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02 팔레르모: 시칠리아 주립 미술관-아바텔리스 궁

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by anna





가리발디 정원 안에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나무를 그냥 담장 밖에서 슬쩍 보고, 부랴부랴 시칠리아 주립 미술관Galleria Regionale della Sicilia이 있는 아바텔리스 궁Palazzo Abatellis으로 향했다. 목표(?)의 반도 달성하지 못해서 한눈팔 틈이 없다.


아바텔리스 궁은 15세기, 항만장Maestro Portulano과 치안판사Pretor를 지냈던 캄마라타Cammarata 남작 프란체스코 아바텔리스Francesco Abatellis의 궁전으로 지어졌는데, 남작에게 후계가 없어 베네딕트 수도회에 기증되어 수 세기 동안 수녀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시칠리아 주정부로 넘어갔고,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10여 년에 걸쳐 원래 모습으로 복구됐다고. 오랜 세월 복구했다고는 하지만 정성껏 한 건 아닌지 급하게 시멘트를 발라 놓은 곳도 꽤 있다. 그 사이로 곳곳에서 흥미로운 요소가 보인다. 카탈란 고딕 스타일이라고 한다. 당시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아라곤 왕국의 영향이라고. 수도원 회랑처럼 안뜰이 있고 안뜰 가장자리에 2층으로 된 주랑이 있다. 다층 주랑을 로지아loggia라고 부른단다. 로지아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존재감 없는 가고일gargoyle이 있다. 중세 고딕 건축물에서는 흔하지만 시칠리아에서는 후기 카탈란 고딕 스타일의 건물에서만 종종 보인다고... 이곳도 고고학 박물관처럼 전시실이 안뜰을 중심으로 미음자로 배치되어 있다.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시칠리아 미술작품이 있고, 중세 미술 컬렉션으로는 시칠리아에서 최고로 꼽힌단다. 이 미술관의 must-see 작품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죽음의 승리’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라고. 이 미술관에서 이름이 익숙한 작가는 안토넬로 다 메시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피에트로 노벨리, 안토넬로 가지니 등등 시칠리아 작가들과 낯을 익히는 좋은 기회이지 싶다.




[오른쪽은 중세 말기 십자가들]
[Jan Gossaert의 Malvagna Triptych]
[왼쪽은 프란체스코 라우라나Francesco Laurana의 Eleonora d'Aragona.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딸; 가운데와 오른쪽은 안토넬로 가지니의 작품]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초상화. 산 아고스티노, 산 그레고리오 마뇨, 산 지롤라모 (인너넷 사진)]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Annunciata: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수태를 고지받은 마리아의 모습. 그녀의 오른쪽의 빛이 대천사의 잔광임을 암시하고, 앞에 펼쳐진 책은 당시 읽고 있었다던 구약성서라고. 초자연적 운명을 감지한 순간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음이 읽힌다.]



[죽음의 승리 Trionfo della Morte]
[죽음의 승리 (인터넷 사진)]


이 미술관의 자랑이 된 '죽음의 승리'는 스클라파니 궁전Palazzo Sclafani 중정에 있었다고 한다. 15세기 초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서 죽음의 승리를 그린 작품으로는 걸작으로 꼽히지만 작자 미상이다. 작자에 대해서는 그저 죽음의 승리 거장이라고만 알려져 있단다.


'죽음의 승리'는 14세기부터 널리 퍼진 전형적 도상iconography이었으나 이탈리아 작가들이 꺼리는 소재였다고 한다. 그래서 외국 예술가에게 의뢰됐을 것이고, 그래서 작가 미상의 그림이 되었을 거라는 설이 있단다.


가운데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유령 말을 타고 활을 쏘는 해골 궁사가 이 그림의 주인공인 죽음을 의미한단다. 아래쪽 중간 죽음의 활을 맞은 사람들은 왕과 고위 성직자, 귀부인 등이고, 왼쪽 무리는 가난한 사람들, 오른쪽 무리는 귀족들이란다. 죽음의 무차별적 공격에 스러진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죽음이 멈추기를 기원하지만, 오만한 귀족 무리는 그들에 무관심한 듯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현실을 풍자하기도 하고, 죽음의 평등함을 담기도 했다.


말로만 들어도 오싹한 이야기다. 그런데 심지어 그려져 있는데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예쁜 색조의 대명사 파스텔 톤. 곱고 예쁘다. 눈 뜨고 못 볼 끔찍했을 장면을 예쁘게 그렸다. 전혀 공포를 일으키지 않는다. 냉혹한 그림이지만 밝다. 주제를 모르고 멀리서 이 그림을 봤다면 거실에 걸면 예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언젠가 죽음에 지는 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다 알지만 죽음의 공포가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 그림의 밝음은 바로, 언제나 승리하는 죽음과 늘 함께하지만 그의 존재를 망각한 듯 삶을 향유하는 게 인간의 삶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의 화가들이 죽음의 승리를 그린다면 어떤 분위기로 표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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