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어젯밤…
짐 풀고 옷 갈아입고 씻고… 루틴이지만 공간이 바뀌다 보니 모든 것이 더디었다. 더 늦게 자면 내일 망할 것 같아서, 첫날부터 망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건만, 내내 자다 깨다 하고도 일찍 눈이 떠졌다. 침실 밖에 있는 화장실은 왜 그렇게 자주 가고 싶은 건지. 여행 중에 화장실을 옆에 두고 가기를 게을리하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는 압박이 더 잠을 방해했다. 여행도 현실이다. 현실에 뭐든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여행할 때마다 다짐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 메모하기.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고 같은 다짐을 해 본다. 얼마나 지킬지... 두어 달 전 난생처음 마련한 돋보기. 없이 살만 한데, 여행준비 한다 눈을 혹사하다 보니 최근 더욱 의지하게 된다. 심지어 일기 쓰면서도 돋보기를 쓰다니... 핸드폰에 메모하는 것에 재미가 들려 자꾸 핸드폰에 손이 간다. 어디에든 잘 해 보자고. 지금까지 한 것이라고는 짐 풀고 하룻밤 잔 것 밖에 없지만, 어제 다비드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이 섬을 어떤 마음으로 한 달간 여행할지 가닥이 잡힌다. 믿고, 열고, 나누고, 먼저 인사하고, 먼저 말 붙이고, 스스럼없이 묻고,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 없이 청하고, 감사하고...
날이 밝아온다. 환기를 해볼까 싶다. 침대 옆 창을 열심히 연구해서 열었다. 가는 곳마다 창을 여닫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원리는 비슷해도 구조가 조금씩 다르다. 처음 창 앞에 서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공략해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감탄이 나온다. 누가 이런 방식을 고안했을까?
주변 건물들 위로 육중한 근육을 자랑하며 우뚝 솟은 마씨모 극장teatro massimo과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극장에서 가까운 곳인 건 알았지만 극장이 보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예상치도 않은 일출. 극장 왼쪽 너머로 막 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와, 시칠리아 첫날 아침에 일출을 보다니...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장소에서 일출을 보는 것에 대한 집단적 집착이 있지 않나 싶다. 킬리만자로에서 가이드 탓에 일출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해가 이미 다 떠있자, 집단 폭동(?) 일어날 뻔했었다. 아무튼 일출에 과한 의미를 부여한다 싶다. 뭐, 그래도 어쩌라고, 첫날 일출을 보니 좋은 기운인 것 같고 기분이 좋은 걸…^^
Buon giorno, Sicilia! Buon giorno, Palermo!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선물처럼 고맙다. 진정 여행이 시작됐구나. 오랜만의 홀로 여행이라 감회가 더더더 큰 것 같다. 좋은 여행을 기원해 준 친구들에게 팔레르모 일출 사진으로 안부를 전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아침 식사는 요청하면 방으로 가져다준다고 했다. 밥을 달라 했더니 커피와 우유, 크루아상, 레드 오렌지 주스, 요거트, 과일이 담긴 쟁반을 날라 준다. 모카 포트를 보니 이탈리아가 맞다.
그렇게 오고 싶던 시칠리아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니, 하하하. 창을 열면 마씨모 극장이 있고 붉은 기와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니, 하하하. 그동안 컴퓨터 화면으로 침 흘리며 보던 것들이 저 밖에 있다니, 하하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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