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주립 미술관을 나와 종교재판 박물관Museo dell'Inquisizione에 갈까 미르토 궁전 박물관Museo Palazzo Mirto에 갈까 고민하다 미르토 궁으로 먼저 갔다. 종교재판 박물관이 1시간 늦게 닫으니, 미르토 궁을 보고 나서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미르토 궁은 시칠리아 귀족 생활공간으로는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란다. 건물의 유서는 훨씬 더 깊지만, 시칠리아의 유력 가문이었던 미르토 공작 필란제리 집안이 17세기 초부터 1982년까지 거주하다 주정부에 기증했단다. 18,19세기 시칠리아 귀족의 생활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평도 좋고 시칠리아에 왔으니 귀족 가문의 궁전 하나는 봐야지 싶어 왔는데 시간이 별로 없다. 1시간. 매표소 직원에게 볼 것이 많으냐고 물으니, 보기 나름이란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의미 없는 걸 알면서도 하게 된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내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달라는 거다. ^^
투명 파일 홀더에 넣은 안내문을 준다. 돌려 쓰는 것이니 나갈 때 돌려주고 가야 한다. 공간은 넓고 시간은 없다. 시계를 봐가며 달리듯이 한 바퀴 훑었다. 그런데 이 궁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 같은 바로크 스타일 분수는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건지, 뛰다시피 했어도 안내문을 보며 구석구석 살폈는데, 보이지 않았고, 미스터리로 남았다.
어딜 가든 궁전이 있으면 보기는 하는데 별 감흥이 없다. 내 취향이 아닌 가구, 샹들리에, 벽과 천장 장식, 온갖 장식품과 집기들. 취향에 맞지 않는 물건은 가치와 상관없이 잡동사니일 뿐이다. 그냥 들어와 살라고 해도 됐다고 할 것 같다. 결코 미니멀리스트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신 사나워서 악몽에 시달릴 것 같은 느낌. 그럼에도 꼭 본다. ^^
이 궁에 대한 한 줄 평은 정신 사납다. 그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공간을 즐겼을까? 문뜩, 아닐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지배하고 군림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가끔, 아니, 가끔 보다는 자주 위엄 없어 보이는 겉모습으로 판단되어, 막 대해도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가끔 이건 아니지 싶다. 그러면 상황에 따라 당신이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사람이 아님을 적절히(?) 보여준다. 그러면 태도가 금방 달라지는 게 보인다. 대부분은 잡동사니라고 표현하고 싶은 온갖 물건에 파묻힌 모습은 계급 사회에서 그렇게 과시해야 계급에 합당한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강박의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궁을 나오는데 매표소 직원이 뭐라고 이탈리아 말로 말을 건다. 다시 물어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그래서 미안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고 뒤돌아 가는데 몇 걸음 걸으니, ti è piaciuto?라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가서 그렇게 말한 것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랬단다. 그래서 mi è piaciuto molto라고 해주고 나왔다. 좋았느냐고 물었던 거라, 엄청 좋았다고 대답한 거다. 이런 순간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을 난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시칠리아에 가는 행운을 만난다면 난 다시 그곳에 가서 바로크 분수도 찾아 미스터리도 풀고, 이건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건 저래서 마음에 안 들고 도대체 왜 이러고 살았던 거야 구시렁대며 찬찬히 여유있게 그곳을 돌아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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