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01 로마에서 팔레르모로

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by anna



로마 공항


6시 55분 로마 도착. 얼마만이야... 반갑다, 로마.


물 500ml에 1.8유로. 공항이라 그런가 심하게 비싸다. 아무 생각 없다가 막상 로마 공항에 내리니, 그리운 로마가 지척인데 그냥 지나치는 게 서운하다. 일주일쯤 머물다 시칠리아로 가거나, 집에 가는 길에 들를 걸 그랬나... 멀리 사는 친구네 동네 왔다 전화 한 통 안 하고 그냥 가는 느낌이다.

8시인데 이제서야 석양이 내린다. 날이 길다. 시칠리아도 마찬가지겠지? 해가 이렇게 길면 아침부터 얼마나 돌아다니려나... 환승 시간 1시간 40분. 나라가 나라다 보니 좀 촉박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한눈팔지 않고 부지런히 탑승구로 왔는데, 웬걸, 연착이다. 뭐라 뭐라 하는데 자세한 건 몰라도 늦는다는 건 확실히 알아듣겠다. 왜 늦는지 얼마나 늦는지 모르고 그냥 무작정 기다린다. 뭔가 낯이 설어 껍질 속에 웅크린 채로... 눈치로 봐서 남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날씨도 덥고 사람이 많아 앉을 곳은커녕 편히 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구경은 사람구경이지...


부모와 장성한 아들이 둘인 가족이 있는데, 티탄 족이 떠오른다. 모두 예사로운 거구가 아니다. 처음 보는 인종 같다. 지금 모습 그대로 고인돌 가족에 등장해도 매우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여행길은 아닌 것 같고, 시칠리아 사람들 같다. 저런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면 막연했던 환상이 실제로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나 신화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가?^^


한 커플이 있다. 여자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두 개나 버겁게 들고 있는데, 남자는 빈 몸으로 여자 옆에 서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넨다. 저렇게 대화를 나눌 사이면 하나쯤 들어줄 만도 한데 절대 그러지 않는다.


시선을 끄는 또 다른 커플이 있다. 여자는 옆에 앉은 남자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계속 남자 얼굴을 바라보고 있고, 이 더위에 스카프까지 두른 남자는 여자에게 눈길 한 번을 안 주고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남자의 스카프가 꼴 보기 싫다. 나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패션 아이템 같다. 그런데 여자도 정말 왜 저럴까 싶다. 남자의 태도로 보아 노골적으로 싫다는 것 아닌가? 얼핏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지만 남자가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리 그윽한 시선이라도 저렇게 오래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건 집착이거나 위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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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o, 팔레르모, 시칠리아!


8시 45분에 떠나야 할 비행기가 9시 20분에 떠났다. 휘황찬란한 해변의 불빛이 보인다. ㅎㅎ 드디어 시칠리아구나. 10시 5분 팔레르모 팔꼬네와 보르셀리노Falcone e Borsellino 공항 도착. 공항의 이름은 마피아를 수사하다 보복으로 희생된, 시칠리아 출신이고 친구였던 두 치안판사의 이름이다.


상상 속에서는 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여행이다 보니 이 정도면 순탄하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짐을 다 찾아가도록 내 짐이 나오지 않는다. 나 말고도 짐이 오지 않은 사람이 두세 명쯤 있는 것 같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 불안이 엄습한다. 직원으로 보이긴 하지만 영 차림새가 불량한 남자가 돌아다닌다. 다른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아 그를 붙잡고 짐이 안 왔다고 하니, 출발지를 묻는다. 그러고는 다른 곳을 가리키며 가보라 한다. 외국에서 출발해서 세관을 거쳐야 하는 짐은 나오는 곳이 달랐던 것이다. 벌써 나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어떻든 왔으니 됐다. 항공 짐은 웬만해서는 분실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초긴장이었던 이유는 뻔했다. 시칠리아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공포. 그러면서도 거기가 가고 싶었어? 하며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그래, 그래도 오고 싶었다!


인천에서 이곳까지 오는 상식적(?)인 경로는 모두 오밤중에 도착한다. 팔레르모까지 공항버스(6유로)가 있는 시간이긴 하지만, 베니스에서의 악몽을 기억하는 한, 낯선 도시에서 자정 무렵에 숙소를 찾아 홀로 헤매는 일을 다시 할 수는 없다. 숙소까지 가장 안전하게 가는 법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픽업 서비스일 것 같았다. 픽업(40유로)을 이용하면 late check-in fee(15유로)를 내지 않아도 된다 하니, 경제적 이유로도 택시(45유로) 보다 더 나았다.

픽업을 신청하며 비행 스케줄과 항공기 편명을 알려주었다. 맞춰 나와서 기다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굳이 도착해서 공항에서 전화를 하라 했다. 전화받고 공항으로 출발한다는 뜻 같았다. 그래서 그럼 한참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냐 노파심을 전하니, 10분 안에 도착한다 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싶었지만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 알았다 하고 말았었다. 아무리 공항이라도 마피아의 소굴이라는 팔레르모인데, 한 밤중에 혼자 있으며 시선을 모으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데, 달리 방도가 없다 싶었다.

잔뜩 긴장해서 전화를 하니, 공항에 있다고 한다. 벌써 나와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마르고 짧은 머리의 남자가 맞으며 자신은 다비드고 옆에 서있는 사람은 루까이고 숙소의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보통은 혼자 나오는데 오늘은 루까까지 나왔단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비행기가 연착됐다고 하니, 그래서 비행 편명을 물어본 것이라고, 알아보고 나왔다 한다. 잉? 물어보기 전에 내가 알려줬는데... 뭐가 됐든 잘 됐으니 됐다. ^^

다비드는 밀라노 출신이라는데 영어를 매우 잘했다. 이탈리아 악센트가 없다. 루까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눈치다. 다비드가 시시콜콜 계속 통역을 했다. [이때만 해도 이탈리아어가 거의 생각나지 않아 제대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루까의 말을 알아듣기는 하겠는데 대답을 하려니 충격적일 정도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와... 그렇게 까지 아무 생각이 안 날 줄 몰랐다. 그런데 이후 수다쟁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수다를 계속, 어쩔 수 없이 듣다 보니 매우 빠르게 불편하지 않을 만큼 기억이 돌아왔고, 후하고 사람 좋은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말 잘한다고 칭찬받으며 다녔다. ^^] 그날 이후로 루까는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건대 여자 혼자 여행한다니까 궁금해서 나와봤던 것 같다. 다비드가 계속 얼마나 시칠리아에 있냐, 어디를 갈 거냐, 해변에는 갈 생각이냐, 시칠리아 음식은 아느냐, 왜 우리 숙소를 선택했냐, 왜 혼자 여행하냐 등등을 물었고 계속 루까에게 통역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많이 의아해한다 싶다. 나도 궁금해 혼자 여행하는 여자가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2016년에 B&B를 시작했는데 1년에 1번 정도 본다고 한다. 사실은 0인데 배려 차원으로 1이라 한 것이 아닐까… 다비드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마주쳤으면 무서웠겠다 싶게 인상이 강하다. 그런데, 잘 웃었고 친절했고 도움이 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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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숙소는 떼아뜨로 마씨모 극장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마씨모 극장에서 오페라를 보겠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극장에서 가까운 숙소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오페라 시즌이 아니더라고 했더니, 숙소를 선택한 이유가 극장이라는 말에 루까가 서운해했다고 전한다. 숙소에 오고 보니 픽업 서비스를 이용한 건 무조건 잘한 일 같다. 어둡고 적막하다. 혼자 이런 골목을 헤매야 했다면 상상력이 만든 공포에 짓눌려 기절하거나 공황장애가 생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낮이든 밤이든 안전한 동네였다.) 건물 한 층을 B&B로 개조해 운영하는 것 같다. 건물은 백 년쯤 됐고 엘리베이터는 그때부터 있던 것이란다. 바깥문 열고 안쪽 문 열고 타고, 바깥문 닫고 안쪽 문 닫고 층 번호 누르면, 덜커덩거리며 올라가고, 다 오르면 순간 낙하하는 느낌이 살짝 들며 쾅 소리를 내고 멈춘다. 철망, 뿌연 무늬가 있는 유리, 철제 장식, 반들반들해진 청동 손잡이와 마호가니 느낌의 나무 내부. 그냥 보면 벨 에포크, 아르누보 등의 낭만적인 단어가 떠오르겠지만 타면 이야기가 다르다. 계단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둡고 침침한 밖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왜 리셉션 데스크 위에 저 그림을 걸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오지만, 밝고 깔끔하고 나쁘지 않은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밤이라 어떤 동네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방도 넓고 깨끗하다. 내가 화장실이 복도에 따로 있는 방을 예약했다는 걸 강조하며 화장실을 보여준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언짢음을 표현하는 손님을 여럿 본 눈치다. 전용 화장실이긴 해도 화장실이 방 밖에 있는 게 영 불편할 것 같은데, 내가 선택했다잖아...


10년 넘게 올까 말까 망설이던 곳에 있다니... 비현실적이다. 안드레아가 네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야라고 겁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 옛날에 왔었을 텐데... 네 밤을 묵어야 하니 짐을 좀 풀어 정리하고, 씻고 에어컨, 창문 등 파악해서 단속을 하고 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오는 길에 전구로 장식된 골목 입구가 보이니 뽀르따 카리니Porta Carini라고 하며, 시칠리아에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종교 행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다비드에게도 낯설기만 한 풍습인가 보다. 보수적이고, 종교와 성인 등 영적인 존재에 많이 의지하는 곳이란 느낌이 든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시칠리아의 모습이다. 보수적이고 영적인 땅이라니... 제주도가 생각났다. 제주도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두 섬 모두 바다와 화산, 지진 등 거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지배세력 간 권력싸움의 희생양이었고 수탈의 대상이었고 그로 인한 부조리를 받아내며 견뎠다. 어쩌면 지금도 견디고 있는지도...



좋든 나쁘든 과거가 여전히 현재를 완강히 지배하는 땅에서 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그들의 복잡다단한 시선을 따뜻하게 마주하며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buona notte a tu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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