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처음엔 첫 도시 숙소만 예약을 해둘 생각이었다. 대부분 미리 다 예약하고 여행을 떠났었는데, 이번에는 계획한 일정에 구애받지 않겠다며, 요즘 숙소 찾기가 얼마나 편한데 나 하나 잘 곳 못 찾겠냐며, 팔레르모 숙소만 예약해 놓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어이없는 허세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절대 부릴 수 없는...
매일 150%를 담은 to-do 리스트가 있고,
매일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이, 또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많이...
그중 하나라도 건너뛰면 도대체 마음이 편치 않고,
여행만 가면 P에서 J로 돌변하는 인간…
숙소가 뭔가 꺼림칙하면 쉬는 게 아니라 견디며 밤을 보내고
동트자마자 탈출하듯 튀어나오는,
털털한 척하지만 실상은 까칠하기 그지없는 인간…
혼자 다니니 안전해야 하고,
좋을 필요는 없어도 깨끗은 해야 하고,
걸어 다녀야 하니 위치가 좋아야 하고…
그런 인간이 숙소를 남아있는 것으로 대충 정하겠다니…
떠날 날이 다가오며 하나씩 둘씩 쏠락 쏠락 예약을 하게 됐다. 현실이 눈앞에 닥치니 허세가 사라지고 본색이 드러난 거다. ^^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 하고 두세 곳만 남은 상태가 됐다. 기왕 한 것, 그것 남겨 뭐 하나 싶어 떠나기 전에 다 해버렸다.
어둡거나 문을 닫아 더는 갈 곳이 없을 때까지 돌아다니다 숙소에 들어오면 기본 할 일만 하기에도 벅찼다. 씻고, 빨래하고, 사진 백업하고, 짐 정리하고, 일기 쓰고, 다음 날 일정 확인하고 공부하고... 들어오자마자 기절했다 새벽에 일어나 할 일을 했던 적도 여러 번. 그 상황에 숙소 찾아야 했다면 스트레스 엄청 받았을 것 같다. 게다가 작은 화면으로, 인터넷 속도로 시원치 않는 상황에… 심지어 연결이 좋지 않은 적도 몇 번 있었다. 물론 예산이 무제한이라면 어떤 상황에도 쉽게 좋은 숙소를 찾았겠지만, 우리는 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않나? ^^
결론… 예약하길 백번 잘했다. 이것저것 고려하고 비교하며 숙소까지 찾을 시간이 없다. 아니, 시간을 숙소 찾기에 쓰면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에 쓸 시간이 줄어든다. 그리고 일정을 정하면 웬만하면 그걸 따라가게 된다. 보통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정한 일정이라, 그게 대개 최선이다. 또 예약이 절대 변경 불가도 아니다. 취소나 변경 가능한 옵션이 있다. 아무튼 미리 할 수 있는 건 미리 하는 게 여행 시간을 알차게 쓰는 방법...
숙소 선정 기준은 위치와 청결도, 딱 두 가지만 보자 했다. 가격은 저렴할수록 좋지만, 위치와 청결도를 포기하며 타협하지는 않기로…
위치는 안전과 직결된 문제라 뚜벅이 홀로 여행자에겐 특히 중요하다. 모두 관광지가 있는 구시가지에 숙소를 정했다. 관광객이 많으니 치안이 좋고 편의시설도 많고, 교통편도 좋다. 위 숙소들의 위치는 모두 100점이었다.
청결도는 생존을 좌우하지는 않아도 복지의 문제라 포기할 수 없었다. 여행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잘 가지는 않는다. 주된 이유는 침대와 화장실 때문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집 밖에서는 화장실을 잘 안 간다. 변기도 가지고 다녔다던 누군가의 미친 짓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한다. 트라파니 숙소 빼고 나빴던 곳은 없었다. 조금 아쉽다 하는 곳은 있었어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 했었다.
노토noto, 모디카modica 두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약한 대로 머물렀다. 숙소를 옮기는 overhead가 너무 커서, 노토와 모디카 숙소를 취소하고 시라쿠자siracusa로 몰았고, 노토와 모디카에는 시라쿠자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그런데 모디카는 라구자ragusa에서 가깝고 교통편도 좋아 라구자에서 당일치기를 하는 게 더 좋을 뻔했다. 결과적으로 시라쿠자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여행 중반에 누적된 피로를 풀며 한숨 돌렸던 것 같다.
이번 여행 최악의 숙소였던 트라파니의 알베르고 막꼬따도 위치는 엄청 좋았고, 언젠가 만났던 바퀴벌레 기어 다녔던 숙소에 비하면 절대적 최악은 아니었다. 복이 많았던 여행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에 숙소가 기여한 바가 크다 싶다.
라구자와 체팔루cefalù는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했다. 홈페이지로 예약을 요청했더니 다음날 이메일로 답장이 왔다. 라구자는 날짜를 변경해야 했고, 체팔루는 예약 확정 방법에 문제가 있어, 두 곳 모두 전화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 충분히 좋았다.
라구자 숙소는 수도원을 개조한 전문 호텔이어서 시설, 서비스, 청결도 모든 것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라구자 이블라의 제일 안쪽 끝에 있어 역까지 걷기에 좀 멀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수 있는데, 예쁜 공원 안에 있어서 이른 아침 새소리 들으며 산책도 하고 일출을 보며 계곡 풍경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체팔루 숙소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피정시설 같은 곳이었다. 위치는 더할 수 없이 좋은데 (시네마천국, 바닷가에서 영화 보는 장면 중 스크린 뒤에 있는 건물. ^^) 가격이 믿을 수 없이 저렴해서 뭔가 의심스러웠는데, 평이 좋고, 수도원 시설이라는 점을 믿고 예약했었다.
첫눈엔 지나치게 소박해서 예의상으로도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다 낡아서 그렇지, 깨끗했고, 필요한 건 다 있었다. 화장실 전구가 깜빡거려 말하니 당장 고쳐줬고, 수도원이라 통행금지가 있겠다 했는데 없었다. 결제는 현금으로 체크인한 다음 날까지 해야 한다는 등의 작은 규칙들이 있었지만 야박하지 않았다. 부엌이 있어서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었다. 원장 수녀님은 터프한 척해도 천진한 장난꾸러기였고, 안팎을 관리하는 안나도 친척 아주머니 같았다. 잘 보살펴주었고 내 바디 랭귀지도 엄청 잘 알아들어 말이 안 통해도 통했고 편하고 재밌었다. 기숙사 방처럼 편안해 방문을 다 열어놓고 지내서 좁아도 답답하지 않았고, 에어컨 대신 바닷바람으로 더위를 식혔다. 첫날은 창 밑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잠을 잘 못 잤는데, 둘째 날은 수면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고, 셋째 날에는 요즘 유행하는 ASMR 수준의 달콤한 자장가로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면 체팔루 해변이 한눈에 들어와서 멍 때리기도 하고 노을도 보고 야경도 봤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한두 시간 자고 나와 돌아다니고, 진짜 집 같았다. 5성급 호텔이나 차지할 법한 위치에서 한껏 호사를 누렸다.
다른 숙소들은 booking.com에서 예약했다. 트라파니의 막꼬따를 제외하고 모두 9점 이상이었다. 트라파니 빼면 모두 다시 묵을 의사가 있을 만큼 좋았다. 잠만 자는 게 아쉬웠던 곳도 많았다.
최악이었던 트라파니 숙소 막꼬따는 8.x점이었는데 론리 플래닛 추천이라 믿고 예약을 했으나, 추천해서는 안 될 숙소였다. 위치만 좋았다. 시설도 너무 낡았고, 침구도 너무 낡았고, 낡은 건 그렇다 쳐도 청결하지 않았고, 서비스도 형편없고, 영어를 못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지 말도 잘 안 통했고, 게다가 무례했다. 그런데 너무 친절했다는 평도 꽤 있는 것을 보면 제대로 차별을 당한 것 같기도 하다. 위치 빼고 모두 형편없었다. 시칠리아를 한 바퀴 돌고 보니, 그 가격에 그런 서비스를 트라파니에서 제공하는 것은 양심불량이다. 론리 플래닛 작가와 모종의 커넥션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드는 곳.
팔레르모 숙소는 두 곳인데 위치도 비슷하고 모두 좋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단연 '알 마씨모al massimo 36'이다. 알 마씨모는 주인이 살면서 방 두 개를 B&B로 운영하는 곳인 듯하다. 객실이 두 개 밖에 없다. 주인의 세련되고 감각적 취향이 그대로 느껴졌고, 친절을 넘어 정성으로 손님을 맞았다. 두 숙소 모두 화장실이 전용이긴 해도 객실 밖에 있어 조금 불편하다 했는데, 그렇더라도 예약만 할 수 있다면 단연 또 알 마씨모에서 묵을 것 같다.
마르살라 호텔은 큰 체인 호텔이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방이 호사스러울 만큼 좋았고 성당 광장 맞은편에 있어서 위치가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아그리젠토 숙소는 상대적으로 너무 싸서 혹시 도미토리를 예약한 건가 걱정했었는데, 방도 크고, 넓고 깨끗하고, 완전 시내는 아니어도 위치가 좋다. 테라스에서 바다가 보이고, 맛집이 옆에 있다. 하루만 묵는 것이 아쉬웠다. 세상 태평하고 인심 좋아 보이는 호스트는 체크인하고 말도 없이 사라졌고, 모든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해결해 주었다. 숙박비는 내는 곳을 물으니 누군가 얼마 받아야 하냐고 물으며 받고, 짐 맡길 곳 물으니 누군가 맡아 주고, 아침은 누가 주냐고 물으니 누군가가 더 필요한 것 없냐 물으며 챙겨주었다. 말만 들으면 굉장히 엉망진창인데, 집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보면 답이 나와 별 불편이 없었고, 서로 속사정 다 알고 내 일 네 일 없이 사는 모습이 신선했고 보기 좋았다. 숙소 이름은 피란델로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인데, 아그리젠토 출신으로 시칠리아가 사랑하는 노벨상 수상 작가란다. 피란델로의 말로 방 벽을 장식했을 만큼, 작가의 팬이 운영하는 숙소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엔나 B&B는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없어도 더 바랄 것 없이 좋았다.
피아짜 아르메리나의 숙소는 시내 숨겨진 듯한 골목에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좋았고, 사양해도 한 시간이나 이르게 아침밥도 정성껏 챙겨주고, 차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 정도로 호스트 가족의 정이 넘쳤고, 방도 넓고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었고, 전망 좋은 테라스도 있고, 맛 집 정보 등 지역 정보도 잘 정리돼 있었고, 비밀의 정원 같은 작은 정원도 너무 예뻤다. 늦게 들어가서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나오는 게 너무 아쉬웠다.
시라쿠자 숙소는 시설은 조금 아쉬워도 위치가 아주 좋았고, 충분히 깨끗했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고, 아침마다 대성당 광장에 있는 바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주변 바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줬다. 이 동네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는 B&B가 꽤 있는 것 같았다.), 호스트가 친절하고, 말동무도 잘해주었는데, 영어를 잘해서, 영어로 말하며 과연 내 말을 이해하며 듣고 있는 걸까 하는 의심 없이 편하게 말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타오르미나 숙소도 흠잡을 곳 없이 좋았다. 위치도 완전 좋고, 호스트도 나도 서로 바빠서 체크인은 007 작전처럼 했고, 호스트 얼굴은 5분 정도밖에 못 봤지만 세련된 취향의 좋은 사람인 것 같고, 방도 깨끗하고 고급스러웠고, 배가 엄청 고팠는데 간식거리를 챙겨놓은 것도 감동이었다. 부엌이 있었고 경치 좋은 옥상 테라스도 있었다.
P.S.
안내서에 최근 지역에 따라 tourist tax가 생겼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받는 곳도 있었고 받지 않는 곳도 있었다.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라면 냈다.
숙소에 체크인할 때 반드시 여권을 보여줘야 한다. 그냥 보여주면 되는 게 아니고 어디에서는 잠시 보관했다 돌려주기도 해서 이상하다 했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몇십 년 전 관광객에 의한 테러 사건이 있었는데, 그 후에 투숙객의 신원을 투숙한 날 자정까지 경찰서로 보내야 하는 법이 생겼고,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단다.
아침 식사는 동네마다 숙소마다 제공 여부도, 방식도 달랐다. 아침 시간은 대부분 8시부터 10시 사이였다. 이제와 드는 생각인데 날씨도 선선하고 거리도 한적한 이른 아침에 산책도 하고 일찍 여는 교회도 보고 들어와서 아침 먹고 하루를 시작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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