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몽이고, 장모님은 용과라고?

스물네 번째

by 쿠키

시선

(視볼 시 線줄 선)

1.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

2. 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접한다. 외모, 목소리, 분위기, 말투까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전에 우린 이미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을 정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초두효과라고 한다. 처음 들어온 정보가 이후 판단의 기준이 되는 현상. 그래서 첫인상은 생각보다 오래, 생각보다 깊이 남는다. 누군가를 오래 바라본다는 건, 그 사람에게 수백 번의 시선을 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선이 쌓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누군가를 바라본 시선을 언어로 저장하는 편이다. "논리적인 사람", "조용한데 웃긴 사람"처럼,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나만의 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남편은 달랐다. 이미지를 잘 떠올리는 편인 남편은 첫인상에 대한 직감을 꽤 중요하게 여긴다. 그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느낀 건, 주말 점심 외출길에서였다.



내가 자몽이라고?

나는 뜬금없이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 주로 사람을 동물이나 과일, 외계인, 색깔 등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내가 알지 못했던 시선이 더해지는 것 같아 새롭다. 남편과 점심을 먹으러 외출하다가 문득, 내가 과일이라면 어떤 이미지일지 궁금해졌다.


"오빠, 나 어떤 과일 닮은 것 같아?"


남편은 5분도 안 되어 답했다. 자몽.

나는 사과쯤을 생각했을 것 같았는데, 자몽이라니.


"오빠, 자몽 너무 웃기다. 내가 왜 자몽이야?"

-"ㅋㅋ겉으로 보기엔 동그랗고 탐스러운 귤 같잖아.

근데, 까보면 분홍색이야! 그것부터 이미 한 번 반전이 있지. 그리고 맛에서 한 번 더 반전이 있어. 과육이 겉보기엔 달고 맛있을 것 같은데, 한입 베어 물면 너~무 셔."

"뭐야, 좋은 거야?"

-"ㅋㅋㅋㅋㅋ반전매력이 있다는 거지. 달 것 같은데,

찡그려질 정도로 시고, 어떤 건 씁쓸한 맛이 나기도 해. 자몽을 딱 처음에 보면, 어떻게 그런 맛을 상상하겠어?"


남편이 처세술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몽 비유로 그 실력을 다시 한번 인정하게 되었다.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칭찬같이 들리는, 그 오묘한 화술은 가끔 배우고 싶기도 하다.

날 닮은 과일을 자몽이라고 말하는 남편을 보면서, 남편이 생각한 첫인상과 나는 꽤 달랐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몽이라고 정의하기까지 남편에게 얼마나 많은 물음표가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남편은 나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쿠키는 신기하고, 재밌어. 그리고 너무 웃겨."


결혼 전, 내가 왜 좋냐고 물었을 때도 남편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재밌잖아.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데?"

그땐 그 말이 조금 서운했다. 뭔가 근사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고작 재미라니. 그런데 지나고 보니, 재밌는 게 최고인 건 맞는 것 같다. 누군가가 재밌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큰 나비효과가 있다. 그 사람과의 인연이 나도 모르게 단단하게 연결되고 있으니까.



아빠는 호두, 엄마는 용과

섬세하고 관찰력이 좋은 남편은 평소에도 눈썰미 하나는 자신 있다며 잘난 척을 하곤 한다. 자몽을 고른 남편의 대답이 꽤 정확해서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오빠, 그럼 우리 아빠는 어떤 과일 같아?"

-"흠... 장인어른은 과일 중엔 없는 것 같아. 장인어른은 호두 같아!"

"호두??? 낯설긴 한데, 들으니까 아빠랑 호두 너무 잘 어울리긴 한다."

-"호두는 껍질이 엄청 단단하잖아. 망치로 깨야 될 만큼. 그리고 속이 꽉- 차 있어."

아빠는 호두/ 이미지출처: pinterest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오랫동안 아빠를 봐온 엄마친구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아버님 포스 장난 아니잖아. 난 오래 봤는데도 가끔 무서워.'

아빠는 170cm가 안 되는 키지만, 40여 년간 러닝과 등산으로 다져진 단단함 때문에 작은 체격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 몇 수 앞을 가장 정확하게 내다보는 사람이 아빠다. 속도 알찬 사람. 아빠를 호두라고 생각한 남편의 관찰력에 이번에도 속으로 박수를 쳤다.


"오빠, 너무 재밌다. 혹시 엄마는? 내가 생각했을 때 엄마도 귤 계열 같은데?"

-"ㅋㅋㅋㅋ아니지, 귤 계열은 확실히 아냐."

"오잉? 나 엄마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듣는데."

-"쿠키는 굳이 따지면 장인어른을 닮았지. 성격은 완전 장인어른 판박이고."

"신기하다. 그래서 엄마는 어떤 과일이야?"

한참을 생각하더니,

남편은 내가 먹어보지도 못한 과일로 답했다.

"용과! 장모님은 용과야. 엄청 화려하고, 독특하잖아.

씨도 많고. 처음 보면 어떻게 먹어야 될지 모르겠지만, 막상 먹으면 부드러운!"

엄마는 용과/ 이미지 출처: pinterest


나는 엄마가 화려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남편 말을 들어보니 용과가 너무 잘 어울렸다.

남편의 말을 듣고, 다시 엄마를 생각해 봤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253개인 엄마는 프로 소통러다. 쇼핑을 좋아하고,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고, 남들의 연애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진다. 소녀감성이 늘 완충되어 있으며, 새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며 거금을 주고 가족사진을 다시 찍을 만큼, 사위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화려한데 속은 꽤 달달한 용과 같은 엄마.

남편의 관찰력을 맹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수백 번이 지나간 남편의 시선

부모님과 나 말고도 남편은 동생들도 과일로 설명했다. 여동생은 복숭아, 남동생은 수박. 그렇게 과일로 본 우리 가족의 모습을 두 시간 가까이 나눴다.

대화를 하면서 느꼈지만, 남편이 우리 가족에게 닿은 시선에는 다정함이 있었다. 객관화하고 분석하기 바빴던 나의 시선은, 남편 앞에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남편만큼 가족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결혼한 지 4년이 된 남편의 시선이 닿았던 곳들을 생각해 본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을 곳, 낯설었을 곳, 당황했을 곳, 그리고 어쩌면 따뜻했을 곳. 수백 번의 시선이 쌓인 끝에 호두, 용과, 자몽, 복숭아, 수박이 나왔다. 남편의 시선이 닿았던 곳에선 끝내 다정함이 물들었다.


남편이 역으로 질문했을 때, 나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남편과 시댁 가족들을 떠올렸을 때 선뜻 생각나는 과일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남편의 답이 너무 완벽해서 헐렁하게 대충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고민해 보고 정답을 내놓겠다고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남편이 시선이 지나간 우리 가족들의 자리에는 애정이 담겨있다. 정말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나의 시선도 남편에게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_

여러분은 주변 사람이 어떤 과일을 닮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이 질문이 생각보다 꽤 어렵더라고요. 아직 남편의 과일을 고민 중이에요.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번 물어보세요. 그 대답 안에 그 사람이 당신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다정하게 바라봤는지 느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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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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