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베네치아에 갔을 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틴토레토라는 화가의 작품에 홀딱 빠졌었다.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 기온을 경신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어딘가 그의 그림이 있다면 땡볕을 불사하며 열심히 찾아다녔다.
이번 여행에서는 쟈꼬모 세르뽀따가 그랬다. 세르뽀따의 작품이 있다고 하면 그 건축물에 더 관심이 가고 보고 싶어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런데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보게 되고, 그 낯선 이름도 외우게 되고, 스타일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겠다 할 만큼 그가 관여한 건축물이 팔레르모에 워낙 많다.
쟈꼬모 세르뽀타giacomo serpotta(1659-1732)는 바로크 후기부터 로코코 시대에 시칠리아에서 활약한 스투코 조각가라고 한다. 당시 사조에 맞는 화려하고 극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그의 수투코 조각들이 잘 만들어낸 것 같다. 회반죽으로 찍어낸 아기, 소년, 소녀, 귀부인의 모습으로 당시 사조에 맞게 기독교를 형상화했다고 할까...
그가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데는 특별함이 있었단다. 회반죽에 대리석 가루를 넣어 그의 스투코 조각에서는 대리석 질감이 났고, 팔레르모 거리 청소년 등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았단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 그와 그의 가족이 장식한 공간은 주로 교회나 교회 부속 공간이었다. 특히 그의 수투코 조각으로 벽을 가득 메운 오라토리오라는 공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모든 것에 참견하고 장난치는 듯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오라토리오는 기도실, 작은 예배당이라고 하는데, 교회 관계자의 inner circle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팔레르모의 유명 오라토리오 중에 쟈코모 세르포타가 장식한 공간이 많다. 당시 건축주들이 그의 명성에 편승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르뽀따의 이름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팔레르모에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 세 오라토리오가 꼽힌다: 산타 치타Oratorio del SS. Rosario in Santa Cita, 산 로렌조Oratorio di San Lorenzo, 산 도메니코Oratorio del SS Rosario in San Domenico
P.S. 이날 세 개를 모두 보려다 두 개 밖에 못 보고, 한 달 후 다시 팔레르모로 돌아왔을 때 산 로렌조를 봤다. 그 사이에 세르포타의 작품을 많이도 봤고, 다른 볼 것도 많이 남아, 볼까 말까 망설였는데 보길 잘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시칠리아 전역에 남긴 작품이 매우 많아서 그의 스투코 장식을 아쉽지 않게 보게 되지만, 팔레르모에 있는 오라토리오 삼총사를 보면 그의 스타일의 변화가 보인다. 산타 치타, 산 로렌조, 산 도메니코의 순이다.
P.S. 카스텔부오노의 성castello di castelbuono 안에 있는 기도실cappella di santa anna도 그의 작품인데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고고학박물관을 나와 산타 치따 오라토리오로 갔다. 한적하고 허름한 뒷골목(?)을 걷는데 아무런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라토리오 입구는 산타 치타 교회Chiesa di Santa Cita 옆,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인상을 팍팍 풍기는 한 귀퉁이 쪽문이었다. 근처 어디에도 안내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길치가 찾아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곳이다 싶다. 구글 맵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못 찾아서 못 봤을 거다. 나중에 든 생각인데, 이런 것까지 자랑하자고 안내판을 붙이면 도시를 온통 표지판과 간판으로 뒤덮어야 할 판이라 불친절을 택했을 것 같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굳게 닫힌 문을 굳이 밀고 들어가니 작은 안뜰이 있고 2층 짜리 로지아loggia 양식 건물이 있다. 안뜰에 있는 나무줄기 밑동이 항아리 모양이다. 신기하고 예쁘다. [나중에 찾아보니 케이바 스페시오사(Ceiba speciosa)라는 이름의 나무. 밑동에 물을 저장하는 습성이 있단다.]
2층 오라토리오 입구 옆 회랑 벽에 이 오라토리오를 장식한 쟈꼬모 세르뽀따의 흉상이 있다. 건축주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헌사가 아닐까...
오라토리오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 새하얀 벽 위에 새하얀 스투코 조각이 빽빽하게 붙어있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짜잔~ 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다.
BBC에서 제작한 sicily unpacked라는 동영상을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약간 충격적이었을 것 같다. 하나하나는 바로크 건축물에서 흔히 보이는 스투코 장식인데, 공간 전체를 보면 이렇게 장식할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놀랍다. 종종 천국을 온통 하얗게 묘사한 걸 보긴 했지만, 실제 공간을 이렇게 채도나 명도의 변화조차 없는 한 색으로 장식한 건 처음 보지 싶다. 단순한데 파격적이라는 아이러니.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새로운, 낯선, 혁신적인 아이디어이지 않았을까... 왠지 파괴적이지 않은 탈피나 조화로운 저항으로 보인다. 이렇게 독특한 공간은 시칠리아에 밖에 없지 않을까... 잘 보존됐음에도 하얀 스투코 조각들에서 시간의 때가 보인다. 모두 대리석 조각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시절에는 얼마나 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을까 상상이 된다.
쟈꼬모 세르뽀따는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팔레르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 한 번도 시칠리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단다. 당대를 풍미하던 예술가로는 특이한 이력이란다. 넓은 세상에서 쌓은 많은 경험과 식견이 위대함을 탄생시키는 필요조건 같지만, 오롯이 한 사람에 내재된 재능과 창의력만으로도 대가가 되기에 충분할 수 있다는 증거 같다. 우물 안에 앉아서도 우주를 보는 사람은 본다는... ‘일반적으로 그렇다’를 ‘모두 그렇다’로 단정하는 오류를 너무 쉽게 범하며 살지 싶다.
이 오라토리오의 이름은 산타 치타 교회 안의 묵주 기도실이란 뜻이다. 제대를 등지고 보이는 세 벽은 묵주 기도의 세 신비를 표현한다고 한다. 왼쪽에는 고통의 신비, 정면에는 영광의 신비, 오른쪽에는 환희의 신비. 영광의 신비를 표현하는 정면 중앙에 레판토 해전(1571년) 장면이 있다. 이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 함대는 묵주의 성모마리아의 도움으로 오스만 제국을 물리쳤고, 이 사건은 아랍으로 상징되는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단다. 그래서 승전 기념일인 10월 7일을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레판토 해전 장면 바로 아래 두 어린 청년이 앉아 있고 그 사이에 사지가 없는 병사의 몸과 무기가 있다. 전쟁의 끔찍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묵주 기도실에 난데없이 레판토 해전 장면이 등장한 게 아닌 것이다.
이 오라토리오는 성로렌조에게 봉헌된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성프란체스코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공평하고 정의롭게 두 성인을 기리는 장소로. ^^
오라토리오 네 벽을 열 개의 조각상과 여덟 개 의 무대를 담아 놓은 듯한 액자(테아트리니)가 장식하고 있다. 조각상은 두 성인의 미덕을 의인화한 것이고, 테아트리니는 왼쪽 네 개는 성로렌조의 생애, 오른쪽 네 개는 성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사이좋게 담고 있단다. 뒷면 중앙에는 산 로렌조의 순교 장면이 있다. 그 밖에도 허전함을 느낄 공간은 없다. 자유롭게 공중을 나는 천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제단화는 카라바죠caravaggio가 두 성인이 동석한 가운데 예수가 탄생한 장면을 그린 작품 Natività con i santi Lorenzo e Francesco d'Assisi인데, 현재 걸려있는 것은 복제화라고 한다. 오리지널은 1969년에 도난당했는데, 마피아의 짓으로 추정되고, 아직도 미제 사건으로 FBI의 10대 예술품 범죄 목록에 올라있다고...
산도메니코 오라토리오도 산 도메니코 교회 Chiesa di San Domenico 부속 묵주 기도실이다. 기존 회화 장식 위주의 묵주 기도실에 세르포타가 스투코 장식을 더했다고 한다.
제단 위에는 로사리오의 성모와 산 도메니코, 팔레르모의 수호 성녀들을 그린 그림이 있다. 네덜란드 화가 반 다이크 Van Dyck가 팔레르모에 흑사병이 돌던 1624년에 그렸단다.
제단을 등지고 완쪽에는 고통의 신비를, 정면에는 영광의 신비를, 오른쪽에는 환희의 신비를 표현하는 그림이 걸려있다. 세르포타가 추가한 귀부인 형상의 조각상들은 묵주 기도의 열매 또는 미덕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한다.
P.S. 세르포타는 도마뱀 또는 작은 뱀이란 뜻이란다. 그래서 그는 자주 도마뱀 모습을 사인처럼 작품에 남겨놨다고 한다. 이곳에도 용기를 뜻하는 fortitudo의 기둥에 시칠리아에서 흔히 눈에 띄는 작은 도마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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