따라 유연하게 적응한다. 계획이 틀어져도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으며, 어쩌면 계획이 없을 수도 있다.
유한한 시간을 알차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계획은 더 촘촘해진다. 회사를 다닐 때는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평일에 대한 보상심리로 주말에 뭐든 하고 싶어 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뭐 할지를 몰라 연애 초반에는 참 많이 싸웠다. 연애 때는 싸워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단순히 상황이 안 좋아서 싸웠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간 시간이 많았지만, 결혼하면서 깨달은 점은 우리가 싸운 이유는 누가 틀려서가 아니다. 그냥 서로 많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의 다툼빈도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연애 초기에 최대치를 찍었다가 연애 중반부터 결혼식까지는 0회에 가까웠다. 결혼 후부터는 점차 그 횟수가 늘어나다가 다시 소강상태에 이른다.
외출시간은 14:00
집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우리는 약속이 없을 때면, 주말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집에서 딱히 뭘 하는 것이 아니어도, 시간 맞춰 다가오는 끼니를 챙기다 보면, 주말이 훅 지나간다. 뭘 하지 않아서였을까? 주말 내내 집에 있는 날이면 남편의 월요병은 더 심해진다. 월요병을 극복하고자 남편은 토요일 아침에 나의 상태를 체크하는 일이 많아졌다.
“쿠키야, 오늘 컨디션 어때?”
-“나쁘지 않은데? 좋아!”
“그럼 카페 갈래?”
-“카페 가서 뭐 하게?ㅋㅋㅋ”
“그림도 그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
남편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조직에서는 내가 하는 만큼 성과로 돌아오지 않고, 어쩌면 시기와 질투만 커지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그런 공허한 마음을 도장 깨듯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 한다. 같은 회사를 다녔던 난, 남편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마음인지를 알 것 같아 웬만하면 남편의 마음을 채우는 데 함께한다.
나는 남편의 ‘생산적인’ 주말을 위해 바빠진다. 맛있는 커피, 음식점을 찾기에 바쁘고, 햇볕 좋을 때 산책하면서 남편의 비타민D까지 챙겨야 하는 나의 주말 코스는 빡빡하게 채워진다.
“오빠 오늘 날씨 너무 좋다, 주말에 카페 갔다가 근처에서 저녁 먹고 오는 거 어때?”
-“너무 좋아. 나 그럼 얼른 외출 준비해야겠다.”
“그럼 2시에 딱 나가기로 하는 거다?”
2시에 나가기로 한 나는, 지금부터의 목표인 2시 나가기에 집중한다. 1시 50분이 될 때까지 외출준비가 한참 남은 것 같은 남편을 보면 답답해진다.
“오빠, 우리 몇 시에 나가기로 했지?”
-“2시?”
“근데 왜 아직 준비가 덜 끝났어?”
-“2시 좀 넘어도 되잖아? 우리가 그때 안 나가면 안 되는 급한 상황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2시로 정했잖아. 그럼 아까 2시 30분이라고 말하지 그랬어.”
-“2시든, 2시 30분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30분 차이면, 산책계획이 사라질 수도 있다. 2시와 2시 30분이 같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면 할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 남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건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안다. 남편은 ‘왜 아직 준비가 덜 됐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마음이 상한 것 같다. 마음이 상한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나는 맛있는 커피 한잔이면 풀리는데, 남편은 마음이 상하면 그냥 집에만 있고 싶어 한다.
외출시간은 14:00, 내 마음속 시간은 14:30
남편처럼 그냥 쿠키니까-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좋으련만. 난 남편과 다르다. 매 상황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 남편도 예외가 없다. 30분은 나에게 꽤 큰 차이지만, 남편의 주말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깟 30분으로 넘어가본다. 정해진 계획을 벗어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이젠 조금씩 여유로워진다.
‘삼십 분쯤이야’
결혼을 한 뒤, 계획을 세워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나의 성향은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남편의 말을 틀린 말이 잘 없다. 근교 카페를 가든, 동네 카페를 가든, 햇볕산책을 하든 하지 않든. 어딜 가든 나와 함께면 상관없는 남편은 30분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30분을 늦게 나가면 어떻고, 1시간을 늦게 나가면 어떨까. 우리에게 주어진 주말을 서로 함께하는 데 쓰면 그만인 것을.
목표를 ‘2시에 나가기’에서 ‘함께 주말 보내기’로 바꾸면, 다툴 일도 없어진다. 알찬 주말을 위해 이것저것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던 나의 계획은 ‘함께하기’ 하나로 단순해지니 오히려 서로 간의 잡음이 줄었다.
우리의 외출시간은 날이 갈수록 가벼워진다. 시간보다는 어떤 옷을 입고 갈지, 서로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은지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여유가 만드는 것
30분을 내려놓고 나서야 보이는 게 생겼다. 남편의 느긋함이 단점이 아니라는 것. 내 기준에서 맞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실제로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조금 멀리서 보면, 크게만 보이던 것이 손톱만 해질 때도 있다. 2시와 2시 30분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함께 누리는 일인 동시에, 나와 다른 점을 얼마나 품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확인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삼십 분쯤은 괜찮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에필로그_
남편덕분에(?) 시간강박에 대해 약간의 용기가 생겼어요. 오히려 삶이 좀 편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삶에 조금 여유가 생긴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