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리하는 김선생님 Mar 07. 2024

양파는 넣지 마세요. 쪽파를 넣으세요

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7화  삼겹살간장조림






[ 오늘의 반찬 ] 

V(동사)(으)세요   V(동사)지 마세요


 삼겹살간장조림에 양파는 넣지 마세요. 쪽파를 넣으세요.     

 우리 반 친구들을 항상 사랑하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




  한국어 선생님이 요리를 좋아하면 큰 이점이 있다. 다른 직업에 비해 평일 저녁이 여유로운 편이라 요리를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전 수업만 할 경우에는 오후 한 시면 수업이 모두 끝난다. 나는 보통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에 강사실에서 일주일 치 프린트를 모두 해놓는다. 그렇게 하면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경우 한 시 삼십 분 전으로 퇴근할 수 있다. 집에 도착하면 침대에 누워 책도 보고 유튜브도 실컷 보다가 대여섯 시쯤부터 여유 있게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 당장 몇 달 앞의 미래도 자신할 수 없는 불안정한 직업이지만, 여유롭게 저녁을 준비해 놓고 퇴근하는 남편에게 오늘의 식탁을 자랑할 때만큼은 직업 만족도가 최상이다.



  그렇지만 오전이 아닌 오후 수업을 맡은 학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서둘러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도 일곱 시가 넘는다. 조리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메뉴는 시작하기가 어려운 시각이다. 몇 달 전부터 건강을 위해 평일 저녁은 샐러드를 먹고 있어서 큰 상관은 없으나, 종일 정신없이 바빠 뱃속도 마음속도 뭔가 허한 날이라면 남편도 나도 샐러드로는 만족이 안 된다. 그런 날엔 역시, 빠르게 준비되는 것에 비해 배도 든든하고 입도 만족스러운 고기 요리가 제일이다.     




  퇴근길. 발걸음을 재촉한다. 집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단골 정육점에 들어서서 사장님과 인사를 나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음…… 삼겹살 주세요. 한 500그램 정도요.”


  “뭐 하실 거예요?”



  무슨 고기를 주문하든 정육점 사장님들은 뭘 만들어 먹을 계획이냐고 으레 묻는다. 아마 고기의 두께나 썰어 내는 방향 같은 걸 결정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간장 넣고 조림 하려고요.”


  “아하, 맛있겠네요.”


  “한입 크기로 썰어 주세요.”


  “예에, 잠깐만요.”



  사장님은 한번 슬며시 웃고서는 삼겹살을 몇 줄 내와 힘있게, 그리고 주저없이 썬다. 다 썬 고기를 저울 위에 올린다. 500그램이 살짝 넘는다.



  “좀 넘네요. 괜찮으시죠?”


  “네네, 그럼요.”



  정량보다 적다면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겠지만, 조금 넘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따가 한입 더 먹으면 되는걸. 잠시 후 꼼꼼히 포장된 상태의 고기가 날 향해 다가온다. 감사를 표하며 카드를 내민다. 카드를 막 돌려받고 돌아서려 하는데 사장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양파 넣고 조려 드세요. 맛있어요.”



  밝은 웃음으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문을 열고 돌아선 다음 속으로만 중얼댄다.



  싫어요.          









  “얘는 ‘엄마’, ‘아빠’ 다음으로 한 말이 ‘싫어’야.”



  친정 식구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호불호가 강한 내 성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려서부터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가 화두에 오를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주 들어온 이야기다. 아기 때의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엄마’, 그리고 곧이어 ‘아빠’를 말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할 귀중한 말 세 번째가 무얼까 하고 부모님께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셨겠지만 원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은 법이다.



  “우리 밥 먹자.”


  “시어!”


  “이거 입을래?”


  “시어!”



  진짜 싫어서 싫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어떤 질문을 받든 ‘시어!’부터 말하고 그다음에 할지 말지 생각해봤다고 하더라.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에 부모님 주장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도 엄마도 아빠도 외할머니도 모두 똑같은 말씀을 하시니 분명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내게 묻는다. 너 그때 왜 그랬니? 대답해 드리고 싶지만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늘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훨씬 많은 아이였다. 취미도 별로 없었고 친구도 제 입맛에 맞는 친구들로만 가려 사귀었다. 독서 편식도 음식 편식도 지독했다. 그래도 사회화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지, 서른 줄에 접어들고서부터는 싫어하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싫어하는 것들이 여전히 무지하게 많지만 다행인 건 매년 그 숫자가 한두 개씩은 줄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불호’의 대상에서 단 1밀리미터도 벗어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양파 같은 놈들이다.



  사람들은 대체 왜 양파를 좋아하는 걸까?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우선 그 생김새부터 마음에 안 든다. 겹겹이 싸인 반투명한 백색의 무언가. 조리하지 않고 먹으면 너무 맵고, 익히면 흐물거리고 축축해서 싫다. 입에 넣고 씹으면 빗금처럼 그어져 있는 양파의 결대로 부스러지며 단맛이 나는데, 이 단맛이 제일 기분 나쁘다. 산뜻하거나 포근한 단맛이 아니라 좀 오래되고 축축한 단맛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다른 어느 재료와 섞여 있더라도 단번에 눈썹을 찡그리며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별로다.



  끔찍하게 양파를 싫어하는 내게 양파 좀 먹여 보려고, 엄마는 카레를 만들 때마다 양파를 거의 갈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게 다져 넣으셨다.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엄마 아빠 다음으로 싫어를 외친 딸내미는 한 입 먹고 바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수저를 내려놓았고 말이다.      










  고기 조림과 양파는 언제나 팔짱을 끼고 찰싹 붙어 있는 단짝 같은 존재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만큼은 양파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손바닥 하나, 아니 손톱 하나만큼도 허용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집 대문에 ‘양파 출입 금지’를, 냉장고 문에는 ‘경고: 양파 진짜 출입 금지’ 문구를 붙여 놓고 싶다.



  오늘의 메뉴는 삼겹살간장조림. 양념 소스를 제외한 신선 재료는 막 사온 삼겹살과 쪽파, 청양고추가 전부다. 양파가 허락되지 않은 우리 집 주방에서는 양파 대신 쪽파와 대파가 많은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굳이 양파를 넣지 않더라도, 파의 하얀 부분만으로 요리의 느끼함을 잡아줄 수 있다. 양파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느끼함을 잡는 것만으로는 조금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양파의 단맛이 제외된 깔끔한 맛을 좋아한다면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 쪽파와 청양고추를 미리 씻고, 쪽파는 5센티미터 길이로, 청양고추도 어슷 썰어 둔다. 쪽파를 두 줄기 정도 따로 뽑아 푸른 잎 부분만 얇게 쫑쫑 썰어서 도마 한켠에 모은다.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삼겹살 500그램 중에서 반절만 사용하기로 한다. 삼겹살간장조림은 삼겹살의 지방기와 함께 쫀득하게 조려진 간장 소스가 매력이지만, 만든 직후에 바로 먹지 않으면 기름이 굳어 맛이 떨어진다. 양이 좀 아쉽더라도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한 끼에 다 먹을 수 있는 양만 사용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 남은 삼겹살로는 다음 끼니에 제육볶음을 만들어도 좋고 간단히 구워 소금이나 쌈장에 찍어 먹기만 해도 맛있으니까.



  납작한 프라이팬을 달구고 삼겹살을 올린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구워진다. 삼겹살의 한쪽 면이 과하게 익기 전에 서둘러 양념을 준비한다. 깊이가 너무 얕지 않은 그릇에 밥숟가락으로 진간장 두 스푼, 맛술 두 스푼, 올리고당 한 스푼, 굴소스와 설탕을 반 스푼씩 넣고 섞어 놓는다. 그쯤 되면 프라이팬 위의 삼겹살을 뒤집을 시간이 된다. 조리용으로 사용하는 긴 나무젓가락을 써도 되지만, 젓가락질이 조금이라도 서투르다면 고기가 탈 위험성이 있으므로 실리콘 집게를 사용하는 게 낫다.



  삼겹살 뒤집기가 끝났다면 준비한 양념을 고기 위에 부어 준다. 묽은 갈색의 양념이 프라이팬 가운데에서부터 서서히 외곽으로 퍼져 나간다. 1분 간격으로 고기를 앞뒤로 뒤집으며 삼겹살에 양념을 먹인다. 그러다 보면 고기에 붙은 양념에 점성이 생기고 끈적해지는 느낌이 든다. 썰어 둔 쪽파와 청양고추를 모두 팬에 쏟아내고 다진마늘 반 스푼을 추가한다. 볶음용 주걱을 들어 고기와 양념, 채소가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힘차게 볶는다.



  불을 끈 후 잘 조려진 삼겹살과 채소를 넓적한 접시에 둥글고 소담하게 담는다. 이제껏 도마 한쪽 구석에서 줄곧 기다리기만 하고 있던, 잘게 썬 쪽파를 손끝으로 살며시 쥔다. 그리고 마치 통깨를 뿌리듯 가볍게 흩뿌리며 요리를 장식한다. 쪽파 토핑은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는 간장조림을 보다 산뜻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귀엽고 능력 있는 사원이다.     




  부엌 조명을 가득 받고 있는 삼겹살간장조림. 올리고당을 넣은 덕분에 양념이 더욱 쫀쫀하고, 조명 아래에서 반짝 빛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확 돈다. 종일 서 있어 피로해진 종아리의 감각도 잊게 할 만큼. 밥을 반 숟가락 뜬다. 나머지 반은 삼겹살간장조림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밥 옆에 비스듬히 삼겹살을 올린다. 흰밥 표면에 양념이 묻어 다시 한번 매끄럽게 빛을 낸다. 간장 소스에 숨이 죽은 쪽파도 두어 개 함께 올린다. 그 위에 종종 썰린 쪽파 토핑도 몇 개 얹어준다면 밥숟가락 위에서 완벽한 요리 한 접시가 다시금 탄생한다. 기분 좋게 입을 벌린다.



  씹으면 씹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진다. 삼겹살의 살코기와 비계 모두, 조리는 동안 처음보다 부드러워졌고, 속까지 양념을 먹어 더더욱 탱글해져서 씹는 재미를 동반한다. 짭조름한 간장 양념이 입천장과 양 볼, 혀끝을 매끄럽게 감싼다. 밥을 많이 떠서 간이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 때엔 양념이 가득 적셔진 쪽파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쏙 넣으면 된다. 때때로 입안을 조금 상큼하게 만들고 싶을 경우 쪽파 토핑만 따로 씹으면 맛이 정돈되는 느낌이 든다.




  다음번엔 정육점 사장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사장님, 양파는 넣지 마세요. 쪽파를 넣으세요.    



      





  싫어하는 게 무지막지하게 많았던 아이는 자라오면서 부모님이나 동생, 주위 친구들에게 좋다는 말보단 싫다는 말을 훨씬 자주 하며 살았다. 너, 그렇게 말하지 마. 엄마 아빠, 저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대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에 국어 학원에서 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비슷했다. 재일아, 휴대폰 하지 마. 시현아, 야, 일어나. 자지 마.     




  그런데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부터는 ‘엄마 아빠 다음 싫어’의 본성이 힘을 잃게 되었다. 내가 강의를 맡았던 대학 기관들은 모두 수업 시간에 한국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매시간 교사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오직, 이전 시간까지 학생들이 배웠던 범위 안으로 한정되었다.



  초급 한국어 교재의 초반부에는 주로 긍정적인 표현들만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도 한국에 오자마자 부정적인 문장들부터 배우면 공부할 의욕이 팍 꺾이지 않겠는가? 그 덕분인지 1급을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님들이 수업 중 보이는 성격은 정말 천사 그 자체다. 학생들이 무슨 행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하며 다 이해해 주고, 휴대폰으로 몰래 게임을 하는 학생을 보면 속으로는 천불이 나더라도 겉으로는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하며 ‘선생님 슬퍼요’ 할 수밖에.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20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언어 교육을 전공하는 동안 가슴 뛰게 만들어 주었던 비트겐슈타인의 멋진 말이, 내가 겪는 실제 교실에서 이런 모습으로 적용될 거라고는 정말 짐작도 못 했다. ‘싫어’가 없는 세상에 살게 되다니. 저기요 비트겐슈타인 선생님, 선생님도 이건 모르셨죠? 훌쩍훌쩍…….     



  그래도 너무 절망하지 않기를. 딱 한 달만 꾹 참고 기다리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다. 수업을 시작하고 4주차에 접어들자마자 드디어 ‘V(동사)(으)세요’와 ‘V(동사)지 마세요’를 가르치게 된다. 그날이 오면 수업 준비를 하면서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이것들, 그동안 아주 편하고 좋았겠지. 오늘부터 새로운 표현을 공부한다는 명목이자 핑계 아래, 하지 말라는 말을 실컷 해 주겠어. 고대하던 ‘V(동사)지 마세요’를 연습하는 내내 신이 난다. 여기저기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보일 때마다 크게 외친다. 어? 호셉 씨, 휴대폰을 하지 마세요! 쯔샤오 씨, 잠을 자지 마세요! 다마리스 씨, 친구하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광하오 씨, 고향 말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학생들이 기분이 좀 상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잔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연습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들이다. 진짜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10분의 쉬는 시간 후, 다음 수업을 시작한다. 이번 수업은 학생들이 조금 전 배운 표현들을 가지고 다 함께 논의해서 교실 규칙을 만들어 보는 시간이다. 모두의 동의하에 만든 규칙이니 완성되면 프린트해서 교실에 붙여 놓을 거라고 으름장을 놨더니 다들 진심을 담아서 종알댄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완성한 규칙을 한 명씩 돌아가며 한 개씩 순서대로 읽는다. 소개한다. 우리 반 학생들이 만든 교실 규칙의 전문이다.




우리 반 규칙 >

(우리 반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1.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2. 교실에서 음식을 먹지 마세요.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술을 마시지 마세요.

3. 수업 시간에 친구하고 말하지 마세요.

4.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세요.

5. 한국어만 말하세요.

6. 숙제와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7. 우리 반 친구들을 항상 사랑하세요. ♥




  왜 학생들의 손을 통해 나온 문장들은 항상 이렇게 귀엽고 예쁜 걸까? 차근차근 읽어 보면 죄다 이래라 저래라, 이거 하지 말아라, 저거 하지 말아라 하는 잔소리들뿐인데 말이다. 바로 이전 시간에 귀가 아플 정도로 자주 들었던 선생님의 잔소리도 꼬박꼬박 규칙에 넣어 준 마음이 참 착하다. 선생님을 위한 규칙도 4번으로 하나 챙겨 주니 예쁘고. 술담배는 한 번도 가지고 온 적 없으면서 2번 규칙으로 왜 떡하니 올라와 있는 건지. 정말 알 수 없어 웃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7번 규칙에는 예쁜 마무리를 하고 싶었던 내 입김도 좀 작용했다. 서로 좀 민망해하다가도 마지막 하트를 딱 붙이는 순간, 모두의 얼굴이 해사하게 밝아졌다. 옆 친구와 함께 입꼬리를 올린다.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나 착하고, 이토록 예쁘고, 이다지도 순수한지. 처음에는 다들 나이가 어려서 그러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 만나는 어머니나 아버지뻘의 학생들도 어린 학생들처럼, 때로는 그 이상으로 순진한 모습들을 보여 준다. 또 아무리 어린 친구들이라 해도 대학교 1, 2학년 정도인데 어떻게 그토록 아이처럼 해맑은 걸까?



  아, 어쩌면 ‘언어의 한계’ 때문일지도.



  살면서 처음으로 구사하는 새로운 언어. 분명히 그들도 머릿속엔 하고 싶은 말들이 넘칠 것이다. 다만 한국어를 몰라서 오늘은 말할 수 없을 뿐이다. 1급 선생님으로 누가 와도 늘 천사 같은 성격일 수밖에 없듯, 학생들도 1급에서만큼은 늘 말간 아이 같은 존재로 지낼 수밖에 없을 테지. 방금 전 다 함께 합의하여 교실 규칙을 만든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학기가 시작하면서부터 다 같이 합심하여 저마다의 입에 ‘초급 한국어’라는 일종의 언어 필터를 달아 놓았는지도 모른다. ‘나쁜 말은 하지 마세요.’ ‘예쁜 말만 하세요.’     




  이런 생각들을 쭉 하다가 이유 없이 눈이 간지러워져서 눈꺼풀을 비볐다. 갑자기 교실 여기저기에서 으아아,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어?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댔다. 모두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로 날 살피고 있다. 몇몇 남학생들은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고 있다. 설마 내가 자기들이 만든 규칙을 보고 감동 받아 운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라고,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마구 도리질치고 싶지만 이제껏 배운 초급 한국어로는 이 상황을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쩔 수 없군. ‘엄마 아빠 다음 싫어’는 이 교실 안에서만큼은 교재와 공책 사이사이에 꼭꼭 숨겨 놓는 수밖에.     



  학기가 끝나는 날엔 보통 서로에게 몇 줄의 짧은 편지를 써준다. 학생들이 내게 써주는 편지에서 매 학기 한 번쯤은 이 문장을 읽게 된다. ‘선생님, 저를 잊지 마세요.’ 3개월 단위로 바뀌는 학기. 짧은 만남이었기에 더욱 크게 남은 아쉬움이 담긴 문장이다. 나도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한번도 그대로 전하지는 못한 말이다. 이번 방학이 지나면 다음 급으로, 3개월 후면 또 다음 급으로, 그렇게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말 모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도 우리를 잊지 마세요. 공부를 이어나가다 보면 언젠가 한국어도 한국어 선생님도, 한국이라는 나라도 싫어질 때가 올 거예요. 여러분의 선배들도 다들 그렇더라고요. 여러분은 아직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런 시간을 겪어야 또 다음으로 향할 수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언젠가 그때가 오면 오늘을 꼭 생각해 주세요. 잊지 마세요. 마음만 먹으면 온종일 아이가 될 수 있었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하고 싶은 말들이 넘쳤지만 할 수 없어서 다 같이 그냥 웃어버렸던 순간들 말이에요. 그때가 오면 이런 순간들이 분명히 힘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잊어버리지 마세요.     








  언제까지 한국어를 가르치며 살 수 있을까? 정년이 보장된 직업도 아닌 데다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 그런지 먼 미래의 일을 자신하며 그리지는 못하겠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내게 찾아올 마지막 수업일까지 지금처럼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천사 같고 아이 같았던 날들을 도마 한켠에 모아 둔 쪽파 토핑처럼 보관해 놓아야겠다. 내 마음 한켠에 고이고이 모셔 두었다가, 유난히 지치고 힘들어서 후다닥 고기 조림을 만들 때 조심조심 집어 살며시 흩뿌려야지. 때때로 삶이 프라이팬처럼 납작해진 느낌이 들면 따로 송송 집어 먹으며 상큼하게 정돈시켜야지. 그러니까, 절대로 잊지 말기를.     



  새 학기 첫 주. 나는 오늘도 천사로 살고 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식 스튜 같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