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끈 氣기운기)
1. 물건의 끈끈한 기운.
2. 쉽게 단념하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견디어 나아가는 기운.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무언가를 계속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열심히 하던 운동을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거나, 오래 다니던 학원을 끊어버린 경험. 아마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게 결단력 있는 선택인가, 아니면 그냥 포기인가. 그 경계가 생각보다 흐릿해서 막상 닥치면 쉽게 알 수가 없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여러 번 계속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기어이 이루어 내고야 만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다. 한자 성어로는 십벌지목(十伐之木). 의지, 끈기, 몰입. 무언가에 대한 도전 의식이 잔뜩 솟아오르게 만드는 말이다.
좀 더 어렸을 땐, 무조건 찍다 보면 언젠간 넘어지게 된다는 저 속담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조금 더 때가 묻은 지금의 나는, 이 속담이 먼저 떠오른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이 사고 전환은 나를 더 신중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꾸준함을 가로 막았을지도 모르겠다.
취미에 24만 원을 쓴다고?
결혼하면서 남편과 나는, 부부라는 이름 아래 또 하나의 지위가 생겼다. '경제공동체'. 서로의 자산을 각자 관리하다가 결혼하고 1년쯤 지났을 때, 남편의 제안으로 우리의 자산은 하나로 합쳐졌다. 모든 걸 기록하길 좋아하는 나와 목적 단위로 자산을 통장 쪼개기로 관리하던 남편. 우린, 자산 관리에서도 너무 달랐다. 누가 경제공동체의 마스터키를 가져갈까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수직적 구조가 아닌, 수평적 구조로 자산을 관리하기로 했다. 부동산, 주식 등 목돈관리는 남편이, 매달 수입, 지출되는 생활비 관리는 내가 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린 따로 또 함께, 매달 한 번씩 서로의 성과를 공유한다.
생활비 마스터 키는 내가 쥐고 있기 때문에, 매달 돈이 들어가는 취미를 위해선 나의 동의가 필요하다. 자산이 넘친다면, 배우자의 어떤 취미도 다 지원해 줄 만큼 넓은 아량을 가졌지만(?) 우리에겐 자산이 충분하지 않다. 그러니, 하고 싶은 취미를 다 할 순 없는 것이다.
"오빠, 도자기 학원비용이 얼마지?"
-"24만 원!"
"한 달에?"
-"응응, 재료비랑 강의료랑 이것저것 포함돼있는 금액이야."
-"오빠, 그거 꼭 해야 되는 거야?, 우리 생활비에서 24만 원 취미 비용은 너무 큰 지출인데...?"
"나 이거 취미 아니야. 제2의 직업으로 진지하게 하는 거야. 그냥 취미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서운해."
-"??? 아니, 우선 지금은 취미로 하는 거 맞잖아? 어떤 수입이 발생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렇긴 한데. 뭔가가 이뤄지기 위해선 수입 없이 일정기간 투입되는 기간이 필요한 법이잖아. 도자기는 지금 그런 기간이야."
한 달에 24만 원짜리 취미가 지금 우리 형편에 맞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연필 드로잉, 디지털 드로잉, 키링 만들기. 그 동안 하던 가성비 좋은 취미들은 '도자기'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을까? 가성비와 효율만 따지던 내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한번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오빠, 도자기 하면 회사 스트레스가 풀려? 오빠의 정신건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응!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다니까."
"그래 그럼 알겠어. 나중에 오빠가 도자기 공방을 차릴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오빠한테 그 정도의 가치 있는 시간이라면 찬성할게. 응원해."
스며드는 자연스러움
사실 남편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취업스터디에서 나를 처음 만난 날, 남편은 성당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2년이 넘는 짝사랑 끝에, 수없이 싸우면서도, 결국 결혼에 골인한 사람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은 한 번도 도끼를 내려놓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도자기도 마찬가지였다. 도자기를 해온 지도 거의 2년째. 남편은 정말 꾸준히 도자기 공방에 출석했다. 주말이면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다는 집돌이 남편이, 토요일 아침부터 공방을 가기 위해 눈을 뜬다. 평일 퇴근 후에는 그 주에 만들 도자기를 틈틈이 찾아보고 스크랩해 두면서 자기만의 멋을 찾는 데 열중한다.
남편은 '스며든다'는 말을 좋아한다. 언제 물들었는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물이 들어버리는, 느긋한 꾸준함. 맺고 끊음이 분명한 나에게 느긋한 꾸준함이란 한여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말이다.
"나는 그냥 스며드는 게 좋더라."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스며든다는 건 뭐야?"
"그런 결단력도 좋긴 한데, 눈앞에 목표를 설정해 두면 너무 간절해지니까. 그냥 좀 힘을 빼보려는 나만의 방법?"
-"회피 아니고?"
"회피 아니야~ 마음을 좀 내려놓고, 여유롭게 꾸준히 해보는 거지."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게, 느긋한 꾸준함이란 말은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나도 가져보고 싶은 스킬이랄까. 마음 한 구석을 조금 비워둔 채, 이 마음도 저 마음도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사람. 그 사람 옆에 있다 보면, 나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설마, 느긋한 꾸준함이 나에게도 스며들고 있는 걸까?
도자기공방이 진짜 만들어질까?
눈으로 봐야 신뢰 데이터가 쌓이는 나는, 이젠 진심으로 남편의 도자기 열정을 응원한다. 진심이라는 마음이 생기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앞으로 도자기에 대한 남편의 열정을 몇 번 쏟아야 그 나무가 쓰러질까 궁금하다. 느긋한 꾸준함으로 도자기 공방이 끝내 우리 삶에 스며든다면, 그 또한 얼마나 재밌을까
남편이 공방에서 완성된 도자기를 들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에게 꼭 보여준다. 어떤 말도 없이 신문지를 펼치면서 도자기를 나에게 내밀지만, 입은 항상 귀에 걸려있다. 조금씩 늘고 있는 물레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눈치다. 언제쯤 넘어질지 셈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자기를 보여줄 때 간직했던 남편의 설렘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남편의 느긋한 꾸준함. 오늘 날짜로 기록해 봐요.!
(제목이미지 출처: pinter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