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번째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9명의 학문과 예술의 여신.
요즘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이 에세이는 그날 어떤 영감으로 글을 쓰냐에 따라 단숨에 써지기도 하고, 꾸역꾸역 써지기도 한다. 단숨에 글이 써지는 날이면, 초안이 후루룩 나오고 몇 번이고 읽어봐도 나름 꽤 유쾌한 글이 써진 것 같아 뿌듯하다. 반면에, 꾸역꾸역 글을 쓰는 날이면 투입시간 대비 글이 정말 나오지 않는다. 각종 커피, 과자를 책상 위에 놓고 마음을 다잡고 쓰려고해도 잘 안된다. 애꿎은 플레이리스트만 몇 번을 바꾸고, 이른 저녁이 돼서야 1% 가깝게 떨어진 효율성을 간신히 붙잡고 발행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글을 써서 발행을 누르면 어김없이 애독자 1호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이 돌아온다.
뮤즈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을 말한다. 니체의 영원한 뮤즈인 루 살로메부터 샤넬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뮤즈인 블랙핑크 제니까지. 글, 노래, 옷, 건축물 등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1명 이상의 뮤즈가 존재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했던가? 뮤즈는 그럴 수 없다. 달던 쓰던, 불가항력적으로 작가의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내가 연재하고 있는 신혼부부 에세이 <우리의 세계>는 남편과 있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쓰인 글이다. 남편과 했던 대화를 포착해서 글을 쓰다 보니, 난 남편의 말을 토시하나까지 기억해 버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에세이분야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내게, 남편은 처음이자 마지막 뮤즈다.
뮤즈이자 애독자
<우리의 세계>는 화요일 저녁 6시쯤 연재된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려고 제출했던 포트폴리오에 1편 분량의 짧은 글을 쓰고, 합격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쭉 매주 화요일마다 한 주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토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10개 정도의 글감만 메모장에 적어놨었는데, 2달이 지나니 글감은 금세 동나버렸다. 글감상자가 비워진 뒤부터는 한 주 동안 남편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하면서 에피소드를 생각해 낸다. 한 주 한 주 쌓여가는 회차만큼 남편의 피드백은 '좋아요'와 '고생했어요' 버튼에서 평론가로 변했다. <우리의 세계> 전용 평론가.
"오늘 글은 정말 재밌었어. 너무 웃겨ㅋㅋㅋㅋ어떻게 내가 이야기한걸 이런 식으로 구성할 수 있지?"
-"글감만 정해지면 우리 대화를 쓰는 건 별로 안 어려워. 그냥 쭉 써져ㅋㅋㅋㅋ 진짜 오빠가 뮤즌 가봐."
"뮤즈?? ㅋㅋㅋㅋ(한껏 행복)"
난생처음 뮤즈 타이틀을 얻게 된 남편은, 그 자리를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행동한다. 내가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기부여를 자처하고 나선다. 또, 어쩔 때는 본인 스스로 대화를 되짚어보며 글감을 찾아주려 애쓰기도 한다. 아직, 뮤즈에겐 비밀이지만 남편이 찾아 준 글감은 나의 글감으로 채택되지 못한다. 우린 성향이 너무 다르므로.
글을 꾸역꾸역 쓴 날이면,
"쿠키야, 이번 글은 그 뭐지? 퇴고? 그거 안 했지?"
-"... 하긴 했어.. 퇴고를 안 하고 글을 어떻게 발행하냐~"
"한 거야?ㅋㅋㅋ 그럼 글쓰기 힘든 하루였구나?"
-"ㅋㅋㅋ그렇다고 치자"
순식간에 쓴 날과 꾸역꾸역 쓴 날의 나의 글 기분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남편을 볼 때면, 글을 쓸 때 내 모습을 어디서 보고 있나 싶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남편의 반응이 좋았던 글은 나의 라이킷 수와 비례한다. 스스로 애독자라고 칭하던 남편은 진심 1,000%였던 것 같다. 신빙성까지 더해진 퍼센트다.
엠배서더 말고 뮤즈니까!
나의 글감 곳간, 글간의 바닥이 보인 건 한 달 정도 됐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신혼생활에 대한 일상에세이이다. 우린 신혼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른 점도 많았고 이상한 점도 넘쳤다. 처음에는 서로가 맞다며 다투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어렴풋이 이해한 순간부터는 다른 포인트가 감지되기 시작하면 대화의 시간이 늘 뿐, 싸움은 커지지 않았다. 서로 다른 우리의 일상을 재밌어하던 난, 다른 점이 생길 때면 ‘브런치에 써야지!’ 하며 모아두곤 했다. 신혼 초에는 다른 점이 발견될수록 나의 글간은 넘쳤다. 결혼한 지 4년이 되어가는 요즘, 우리 부부의 글간은 비워져간다. 일상에서 서로의 모습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다른 점이 서로에게 거슬리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농담으로 넘어간다. 무탈하게 서로를 이해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좋은 소식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세계> 작가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나 간사한 마음을 직접 느끼게 되니, 할 말이 없다.
- 월요일에 나눈 우리의 문자 -
“글 써야 되는 데 글감이 안 떠올라ㅠ"
-“창작의 고통~~"
“흑 글간이 바닥났어ㅋㅋㅋㅋ"
-“축하? 선물? 기념? 요런 거 어때?? 우리 초반에는 기념일을 대하는 태도도 서로 달랐잖아~~"
“오호"
-“뮤즈를 유지하고 싶어서 열심히 고민하는 중야ㅋㅋㅋ"
“한번 뮤즈는 영원한 뮤즈지. 타이틀에 얽매이지 말길!"
뮤즈와 엠배서더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엠배서더는 브랜드를 대표하고 홍보하는 사람이고, 뮤즈는 그 자체로 영감을 주는 존재를 말한다. 남편은 처음 얻게 된 뮤즈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글감을 찾아주려 노력한다. 지난 대화를 떠올리도록 다시 말해주기도 하고, 고민을 대신해보기도 한다. 나만큼이나 내 글에 애정을 쏟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고맙다. 하지만, 글을 쓰는 건 나의 몫이니 사실 남편의 노력은 나의 글에 닿진 못한다. 본인 사용법을 말해준 남편매뉴얼에 따라, 나의 직설적인 화법을 최대한 돌려서 남편에게 전달한다. 남편이 고민해준 글감으론 글을 쓰지 못한다는 말대신 남편에게 뮤즈와 엠배서더의 차이점을 말한다. 뮤즈는 이미 존재 자체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어떤 역할이 부여된게 아니라, 그저 우연히 내가 느끼는 것이라고!
우리의 세계 part.1
MBTI에 상당히 진심인 우리 부부는 INTJ와 ISFP가 나오는 콘텐츠를 볼 때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읽어본다. 연애부터 지금까지 8년의 시간 동안 서로의 모습을 진심으로 알아간 덕분에 진짜 이해 안 가는 모습이 발견되더라도, 남편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세상을 나의 시선이 아닌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첫 걸음이었다. <우리의 세계> 연재를 시작할 때, 30회를 계획했다. 어느덧, 스물아홉 번째 연재를 마무리하는 날이 되었다. 29회를 채우는 동안 남편은 줄곧 나의 뮤즈였고, 독자였고, 평론가였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을 꼭 쥐고, 우리의 세계 part1의 마지막을 알차게 준비해 봐야겠다.
에필로그-
음악(Music)과 박물관(Museum) 모두 뮤즈를 어원으로 두는 단어라고 해요. 뮤즈가 영감을 주는 존재인데, 그 영감이 쌓이는 곳이 박물관이 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museum이 탄생하지 않았을까요? 저의 뮤즈, 남편에게 영감을 받아 쓴 <우리의 세계>도 우리만의 기록박물관이 된다는 점에서 글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져요. 또, 우리는 각자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특별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단, 뮤즈라는 타이틀에 너무 매몰되선 안 돼요! 뮤즈는 그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