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해독주스를 끝으로 냉장고에서 비워야 할 것을 다 비웠다. 비로소 부엌은 잠시 기능을 멈출 준비가 됐다. 주스를 마시며 시간을 확인하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라디오 화면이 까맣다. 맞다, 코드 뽑았지... 불필요한 코드도 다 뽑았다. 주스를 마저 마시고 컵을 닦아 엎어놓고, 싱크볼 배수구 뚜껑을 덮고 나서 물을 반쯤 받아놓고 부엌을 나왔다.
한동안 비어있어야 할 집을 잘 정돈해 둬야 마음이 개운할 것 같아 마지막 순간까지 이리도 부산했건만, 정리 상태가 썩 흡족하지 않다. 여행 준비하며 내내 들던 생각이 또 떠오른다. 난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었던 걸까?
그래도 잘 있어주길... 잠시 안녕.
8시 59분 출발.
한 번에 공항까지 가는 교통편은 없다. 버스로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가서 갈아타고 인천공항 1 터미널에 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택시를 보자 택시로 지하철 역까지 가서 지하철로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가자 싶다. 그러는 편이 조금 더 빠를 것 같다. 택시 기사가 공항에 가는 길이면 타려던 것과 다른 호선의 지하철을 타는 것이 낫다고 한다. 확인해 보니, 그 말이 맞는다.
시간은 여유가 있는데, 마음이 급한 거다. 남들 다 간다는 공항 라운지라는 곳에 한번 가보겠다고... 회사원 시절 몇 번 직원용 공항 라운지를 가보긴 했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라운지는 왠지 그곳과는 다르게 들렸고, 비밀스러운 클럽 회원들에게만 허용되는 곳인 것 같았다. 어떤 곳이길래 다들 라운지 타령을 하는지 궁금은 한데, 그곳 한 번 가자고 이미 많은 카드를 또 만들기는 싫고, 그렇다고 누구는 무료로 이용하는 곳을 돈 다 내고 가보기도 싫었었다. 그러다 나도 회비 많이 내는 카드가 하나 있는데, 혹시나 하며 서비스를 찾아보니, 나도 연 1회 무료로 공항 라운지라는 곳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계획과 달랐지만 탈없이 공항 행 버스를 탔다. 기사 아저씨가 우리 세대인지 그 시절 노래를 틀었고 이제 내 안에 없다 싶은 마음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왔다. 전혀 반갑지 않다. 감상에 빠지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생전 처음 건너보는 듯한 다리로 영종도로 들어간다. 갯벌 풍경이 아름답다. 명상음악을 시각화하면 이렇게 보일 것 같다. 집을 조금만 벗어나도 여행인 것을... 일할 때 몇 번 갔었던 물류 회사 건물이 보인다. 아직도 있어서 반갑다.
더 빠르지는 않았어도 늦지는 않게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체크인 카운터가 보이지 않는다. 물어보니, 알리탈리아는 2 터미널에 있고, 3층 8번 출입구 근처에 무료 셔틀버스가 있단다. 헐~
누군가 여행 계획을 듣고 어떤 터미널인지 물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새 터미널로 여행자들이 혼란을 겪기에 물었을 텐데, 새 터미널의 존재를 몰랐던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귓등으로 들었던 거다. 2 터미널을 1 터미널 탑승동을 지칭하는 거라 생각했고, 두 터미널을 오가는 셔틀은 1 터미널과 탑승동을 왕복하는 기차라고 생각했다. 뭔가 미심쩍기는 해서 티켓을 다시 보긴 했는데, 터미널 정보는 없었고 그렇다면 당연 1 터미널이겠지, 아니면 셔틀 타면 되지 뭐 하고 말았었다.
인천공항에서 몇 달간 일을 한 적이 있어 꽤 익숙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내가 그대로라고 세상도 그대로겠냐고...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으면서 확인을 했어야지... 라운지 때문에 일찍 나오지 않았으면 어쩔뻔했어? 공항에 오는 것도 처음 생각대로 오면 될 것을, 갑자기 택시는 왜 타냐고? 더 빠르지도 않았고 택시비만 날렸잖아. 왜 그러는 거야?"
마음속에 호된 질책이 일고, 출발부터 허둥대는 내가 보였다. 괜한 욕심으로 되돌릴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아닌가, 감당할 수 있는 여행을 떠나고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며 슬퍼진다. 하지만 오래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아 빨리 수속이 끝났다. 기내에서 USB로 휴대폰 충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났음에도 마음이 너무 급해 케이블을 안 꺼내고 그냥 짐을 부쳤다. 으악... 엉망이다. 까짓것, 하나 사면 되지. 너무 자책하지 말자 해도 짐 속에 두 개나 있는데 또 사자니 마음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다. (케이블 길이로 짐이 얼마나 준다고, 짐 줄인다며 짧은 케이블만 챙겼었는데, 새로 산 것은 길어서, 잘 샀네, 없었으면 많이 불편했겠다 하며 잘 쓰긴 했다.^^)
다행히 할 일을 다 하고 시간이 남았고, 오늘 모든 행동의 이유였던 그곳에서 드디어 점심을 먹었다. 육중한 밥통 뚜껑에 손을 찌어 멍을 얻어가며... 그러고 나오며 드는 생각은 다음부터는 그냥 비빔밥 한 그릇 사 먹자...^^ 그래도 라운지에 가보겠다고 서둔 덕분에 무사히 탑승수속을 마쳤으니, 그게 오늘 라운지의 역할이었구나 싶고, 그렇다면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느낌... 그러고 멍든 손을 보니 또 속상하다. 내가 이런 사람은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러지? 손에 멍 좀 들었다고 죽지는 않아…
진정하고 이도 닦고 탑승구로 갔다. 그런데 보딩 몇 분 전에 하필 내 이름을 부른다. 왜 또? 뭐?? 불안해하며 카운터로 갔더니, 만석이라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주겠단다. 엉엉… 터미널을 헤매느라 수속이 늦었던 덕인가 보다. 이러려고 그렇게 멍청하게 굴었던가 싶다. 너무 좋다. 편히 가겠다 싶어 그렇기도 하지만, 멍청해도 괜찮으니 너무 자책하고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 같아 고맙다.
비즈니스 석은 예전(아마도 10 몇 년 전쯤)과는 완전 다르다. 누워서 잘 수도 있고, 공간이 독립적이라 주변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옆 사람과 말동무하며 비행의 지루함을 달래는 재미는 완전히 없어졌지만 제대로 누워 잘 수도 있어 좋다. (그것 말고는 뭐가 좋았는지 벌써 잘 생각이 안 난다.) 비행이 휴식처럼 느껴진다. 오늘 아침의 소동을 겪은 후라 그렇기도 하지만 늘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는데, 여행을 앞두고 더 심했었다. 이 시간의 용도는 목적지에 가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하고 있는 거다. 잠깐은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아도 된다.
식사 시간. 새하얀 테이블보와 냅킨, 반짝반짝 빛나는 커틀러리, 하얀 도자기 접시. 학 다리처럼 가는 목을 가진 와인 잔에 루비 빛 시칠리아 산 네로 다볼라를 받아 테이블 위에 놓았는데 터뷸런스가 왔다. 혹시 쓰러질 새라 잔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주위를 보니 그러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조금 마셔볼까 하다 쏟겠다 싶어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도 남들처럼 잔에서 손을 떼보았다. 멀쩡하게 잘 서있다. 신기하다.
밥 먹다 창 밖을 보니 아래로 하얀 숲이 펼쳐져 있다. 한계령쯤에서 보았던 풍경인데, 색깔만 하얗다. 그러다 파도치는 바다로 변하고, 넝쿨식물 늘어진 밀림이 됐다가 코를 추켜올리고 포효하는 코끼리가 되어 나타난다. 너무 창 밖을 봤나 보다. 눈을 감아도 창이 보인다.
무뚝뚝하던 스튜어드가 테이블 보와 가방에 와인을 쏟은 후로 눈 마주칠 때마다 왜 저러지 싶을 만큼 환한 미소를 날린다. 와인 좀 쏟은 걸로 비행기 돌리자고 할 사람으로 보이는 건 아닐 텐데... 당황하며 테이블 보를 갈아주겠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했던 게 감동이었을까? 그냥 쭉 원래 캐릭터를 지켰으면 싶다. 라운지에서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주는 대로 다 먹었더니 배불러 죽을 것 같다.
좌석은 이코노미 석에 비할 수 없이 쾌적한데, 머리도 아프고 몸살이 올 것도 같고,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이 안 된다. 누워 다리를 올려 스트레칭을 해봐도 별 효과가 없다. 10년을 훌쩍 넘겨 요가를 하면서도 요가의 명상 효과를 모르는 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자세 중에 뭐가 좋을까 생각해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뭐... 명상은 복식호흡이지. 들숨, 날숨을 느끼며 한동안 숨을 쉬니 신기하게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이 진정이 된다. 그래도 계속 전기담요 켰다 껐다 하는 것처럼 덥다 춥다 하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나일까 기내 온도일까?
이제 거의 다 왔다. 두 시간 남짓 남았다. 유럽쯤이야 가뿐하지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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