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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크다스 Jan 02. 2021

다이애나의 초콜릿 푸딩

달콤하지 않은 현실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





공주님과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의 끝은 대부분 이렇게 끝났었다. 조금만 커도 현실에는 백마 탄 왕자도 없고 결혼도 행복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판타지를 안고 살아간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가 유치해도, 잘난 남자가 불쌍한 여자를 구해주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느새 이야기에 흠뻑 몰입하는 걸 보면 이런 식의 해피 엔딩이 많은 여자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동화 속 신데렐라가 현실에 나타났다면? 찰스 왕세자의 스캔들이 알려지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비추어졌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존재는 어른 여자아이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었던 판타지를 일깨우기 충분했다. 대중은 책 속에서 나와 살아 숨 쉬는 공주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The Crown Season 4 | Official Trailer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 시즌 4에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는 예고편을 보고 나 또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현실판 공주님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 이전 시즌에서 보여준 탁월한 심리 묘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고작 드라마 하나 기다리는 설렘도 이렇게 즐거운데, 왕세자와의 결혼식을 기다리는 다이애나의 설렘은 어느 정도였을까. 높이를 모르고 솟구치던 설렘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상실감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왕세자비 교육을 받기 위해 버킹엄 궁으로 이사하며 들뜬 기분도 잠시, 혼자만 모르는 궁의 엄격한 예절은 숨 막히고, 모든 사람들은 차갑기만 하다. 해외 순방을 떠난 왕세자는 연락도 안되는데, 전여친인 카밀라에게 줄 팔찌 선물을 비서실에서 준비하고 있다.


출처 : The Crown Season 4 | Official Trailer


다이애나는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한밤 중에 남들 몰래 초콜릿 푸딩(케이크인지 무스인지 모를)으로 혼자 삼켜보려 하지만 섭식 장애로 인해 토해내고 만다. 찰스 없이 카밀라와 만난 자리에서도 끼어들 틈 없는 둘만의 오래되고 사적인 친밀감을 확인하고는 달콤한 디저트로 소외감을 삼켜보지만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스로 폭발하기 직전에 디저트를 입 안에 욱여넣는 다이애나는 큰 결심을 하고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길티 플레저란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행동을 말하는데, 그녀에게 길티 플레저란 자신에게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휘둘리지 않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녀에게 위를 채웠다는 정신적 안도감을 주는 음식이 디저트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 크라운이 폭식 장면을 디저트로 연출한 건 그만큼 '스트레스받을 때는 달콤한 것을 찾게 된다'는 공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에 달콤한 디저트가 없었다면 우리의 하루는 지금보다는 덜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날, 나는 사무실을 잠깐 나가 초콜릿 푸딩이나 초콜릿 우유를 사 온다. 자리에 계속 앉아 있으면 끓어오르는 내 감정에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위험한 나를 아무도 없는 안전한 곳으로 유인해서 일단 달콤한 한 입을 먹이고 나면 데일 것처럼 뜨거웠던 감정을 서서히 식힐 수 있다.


디저트가 세상을 구할 순 없어도 동화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은 현실에서 나 스스로를 구하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출처 : The Crown Season 4 | Official Trailer


동화에서 아름다운 순간은 왕자의 키스도, 청혼도 아니다. 진실되게 살아가려 노력했던 신데렐라,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설공주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요정의 드레스와 호박 마차, 일곱 난쟁이의 도움은 그녀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낸 결과로 받게 된 선물이 아닐까?


다이애나도 수동적으로 왕자님을 기다린 공주가 아니었다. 집안 배경과 운이 그녀를 왕세자비의 자리로 안내한 것도 맞지만 드라마의 묘사에 따르면 집안의 결정에 끌려간 찰스와 달리 다이애나는 스스로 왕세자비가 되기를 선택했다.


결혼 후 왕세자의 마음은 다른 여자에게 향했지만 그 대신 국민과 언론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세자비가 아니어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을 때 이혼을 선언했다. (이건 시즌 5,6에서 다룰 듯 한데 몹시 기대된다.)


출처 : The Crown Season 4 | Official Trailer


수없이 마음을 어지럽혔을 혼돈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꽃피울 수 있게 해 준 건 진실되고 치열한 삶의 과정이었다. 달콤한 초콜릿은 쌉쌀한 카카오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사랑의 힘은 물론 세다. 하지만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랑 안에서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문제가 많다. 다이애나와 찰스의 결혼식 주례사는 동화에 빗대어 냉정한 현실을 말해준다.


"동화는 이런 요소로 지어집니다. 왕자와 공주가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요. 그러나 대부분의 동화는 이 시점에서 끝나죠.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한 문장과 함께. 이는 동화에서 결혼 생활을 구애의 낭만이라는 절정을 지난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부부가 자신의 서약을 수행할 때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며 삶의 찬란함과 비참함을 나누고 성공과 실패를 함께 겪으며 두 사람은 변화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신념은 결혼식을 도착점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식은 진정한 모험을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나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너무 외롭고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면 달콤한 초콜릿 푸딩이 가끔 함께 있어줘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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