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1.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다.
2.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자꾸만 움직이다.
3. 물 따위가 설설 끓거나 일렁거리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설렘이라는 감정을 곱씹어보면, 꼭 좋은 일 앞에서만 찾아오는 건 아닌 것 같다. 해본 적 없는 일, 결과를 알 수 없는 일 앞에서 마음이 먼저 반응할 때. 그게 설렘이다.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두근거리는 것. 좋은 일이라기 보단 새로운 일에 대해서 시작되는 감정인 것 같다.
뜻밖의 이메일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와 블로그를 통해 일상을 글감으로 삼아 짓고 있는데, 그 작은 움직임이 글쓰기 수업, 공모전으로 밀물처럼 번져갔다. 뭔가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커피를 내리고, 남편이 출근 한 뒤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요즘 일상이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이어지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혹시나 싶어 오래 열어보지 않던 이메일 계정을 확인하다가 뜻밖의 메일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KBS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진입니다!
스팸이겠지. 아니, 설마 진짜? 몇 초 동안 여러 생각이 흘렀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메일을 열었다.
가정의 달 특집, 연애와 결혼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출연제안 메일이었다.
<우리의 세계>를 보고 연락해 주셨다고!
바로 옆에 있던 남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오빠, 이거 봐봐. 스팸메일 아니겠지?"
"KBS?? 다큐멘터리 출연?? 브런치 보고 연락 한 거야?"
"응응, 블로그에 <우리의 세계> 글을 소개한 포스팅이 있는데, 그 포스팅을 통해 브런치를 보셨나 봐!"
"와, 진짜 신기하다. 다큐 출연이면 우리 티비에 나오는 거야?"
"ㅋㅋㅋ 모르지. 근데 만약 출연하면 같이 해야 될 수도 있는데 오빤 어때?"
남편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재밌겠는데? 해보자!"
"오빠 괜찮겠어...?"
"응응, 우리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구!"
그 말에 오히려 놀랐다. 내가 아는 남편은 도전과 설렘이 반비례하는 사람이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남편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일을 시작하는 데 꽤 신중한 편이다. 어떤 결정이든 고민의 시간이 길어서, 예전에는 내가 고민의 기한을 알려달라고 한 적도 있을 정도니까. 그렇게 몇 년이고 고민할 사람이 선뜻 '해보자'라고 했다.
도전과 설렘이 비례하는 나는, 오히려 긴장감이 더 컸다. 평소의 우리가 잠시 자리를 바꾼 것 같은 순간이었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이던 시간
남편의 말에 힘을 얻어 작가님께 회신을 보냈고, 다음 날통화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쿠키상자님. KBS 작가 000입니다. 블로그와 브런치 글 재밌게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요..!"
"아하~네네! 저희가 이번에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다큐 2부작을 기획하고 있어요. 전화로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작가님의 취재가 시작되었다.
첫 만남부터 프러포즈, 신혼 일상까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수다쟁이인 나는 어느새 긴장은 온데간데없이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통화를 마치고 촬영 일정과 장소를 협의했다. 집 촬영은 부담스럽다고 정중히 사양하고, 남편이 다니는 도자기 공방과 동네 카페로 정했다.
손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여 남편에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다.
"오빠, 오늘 KBS 작가님이랑 통화했어!"
"오 진짜?? 너무 신기해. 뭐 물어봤어?"
"진짜 일상 이야기? 그러고, 집 촬영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더라고. 집에서 촬영하는 건 부담스러워서 야외촬영 위주로 하기로 했어."
"잘했어. 집 촬영은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응응. 카페나 오빠 취미로 하는 도자기 공방에서 촬영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도자기 공방?? ㅋㅋㅋ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데?"
취재할 때 물어보셨던 질문들은 다 이유가 있는 질문이었다. 촬영 날짜까지 확정되고 나니, 날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과 설렘이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런데 얼마 후, 작가님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쿠키상자님, 잘 지내셨죠? 다름이 아니라, 집 촬영이 진짜 안 되는지 다시 한번 여쭤보고 싶어서요. PD님께서 집 촬영이 꼭 필요하다고 하시네요."
이사를 앞두고 있어 짐도 어질러져 있었고, 집 공개는 아무래도 부담이었다. 결국 이번 촬영은 끝내 거절하였다.나보다 더 신나 있던 남편이 아쉬워할까 봐 걱정됐는데, 오히려 남편은 잘했다며 위로했다.
"잘했어. 집 촬영은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긴장과 설렘으로 달아올랐던 마음이 아쉬움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변화무쌍한 감정의 변화가 낯설었지만, 지나고 보니 이 과정 자체가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같이 나눈 설렘
돌이켜보면, KBS제안 말고도 남편의 새로운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중에 남편에게 왜 그렇게 선뜻해보자고 했냐고 물어봤다.
"혼자였으면 안 했겠지. 같이니까 해보고 싶었어."
사실 나는 늘 혼자서도 잘 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전 앞에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기보다, 일단 먼저 뛰어드는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남편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그 이메일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을 것 같다. 같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훨씬 큰 힘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각자의 이름보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일이 많아졌다. 연말정산, 세금, 병원 같은 크고 작은 일들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해결하면서, 나만의 삶이 우리의 삶으로 바뀌었다. 그게 때로는 삶이 확장되는 느낌이고, 때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좁아지는 느낌이기도 하다. 사실 뭐가 더 좋은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신만의 삶을 그려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이니까.
다만, 나에게 있어 결혼은 삶이 더 확장되는 느낌이다. 나에게 없던 남편의 모습이 어느샌가 나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나에게 있던 모습이 남편에게도 보이면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이번에도 그랬다. 신중한 남편이 먼저 '해보자'라고 했고, 도전을 좋아하는 내가 오히려 긴장했다. 남편의 설렘이 나의 용기가 됐다.
비록 촬영은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 설렘은 없던 일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머릿속에만 머물던 생각을 조금씩 꺼내볼 용기도 생겼다. 다큐멘터리 출연 제안을 시작으로, 다음에 또 어떤 뜻밖의 설렘이 찾아올지 기대된다.
에필로그
"설레다"의 세 번째 뜻을 다시 보게 됐어요.
- 물 따위가 설설 끓거나 일렁거리다.
설렘은 확 타오르는 게 아니라 일렁이는 거였나 봐요. 결혼 생활도 그런 것 같아요. 매일 크게 설레는 건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 못 한 순간에 일렁이는 때가 있으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세계>가 어떤 설렘으로 또 일렁일지, 기대해 주세요.
오늘 설날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