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폴리테아마 가리발디 극장teatro politeama garibaldi
극장 앞 대로를 사이에 두고 큰 광장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극장 바로 앞 루제로 세티모 광장piazza ruggero settimo과 길 건너편에 있는 카스텔누오보 광장piazza castelnuovo. 팔레르미타노(팔레르모 사람)들은 이 두 광장을 합쳐서 폴리테아마 광장이라고 한단다. 그들이 이 일대를 찾는 이유는 공연보다는 맛집이나 시외버스 때문이겠다 싶게 맛집도 많고 주요 버스들이 이곳을 지나간다. 내 관심사인 공항 행, 트라파니행, 세제스타 고고학 공원 행 버스도 그렇고 그들의 정류장은 모두 루제로 세티모 광장 북쪽 길가에 있다.
팔레르모 제2의 극장으로 꼽히는 폴리테아마 극장은 팔레르모 심포니 오케스트라Orchestra Sinfonica Siciliana의 본거지이고, 주로 클래식 음악 공연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름은 해수욕의 계절이지 실내에서 음악으로 따분함을 달랠 계절은 아닌지, 이곳도 공연 시즌이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이 아니었다면 관광객의 활동반경 밖에 있는 이곳까지 올 일은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극장을 당연히 못 봤을 거고, 그랬다면 여행 내내 시칠리아에 대한 느낌을 지배하던, 여행을 마친 지금도 변하지 않은, 시칠리아에 대한 나만의 관념은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
심 카드를 사고 트라파니행 버스 정류장을 미리 알아두려 폴리테아마 광장으로 향했다. 마께다 거리via maqueda와 이어진 루제로 세티모 거리via ruggero settimo를 따라 쭉 가기만 하면 되는데 종이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려니 쉽지 않다. 또 길을 몇 번을 물었다. 다비드의 성의를 생각해 종이 지도를 고수해 볼까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때부터 계속 휴대폰 지도를 보며 다녔는데, 가장 걱정하던, 휴대폰을 채 가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그럴 염려를 1도 안 하고 다녔다. 도난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도 내 휴대폰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늘 줄로 연결하고 다녔는데, 그건 나를 못 믿어서였다. 떨어뜨리거나 놓고 다닐까 봐.
광장에 도착하니 커다랗고, 뭔가 잔뜩 장식이 있지만 몇 년은 방치돼 보이는 낡은 극장이 있다. 입구는 개선문처럼 생겼고, 입구 꼭대기에는 누군가 전차를 몰며 뛰어다니는 청동 조각상이 있다. [아폴로와 에우테르페라고 한다. 에우테르페는 서정시와 음악을 주관하는 아홉 뮤즈 중 한 명이라고..] 폴리테아마 가리발디 극장이다. 마씨모 극장의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팔레르모 제2의 극장이라는데, 그렇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추레해 보인다. 사용 중인데 시즌이 아니라 닫혀있을 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지저분하고 엉망이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기로 했다. 겉 보기에는 허름해도 내부의 집기며 자재들이 놀랄 만큼 고급스러웠던 곳을 이탈리아에서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가끔 네가 사진작가니? 사진 찍으러 여행 온 거야?라고 스스로를 책망할 만큼 여행만 가면 사진 찍기에 열중하게 된다. 의도한 목적지는 아니었어도, 낡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해 보여도 여행 첫날 처음 만난 명소라 제법 시간을 들여 원형 구조의 극장을 돌며 성의껏 사진을 찍고 있는데... 순간 어떤 메시지가 들린다.
‘날 함부로 규정하지도 정의하지도 말라. 나는 내 방식대로 존재할 뿐이다.’
혹시 내 마음이 보여??? 갑자기 극장 꼭대기에 그렇게 쓰인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 같다.
극장 건물은 19세기말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건물은 특정 양식으로 규정되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예쁜 것, 좋은 것,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의 조합 같다. 첫눈에 그 조합은 창의적이거나 조화로워 보이기는커녕 누구의 취향이 이렇게 조잡하지 하는 의문을 일으켰는데, 그 메시지가 들린 순간부터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 의도된 것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누구도 함부로 규정하고 정의할 수 없고,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 이 극장이 그렇고, 시칠리아가 그렇고... 어떤 존재나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는 각성. 누군가가 삶에 지쳐 흔들리는 영혼을 각성시키려 이 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이곳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트라파니trapani행 버스는 '세제스타segesta'라는 버스회사가 운행한다. 도시에 터미널이 있어 모든 버스회사가 터미널을 공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버스 회사별로 제 각각 정류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루제로 세티모 광장 북쪽 길가에 세제스타라 쓰인 간판이 있는 사무실이 있다. 그곳이 트라파니행 버스 매표소다. 버스는 매표소 앞에서 타면 된다. 트라파니 가는 시간표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근처라는 세제스타segesta행 버스 정류장이 있다니 위치를 알아볼까 싶다. 세제스타는 버스회사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리스 신전이 있는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을 '세제스타'에 가는 버스 회사는 타란톨라tarantola. 트라파니에서 당일치기로 세제스타에 다녀올 생각이지만, 그래도 정류장 위치가 궁금하다.^^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었는데, 모두 버스회사 '세제스타'의 매표소를 알려준다. 아무리 세제스타 행 타란톨라tarantola 버스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들에게 관광객이 말하는 세제스타는 모두 세제스타 버스회사였다.
P.S. 그날은 결국 정류장을 못 찾았다. 괜한 집착으로 나중에 다시 찾아보니, 세제스타 매표소 근처에 있는 Hotel Politeama와 프라다 매장 경계에 tarantola라고 겸손하게 쓰인 표지판이 서있다. 혹시 누가 알아볼까 걱정이라도 한 걸까? ^^ 그곳을 최소 다섯 번은 훑었는데 눈에 띄지 않았었다. 시칠리아 버스 정류장 표지판은 절대 누구의 눈에도 잘 보이는 방식으로 있지 않다. 표준 같은 것은 없다. 기대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 그래도 자꾸(아마도 수십 번) 타다 보면 익숙해진다. 맥이 잡힌달까... ^^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가는데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다비드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든 엄청난 to-visit list가 있어 마음이 급하지만, 커피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쉬고 싶을 때 쉬려고 혼자 여행하는 거지 싶어, 눈에 띄는 바로 들어갔다. 그라니타와 카놀로가 보인다. 그라니타와 카놀로의 맛을 모르지 않고 둘 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카놀로는 죽을 것처럼 달아서, 그리니타는 찬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도 시칠리아에 왔는데, 일단 그라니타와 카놀로를 먹어야 예의고 정의지 싶어 커피 대신 레몬 그라니타와 보통 크기에 비하면 매우 작은 카놀로를 시켰다. 모두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레몬 그라니타는 녹으면 레모네이드가 되기에 녹기를 기다렸다 원샷... ^^ 하지만 카놀로는 다 먹으면 죽을 것 같아서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까 길을 물었던 모녀를 다시 만났다. 마치 아는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길 가다 인사하는 사람도 있고 어느새 동네 사람이 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