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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Dec 08. 2020

안경과 빙수

(리뷰) 영화 안경

카모메 식당에 시나몬 롤이 있다면 영화 안경에는 빙수가 있다. 큰 트렁크를 두 손으로 끌고 모래사장 위를 지나가고 있을 때 “빙수 있어요” 라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이제 그만 트렁크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앉아 투명하게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사쿠라 씨가 만든 빙수 한 그릇을 천천히 먹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직장인은 일요일 저녁을 싫어한다. 월요일에 대한 부담감은 수면까지 방해할 정도다. 그나마 길게 쉴 수 있는 여름휴가도 마찬가지다. 2박 3일이든 9박 10일이든 마지막 날에는 늘 일요일 저녁의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출근과 더불어 속도와 규칙의 세계가 시작된다. 빠르고 배타적이다. 최대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 내가 맡은 역할이다. 속도에 맞추고 규칙에 적응하는 것. 그런 일상과 노동, 관계에서 우리는 지치거나 다친다.   

  

그때서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뭐가 잘 사는 것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만족하지 못한 성과와 맞지 않는 관계와 상처받은 자존심까지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려할수록 왠지 힘이 빠지고 분석하려 할수록 설득력은 떨어진다. 매일 아우성치는 정보와 수많은 비교 속에서 피로하기만 하다. 많이 본다고 많이 안다고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영화 안경은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만든 휴식에 관한 이야기다. 소박하고 조용한 풍경과 많지 않은 대화,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 속에서 어느새 편안하게 숨을 쉬게 만든다. 주인공 타에코가 도착한 작은 섬은 해변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곳이다. 예약한 숙소에는 주인 유지와 그의 개 코지, 매년 봄이면 이 섬에 와서 빙수를 만드는 사쿠라 씨, 손님은 아니지만 식사를 같이 하는 젊은 생물선생 하루나 씨가 있다.  

   

“아니오, 됐습니다   


사쿠라 씨가 권한 빙수도, 유지 씨가 권한 저녁 식사와 메르시 체조도 타에코는 예의바르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휴대전화가 통하지 않을 만한 곳’을 찾던 그녀였기에 고립을 휴식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중요한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사쿠라씨가 팥을 삶으며 타에코에게 한 말이다. 팥을 보며 한 말이 타에코에게 건네는 말이 된다. 팥을 삶는 일이 삶을 사는 얘기로 통한다. 단백하고 따뜻한 말은 가장 힘이 센 위로가 아닐까. 알맹이가 살아있으면서도 제대로 삶아진 팥을 맛보며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는다. 나도 그 맛을 보고 싶다. 조급해하지 말라는 그 말을 팥 먹듯 약 먹듯 먹고 싶어진다.     


“그저 차분히 기다릴 뿐입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코지는 중요한 것은 뭐든지 챙겨두는 버릇이 있어요. 근데 무엇을 갖고 있는지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것이 코지의 장점입니다


유지 씨는 타에코에게 섬에서 할 일은 ‘사색(타소가레)’이라고 한다. 사색이 어려운 그녀가 요령을 묻자 자신이 하는 방법을 얘기하면서 코지에 대해서도 언급한 말이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사색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집착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채우는 것보다 떠나보내는 것이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이라고. ‘타소가레’란 말이 ‘황혼, 해질녁’이라고 한다. ‘해질녁의 분위기와 같은 느낌으로 생각에 잠기다’가 타소가레라면 내 경계가 조금은 허물어지더라도 내려놓는 것, 그래서 비어있지만 새로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휴식이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다.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 거죠"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득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태어나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또한 언제 멈출지 모르기 때문에 한번 힘을 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빙수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낚시를 하고 사색을 하면서.     


‘우연히도 인간이라 불리우며

  이곳에 있는 나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무엇과 싸워 왔는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짐을 내려 놓을 때

 좀 더 힘을 / 부드러워질 수 있는 힘을’    


타에코를 찾아왔던 제자 요모기 씨가 해변에서 외웠던 시의 일부이다. 조급함과 불안이 어김없이 몰려올 때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다. 지구 같은 거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조용히 빨간 실로 뜨개질을 시작하고 싶다.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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