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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 김선생님 Mar 15. 2024

엄마한테서 배웠어요

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11화  간장닭조림






[ 오늘의 반찬 ] 

[사람]한테서


 간장닭조림을 엄마한테서 배웠습니다.     

 생일에 동생한테서 선물을 받았어요. 선물은 예쁜 그릇이에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하지만 외국인 학생들한테서 한국어를 배워요.





  결혼식을 올린 지도 벌써 이 년을 꼬박 채우고 사 개월이 더 흘렀다. 그동안 남편과 함께 수백 번의 밥상을 차려 먹었다. 거실 창을 채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즐겁게 따뜻하던 날. 곁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그냥 궁금해져서.



  “오빠, 있잖아.”


  “응 좋아!”



  또 저런다, 또.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남편은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좋아!’라거나 ‘안 돼!’라고 답한다. 제 딴에는 장난을 치는 거다. 물론 이 정도는 남편이 평소에 하는 장난의 십 퍼센트 수준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팔 년 전 이맘때쯤 처음 만났다. 원피스 위로 가볍게 걸쳐 입은 카디건의 얇은 섬유 사이로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스미던 날이었다. 원목 가구를 사용해 차분한 분위기가 풍기던 작은 레스토랑도 좋았고, 식사를 하는 내내 수줍고 따뜻하게 웃으면서도 잔잔함을 잃지 않던 그날의 그 남자도 더없이 좋았다.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던 그 남자는 하루라도 아내를 시끄럽게 놀리지 않으면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장난꾸러기로 변해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옆에서 눈치를 슬쩍 보며 들을 준비를 한다. 한번 입술을 찌그러뜨리는 것으로 빠르게 불만 표현을 한 뒤 물었다. 어쨌든 궁금하니까.



  “있잖아. 내가 지금까지 해준 음식들 중에서 뭐가 제일 맛있었어?”



  사실 물어보나 마나 대답은 ‘제육볶음!’ 또는 ‘전부 다!’로 정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눈동자를 천장으로 향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긴장하며 그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한참 만에 의외의 음식 이름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간장닭조림!”



  생각지도 못한 수상작에 나도 모르게 조금 전의 남편처럼 눈동자를 천장으로 향하게 된다. 하얀 천장에 어느 영화의 회상 장면처럼, 잊고 있던 언젠가의 기억이 속도감 있게 스쳐 지나간다.     




  “너는 ‘엄마 음식’하면 제일 먼저 뭐가 떠올라?”



  거실 소파에 여자 두 명이 앉아 있다. 한 명은 교복을 입은 나, 다른 한 명은 지금보다 꽤 젊은 얼굴의 엄마다. 텔레비전에는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엄마 음식에 대해 저마다 떠들고 있다. 나는 지루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그러뜨리고서 ‘몰라’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다시 묻는다. 말의 높낮이가 이리저리 널뛰어 꼭 노래하는 것 같다.



  “아, 왜애. 하나만 말해 주라아.”



  에휴, 귀찮게 정말. 맥없이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한다. 엄마 음식. 엄마의 음식. 엄마가 해준 음식……. 엄마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고 자랐으면서 정작 하나를 꼽으라니 곧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으음, 내가 좋아하는 당면을 잔뜩 넣은 엄마표 김치찌개. 참기름 냄새가 캄캄하게 고소했던 소고기미역국.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 있던 삼촌이 개발했다는, 고추참치와 스위트콘을 넣어 만든 스파게티. 갑자기 군침이 돈다. 흠, 그중에서도 하나만 뽑으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제일 맛있는 걸 말해야 할 텐데……. 아아, 맞다!



  “간장닭조림!”     




  다시 오늘. 햇빛을 받아 눈을 찡그리는 저 장난꾸러기에게 교복 입은 내 옛날이 잠시 겹쳐 보인다. 거울을 보고 싶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도 훨씬 젊지만, 우리도 좀 닮았으려나?



  좋아, 오늘 점심은 간장닭조림이다.       



   





  엄마는 간장닭조림을 만들 때 늘 닭볶음탕용으로 조각조각 잘린 닭고기를 쓰셨다. 식구가 많으니 한 마리는 적었고 두 마리도 거뜬했다. 퍼석한 가슴살을 싫어하는 나는 부드러운 다리살이나 날개살 위주로만 얄밉게 여러 개 골라 먹었다. 닭가슴살을 좋아하는 둘째 동생과는 평화로운 수저질을 할 수 있었지만 나와 같은 입맛인 막냇동생과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다리살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다. 가끔은 닭날개 부위로만 만든 닭조림이 상에 올라왔는데, 그때는 둘째 동생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남편도 나처럼 닭가슴살을 싫어한다. 서로의 닭고기 취향에 대해 공표한 적은 없지만, 중량 대비 가격이 저렴한 닭볶음탕용 닭으로 요리했더니 식사 후 그릇에 가슴살 부위만 고스란히 남아 자연히 알게 되었다. 닭고기 때문에 부부싸움 한 이야기 같은 걸 만들고 싶지는 않기에 값이 좀 비싸더라도 순살 닭다리살을 고집하고 있다. 둘이 먹을 거니까 오백 그램이면 충분하다.     




  냄비나 웍에 닭다리살을 최대한 서로 포개지지 않도록 담는다. 감자도 두 개 큼직하게 썰어서 넣는다. 감자칼로 감자 껍질을 슥슥 밀다 보면 꼭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발소의 사장님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멀뚱멀뚱 눈치만 보고 있는 닭고기와 감자 위로 양념을 하나하나 흩뿌린다. 밥숟가락 기준으로 간장 다섯 숟가락, 식초 세 숟가락, 설탕 두 숟가락 반을 넣는다. 양념이 들어가는 요리를 할 때 보통은 미리 소스볼에 여러 재료를 섞어 두고 한번에 넣지만, 간장닭조림만큼은 그냥 하나하나 되는 대로 뿌린다. 엄마가 항상 그렇게 해오셔서 나도 그대로 따라 하는 거다. 그렇게 양념을 고루 쳐둔 후 10분에서 20분 정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당면을 물에 불린다. 당면은 어느 정도 도톰한 두께여야 식감이 산다.



  불을 켠다. 중불보다 조금 센 세기에 둔다. 3분쯤 지나면 양념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불을 얼른 약하게 줄이고서 20분 동안 푸근히 익힌다. 심심하면 중간에 한 번쯤 닭을 뒤집어 줘도 좋다. 달이듯이 가만가만 조린다. 흐르는 물에 청양고추를 하나 씻어서 비뚤게 썰어 놓는다. 20분이 지나고 닭이 꽤 익었다 싶으면 썰어 둔 청양고추를 넣고 불의 세기를 높인다. 볶음 주걱으로 10분 정도 더 볶아준다. 혹시나 색이 너무 여릴 경우에는 노추를 아주 조금 추가하면 대번에 진진한 간장 조림의 빛깔이 나타난다. 불을 끄기 3분 전, 미리 불려 놓은 당면과 밀떡 한 줌을 넣고 열 번 정도 휘휘 볶는다.     




  찬장을 열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릇들을 꼼꼼히 훑는다. 그릇을 잘 고르면 대충 만든 음식도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그릇을 잘못 택하면 정성 들여 만든 요리일지라도 만족도가 끔찍하게 하락할 수 있다. 가만 보자, 무슨 그릇을 내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나나……. 남편한테서 배운 입버릇을 웅얼대며 그릇을 몇 개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남편은 아마 어머님께 배운 말일 것이다.



  매끈하고 큼직한 그릇이 하나 손에 잡힌다. 작년 생일에 동생이 준 그릇 중 하나다. 꽤 널찍하고 폭이 깊은 타원형이라 2인분을 담기에 딱 알맞아 보인다. 앙그러지게 담아낸 조림에 볶은 통깨와 검은깨를 뿌린다.



    

  닭고기를 한 덩이 들어 주저 없이 입안으로 가져간다. 짭짜름한 간장과 달짝한 설탕이 녹아든 양념 소스. 닭껍질의 윤기가 가세해 더더욱 진득하다. 쫀쫀하고 부드러운 다리살에도 포슬포슬한 감자에도 속까지 양념이 살금살금 배어 있다. 매끈매끈한 당면을 입술로 빨아들이면 매콤한 청양고추의 향도 살짝 느낄 수 있다. 이따금 앞니로 밀떡을 베어 먹을 때 동반되는 차진 식감에 입이 한결 즐거워진다.     




  우리 엄마는 정말 순진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딱 이렇다. 때때로 화를 내면 시끄럽고 무서우니 결코 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백 번 다시 생각해도 순진한 건 맞다. 누구나 티 없이 선한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선함의 힘을 믿으며 살아온 분이다. 누구에게나 더러운 본성이 있으므로 인간은 아무도 진심으로 믿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며 살아온 나와는 정반대다. 그래서인지 자라는 동안 엄마한테서 이런 말을 종종 들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한숨을 포오 내쉬며 하시던 말씀.



  “나는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가치관도 취향도 믿음도 상극처럼 다른 모녀지간이어서일까. 머리가 좀 큰 사춘기에 접어들자 엄마한테서 배운 게 진짜 하나도 없다는 말로 상처를 주며 오만하게 코를 세웠다.     




  남편은 연신 닭고기를 집어먹으며 말한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조림을 잘 하냐고. 다른 것도 다 맛있지만 조림을 특히 더 맛있게 잘 하는 것 같다고. 엄마한테서 배운 거야, 라고 답하며 괜스레 웃음지어 보이는데 입이 쓰다. 할 말이 없어서 나도 닭조림이나 하나 더 집어 먹는다. 참 맛있다. 그리고 참 창피하다.   



       





  우리 학생들은 ‘한테’와 ‘한테서’를 하나의 수학 공식처럼 달달 외운다. ‘[사람]한테 주다/쓰다/보내다/말하다/가르치다’, ‘[사람]한테서 받다/듣다/배우다’로 통째로 암기한다. ‘한테서’를 가르치는 날에는 교실에 작은 선물 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간다. 펜이나 한국어 책처럼 언제나 교실에 있는 물건을 이용해도 충분하지만, 평소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물건이 눈앞에 등장하면 학생들의 집중력이 더 빠르고 확실하게 꽂혀서이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에요.”



  동그란 눈이 귀여운 우리반 중국 여학생에게 다가가 상자를 건넸다.



  “선생님이 선물을 주다, 줍니다. 줘요. 선생님이 누구, 선물을 줘요?”


  “선생님이 루루 씨, 선물을 줘요.”


  “네. 선생님이 루루 씨한테 선물을 줘요.”



  이번에는 몸의 방향을 학생과 동일하게 맞추었다. 그리고 받아오는 손동작을 크게 취했다.



  “그러면 루루 씨는? 받다, 받습니다. 받아요. 루루 씨가 무엇을 받아요?”


  “선물을 받아요.”


  “루루 씨가 누구, 선물을 받아요?”


  “루루 씨가 선생님, 선물을 받아요.”


  “네. 루루 씨가 선생님한테서 선물을 받아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복잡할 수도 있는 구조이지만 눈앞에서 크게 크게 주고받는 동작을 취한 덕분에 직관적으로 잘 이해한 모양이다. 이어지는 연습 시간. ‘주다-받다’, ‘말하다-듣다’ 등의 기본적인 단어들은 배운 구조를 활용해 금방금방 말한다. 그런데 ‘가르치다-배우다’만 사용하면 실수가 자주 나왔다. 아마 단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집에 가서도 복습할 수 있도록 문장을 쓰는 간단한 숙제를 내줬다. 다음 시간에 숙제를 걷고 확인하는데, 어김없이 같은 부분에서 또 실수가 보였다.     




  선생님이 학생한테서 한국어를 배웁니다.     




  싱겁게 피식 웃으며 평소처럼 파란색 볼펜으로 틀린 부분을 슥 표시하려는데, 갑자기 손가락이 멈칫 선다. 문장을 다시 읽어 본다. 또 한 번 찬찬히 읽는다. 다시, 다시, 그리고 다시.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분명히 틀린 문장인데 아무리 봐도 틀린 부분이 없다.     




  나는 한국어 선생님이다. 학생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친다. 그럼 내가 말하는 한국어는 누구한테서 온 것일까?



  소리 하나하나를 옹알이로 따라하며 엄마한테서, 아빠한테서 한국어를 배웠을 것이다. 자라면서는 친구한테서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많이 배웠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대학원을 연이어 다니는 동안에는 한국어를 조각내고 헤집으며 학교 선생님한테서, 동기한테서, 교수님한테서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학생들한테서 다시 처음부터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외국인 학생들이 말하고 쓰는 단순하고 불완전한 문장들. 나는 그 안에 잠시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틀렸다고, 아니라고,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빨간 펜으로 쫘악 빗금을 긋기 전에 잠깐 그 문장에 누워 등을 붙여 본다. 이상한 말과 희한한 말 사이에 난 공간에 잠시 머리를 기대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따사로운 햇살도 비추고 선선한 저녁 바람도 분다. 늘 곁에 있었지만 한국인이라서 당연하게 지나쳤던 것들 말이다.




  그렇게 잠깐 쉬다 보면 운이 좋은 날엔 서울에선 보기 어려운 제비꽃이나 방울꽃 같은 보물들을 발견할 때도 있다. 학생들한테서 그런 선물 상자를 받은 날이면 종일 우리말이 낯선 외국어처럼 느껴진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그들의 불완전하고 희한한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를 아기 옹알이처럼 따라해 본다. 그 순간 우리의 역할은 뒤바뀌는 것이다. 학생은 선생님한테 한국어를 가르치고, 선생님은 학생한테서 한국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동생한테서 받은 그릇에 엄마한테서 배운 간장닭조림이 담겨 있다.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오늘 점심의 식탁 풍경도, 내가 쓰는 언어도 모두 다른 누군가로부터 온 것들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오롯이 나 하나만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무언가. 있기는 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 닭조림 하나만 봐도 알게 되는 세상 이치를 그간 모르고 살았다. 건방지게 살았다. 엄마한테서 그렇게 배우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엄마한테서 간장닭조림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 엄마는 보통 계량 없이 그때그때의 감으로 양념 비율을 맞춰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인지 엄마한테 음식 레시피를 물을 때 한 번도 명확한 답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엄마가 간장닭조림만큼은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양념 비율을 나누어서 알려 주셨다. 엄마는 누구한테서 간장닭조림을 배웠을까? 아마 외할머니일 것이다. 외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끝내주게 좋으시니까.



  엄마가 종종 말씀하셨다. 분명히 외할머니한테서 배운 그대로 요리를 하는데 외할머니께서 내신 그 맛에 왜 미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엄마한테서 배운 그대로 간장닭조림을 만드는데 이상하게 어릴 때 먹던 그 맛에는 조금 못 미치는 듯한 느낌이다. 맛있는 닭다리살로만 만들었는데 왜 더 맛있지 않은 걸까? 공연히 심술이 난다.



  다음번에 간장닭조림을 만들 때는 닭볶음탕용 고기를 사올 테다. 남편이랑 불꽃 튀는 닭다리 쟁탈전을 펼치다 보면 엄마, 아니 외할머니의 간장닭조림보다 더 맛있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괜히 민망스럽고 심술 나서 이러는 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오빠, 우리 다음번에 간장닭조림 만들 땐,”


  “좋아!”



  남편한테서 좋다는 대답도 들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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