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하고 싶은 것에는 늘 해야 할 것이 딸려있다는 것... 그래서 다음 할 일은 인형극 시간표 알아보고 필요하면 예매하기.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려 했으나, 홈페이지가 페이스북으로 연결되며 뭐라 하는데, 페북 무식자인 데다 말도 설으니 도통 뭐라는지 알 수가 없어, 와서 알아보는 걸로 미뤄뒀었다.
시칠리아 인형극opera dei pupi은 이제 TV에 밀려 주로 어린이나 관광객이 찾는 장르가 되었지만, 오랜동안 매우 인기 있는 대중문화였다고 한다. 잘 만든 꼭두각시가 등장하는 제대로 된 인형극을 본고장에서 볼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라 꼭 보고 싶었다.
인형극 극장Teatro dei Pupi di Mimmo Cuticchio 들렀다 근처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되겠다 싶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니 거리가 매우 한산하다. 거리는 내려 꽂히는 뙤약볕 탓에 희끄무레한 황톳빛으로 보이고 열기에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극장을 찾아 걷다가 갑자기 너무 가기 싫어진다. 예약하는 걸 엄청 싫어하는 마음이 강아지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텅 빈 뒷골목의 스산함에 변덕을 부리나 보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여행인데, 생떼든 응석이든 뭐든 마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오늘 인형극을 볼 생각도 아니잖아... 그냥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박물관… 여행지에서 만나는 박물관은 때때로 계륵 같다. 박물관 컬렉션의 문제는 아니다. 늘 시간의 문제다. 일단 발을 들이면 빠뜨리지 말고 봐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해 느긋하게 즐기기가 되지 않는다. 시간은 없고 볼 것은 많고 역사적 문화적 소양도 모자라니 뭐가 뭔지 답답하고... 봤다 한들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텐데 시간 없는 와중에 꼭 봐야 할까 갈등하게 된다. 그래도 선택은 늘 관람이다. 티끌이라도 남는 게 있겠지. 그 티끌이 모여 언젠가는 태산이 되겠지.
이곳은 팔레르모에 하나밖에 없는 고고학 박물관이다. 뭘 잘 기억하지도 못하고 길 설고 말 설어 안 그래도 헷갈리는데, 한 장소에도 여러 이름이 있어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한다. 물론 알고 나면 별 것 아니지만, 모를 때는 안갯속 같다. 이곳도 그런 곳 중에 하나였다.
salinas museo archeologico palermo, museo archeologico regionale, museo antonino salinas 등등. 서로 다른 이름의 정체를 찾아보니 박물관의 역사가 나온다. 안토니노 살리나스antonino salinas는 고고학자로, 몇 십 년간 박물관장을 지내며 박물관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museo archelogico regionale는 시칠리아 주립 박물관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팔레르모 대학 박물관이었다,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가 (입구에 museo nazionale라 새겨져 있다), 현재는 시칠리아 주정부가 운영한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Museo Archeologico Regionale "Antonino Salinas"인데, antonino salinas가 워낙 상징적 인물이니 그의 이름이 들어간 애칭으로도 불리는 건가 보다.
박물관이 있는 장소 올리벨라 광장piazza olivella에도 역사가 숨어 있다. 올리벨라는 Confederazione dell'oratorio di San Filippo Neri라는 수도회가 17세기에 건설한 단지이름이었다고 한다. 박물관과 옆에 있는 교회Chiesa di Sant'Ignazio all'Olivella, 오라토리오Oratorio di Santa Caterina d'Alessandra 등이 단지에 속해 있었고. 정부가 많은 교회와 수도원 재산을 몰수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올리벨라도 그때 몰수해서 지금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것이란다. 이름이 실마리가 되어 흥미로운 역사가 줄줄이 딸려 나온다. 역사가 암호화되어 곳곳에 스며있다.
[팔레르모 석Pietra di Palermo: 기원전 2900년경 이집트 고왕국의 왕실 기록. 현재 남은 일곱 조각 중 가장 큰 큰 조각. 700년간 왕들과 왕국의 주요 행사가 기록돼있음; 마니아체 성에 있던 한 쌍의 양 중 한 마리(인터넷 사진)]
이 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주로 시칠리아 서쪽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한다고 한다. 시칠리아 귀족이나 수도원이 기부한 것, 시칠리아 전역에서 발굴한 것 등이란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발달했던 에트루리아 문명의 유물도 있는데, 토스카나 밖에 있는 컬렉션으로는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팔레르모 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집트 유물이 있는데, 이집트 고왕국 700년간의 왕들과 왕실 행사가 기록되어 있고, 현재 세상에 일곱 조각 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조각이란다.
페니키아 유물도 있고, 시라쿠자 마니아체 성Castello Maniace에 있었다는 로마시대 청동 양 조각도 있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컬렉션은 셀리눈테에서 발굴된 신전의 유물이란다. 거대한 메토프 조각들이 인상적인데, 실제 신전에 있었다면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 눈높이로 전시되어 있어 매우 잘 감상할 수 있다. 셀리눈테 신전 중에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된 신전 E의 모형도 있다.
시칠리아의 역사를 말할 때, 그리스가 빠지지 않는다. 사라쿠자, 셀리눈테, 아그리젠토 등이 그리스 식민 도시국가였던 시절에 남긴 그리스 유적이 시칠리아 곳곳에 있다. 심지어 아그리젠토의 콘코르디아concordia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보다 더 온전하다고 한다. 살리나스 고고학 박물관이 앞으로 방문할 고대 그리스 유적에 대한 예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안뜰이 있고 중앙에 분수가 있다. 분수 중앙에 고동을 부는 조각은 트리톤이란다. 다리가 멀쩡해서 진짜 트리톤이 맞나 싶지만 그렇다니 그러려니 한다. 16세기 것으로 노르만 궁전palazzo dei normani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분수 안에서 자라 몇 마리가 살고 있는데 어떤 유물보다 많은 관심을 받는다. 인간 아닌 생명체에 대한 무한 애정 아닐까 싶다. 이곳엔 안뜰이 두 개가 있다: 바깥쪽, 안쪽. 바깥쪽 안뜰 회랑에 석조 유물들이 쭉 전시되어 있다. 석관, 조각상, 비석 등등... 전시실은 안뜰을 중심으로 회랑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전시를 보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은 없을 것 같다. 가방에 아침에 먹다 남은 브리오쉬가 있는 게 생각나 안뜰 벤치에 앉아서 먹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안쪽 안뜰에서 먹으라고 안내해 준다. 바나나가 주렁주렁 달린 바나나 나무도 있고 제법 우거진 정원이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 여기저기 유물들이 놓여있다. 조용히 앉아서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공간이다. 언제나 그렇듯 유물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봤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그리스 신전에 알록달록 색이 입혀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도리스 양식 신전 메토프에 거대한 조각 장식이 있었다는 것도... 수없이 보며 지나쳤던 그리스 도자기가 붉은 바탕의 검은 인물 도자기, 검은 바탕의 붉은 인물 도자기 두 종류가 있다는 것도 새삼스레 알게 됐다. 티끌만큼의 소양이 늘긴 했다.
P.S. 박물관이 아니라도 시칠리아 도심 곳곳에서 천 년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쯤은 예사롭다. 일상과 역사가 별개가 아닌 곳을 볼 때, 나는 정체성 없는 신도시 주민 같다. 자연, 전통, 문화, 철학, 의식, 가치 등에 대해 그게 뭐야라고 할 것 같은… 생활의 편의와 물질적 풍요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같은... 예전에 집 이야기를 하던 중에 친구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너 촌스럽게 공기 그런 것 따져? 강남 터미널 인근 아파트로 재미를 본 친구다. 그 질문이 우리 시대의 다수가 터를 대하는 태도를 대변하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유구한 역사의 흔적이 남았을 리가... 카타니아 숙소에서 아침을 함께 먹게 된 캐나다 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들은 신대륙 출신임을 안타까워하며 너희는 오랜 역사가 있잖아 했었다. 맞아요, 우리에게 오랜 역사가 있다는 소릴 들어보긴 했어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일상에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의 후손임을 자각할 여지는? 없다.
[결과적으로 시칠리아 역사를 보고 싶다면 꼭 봐야 하는 박물관이었다. 봐야 하나 망설였는데, 이 박물관을 처음에 보고 시칠리아 일주를 한 건 두고두고 잘한 일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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