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오늘은 첫날이니 시차 적응하고 방위를 익히는 차원으로 산책하듯 동네를 배회하기로 했다. 심 카드 사고, 오페라와 인형극 예매한 후 볼거리 목록을 작성했더니 열 곳도 넘는다. 다 보겠다는 건 아니고 시간 되는 대로 볼 거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본심은 어떻게든 목록의 모든 걸 크로스아웃 할 기세다.
제일 급한 심 카드를 사러 가기로 했다. 이번에 마련한 화면 크고 저렴한 세컨드 휴대폰용 심 카드다. 유럽에서 휴대폰 도난사고는 도난사고 축에도 못 낄 만큼 빈번한데, 휴대폰을 늘 손에 들고 다녀야 할 처지라 이래저래 세컨드 휴대폰은 나쁜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한국 휴대폰은 내내 꺼둘 수 없어 로밍해서 가져왔다.
숙소 주변에 보다폰vodafone 대리점과 두 개의 팀tim 대리점이 있다. 어떤 여행 블로그를 보고 정한 곳이 있었지만 현지인은 어디를 추천할까 궁금하다. 다비드에게 물었더니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것 산 곳이라며 알려주는데, via cavour에 있는 tim 대리점이다. 가려던 곳이었다. ^^
다비드가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출입 문안을 아뢰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영 미덥지 않아 보여 그런지, 오늘 일정을 묻더니 종이 지도를 펴서 가겠다는 곳을 일일이 지도에 표시해 준다. 가겠다는 곳이 너무 많고 다비드도 모르는 곳도 있어 구글 지도를 찾아봐 가며... 한참 걸렸다. 이후로도 다비드는 내내 아침마다 일정을 물었고, 감상을 나눌 사람이 다비드 밖에 없는 나는 전날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비드에게 털어놨다. 그러며 며칠을 지내다 보니, 엄마인가 싶었다. ^^
숙소를 나와 팔레르모 거리에 첫 발을 내디뎠다. 와~ 시칠리아 땅이야. 팔레르모라고…… 치안에 대한 악평이 없었다면 10여 년 전에 진작에 왔었을 곳이었으니, 10여 년을 그리워하다 만난 셈이다. 거리는 어젯밤 상상력으로 그린 것과는 완전 다르다. 온도는 한국과 별다르지 않았지만, 기후가 다른 곳임을 보여주는 거대하고 우거진 가로수가 즐비하고 빈 틈에는 여지없이 오토바이나 차가 서있다. 번화한 거리는 차와 사람들로 분주하다. 조금 걸으니 마씨모 극장과 극장 앞 베르디 광장piazza giuseppe verdi이 보인다. 마씨모 극장. 광장의 야자수 때문에 더욱 이국적인 느낌이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분위기는 아니라도 적어도 날 해코지하겠다고 누군가 달려들 분위기는 아니다. 여행 안내서에 ‘시칠리아에 발을 내리는 순간 마피아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잊게 된다’고 쓰여있었다. 그 말에 완전 동의. 그러니까 숙소를 나와 경계경보를 다른 여행지 수준으로 낮추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시칠리아 사람들 눈에 마피아 소굴이라며 벌벌 떠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어이없어 보일까?
팀 대리점은 말만 듣고도 못 찾기가 더 어려운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곳을 뚝딱 찾아가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내게 쉬운 길 찾기는 없다. 다비드가 챙겨준 종이 지도가 있음에도 몇 번을 물어 대리점을 찾았다. 사실 찾았다기보다 길을 물었던 사람이 마침 대리점 사장님이라 그냥 따라갔다. ㅎㅎ
사장님은 외국인을 많이 상대해 봤는지 긴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25유로, 한 달, 전화 100분, 40기가’라고 종이에 적어 내밀며 100분은 국제전화이고, 이탈리아 내 통화는 무제한이라는 말만 더 했다. 내게 딱 맞는 서비스라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다. 여권 보여주고 돈 내니 나머지는 사장님이 이리저리 오가며 알아서 했다. 심 카드 끼워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 주고, 카드 같이 생긴 것에서 심 칩을 떼낸 자리 옆에 있는 번호가 전화번호라 알려주고 끝. 쿨~
일은 순조로웠는데 시간은 꽤 걸렸다. 어떤 할머니가 중간에 계속 사장님을 붙잡고 하소연을 해서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할머니가 들고 온 것은 유선전화 고지서였다. 서너 명의 직원을 붙잡고 계속 같은 이야기를 했다. 모두 돌아가며 그 문제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야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할머니는 굴하지 않았다. 순서도, 상대방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같은 말을 다시 다 들었고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그들은 할머니를 공손히 따뜻하게 대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짜증을 내거나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할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라는 말이 날 법도 한데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뭔가 다름이 느껴졌다. 이 상황을 전혀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사실 할머니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현상을 보일 뿐. 그들은 노화로 발생하는 일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당연하지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곳의 누구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눈이 휘둥그레져서 할머니와 직원들을 번갈아 보며 두리번거렸다.
P.S.
문자가 당연히 공짜일 것이라 생각하고 확인을 안 했는데 문자가 공짜가 아니었다. 투어 예약한 여행사로부터 문자를 받아 답장을 하려는데 안 돼서 대리점에 가서 알아보고 알게 된 사실이다. 문자를 쓰려면 최소 12유로를 충전해야 한다고 했다. 문자 몇 통 보내자고 그 돈을 쓰기는 아까워 충전하지 않았다. 다들 카톡 같은 whatsapp이라는 앱을 쓰니, 문자 대신 whatsapp을 써도 되지만, 그것도 몇 번 쓰자고 계정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안 썼다. 그냥 전화와 이메일로 해결하며 버텼다. 문자가 됐다면 한 20통 정도 썼을 것 같다. 문자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 심 카드 살 때 서비스 내용을 좀 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데이터 40기가는 너무 많다. 양껏 썼는데 10분의 1도 못 썼다. 국제 전화도 100분이나 할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