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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요리치료연구소 Jun 30. 2023

돌리고 줄 세우는 아이

행동수정 6

자동차를 뒤집어 배를 보는 ..


뒤집어 바퀴를 손으로 돌리는 행동을 보이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보고 답답하고 난감해 진 부모는 

“자동차는 앞으로 뒤로 왔다갔다 굴리는 거야.” 

“자동차를 뒤집으면 자동차가 갈 수가 없지.”

급기야, “자동차 뒤집지 마! 바퀴는 바닥에서 굴리는 거지.” 큰소리를 지르고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많은 장난감 중에서 유독 자동차만 가지고 논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자동차의 기능과 역할은 뛰뛰빵빵 자동차가 갑니다가 아니라 자동차를 뒤집어 놓고 손으로 바퀴를 굴리는 것만 반복하는 일이다.


자폐아동은 일반적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에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다. 돌아가는 물건이 있으면 넋을 놓고 보게 되고, 때로는 스스로 물건을 돌리며 노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 바퀴 돌아가는 것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사람과 이야기하다가도 창밖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달리는 차의 바퀴를 보곤 한다. 간혹 자폐아동이 자동차를 좋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도 자동차라는 물체가 아닌 바퀴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은 시각정보와 전정감각의 불일치가 만드는 신경계의 혼란 현상이라고 한다. 자녀가 돌아가는 회전운동을 계속보고 있는 것은 신체가 정지되어 있는 상태의 불균형이 자폐아동의 전정신경의 정보 혼란을 만들어내고 이 불일치를 쾌감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쾌감추구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특성 중 하나인 자기자극 행동이다. 정서적인 안정과 쾌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추구하는 자극추구 현상이 있으며, 자폐아동 역시 자신의 자극 추구 방식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역기능에 집중하고 노는 아이가 있다면 호기심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인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눈 맞춤이 안 되고 불러도 반응이 없으며 장난감을 뒤집어 바퀴를 돌리면서 집중하는 아이라면 자폐스펙트럼을 의심해야 한다. 양육자는 자녀의 연령에 맞게 장난감의 기능을 활용 할 수 있도록 시범을 보여 주고 관찰 할 수 있도록 양육하여야 한다. 어른은 힘들고 고단하지만 지속적인 자극을 해 주며 끊임없이 반응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두 번째로 나타나는 행동은 물건을 줄 세우는 일이다. 자동차의 바퀴를 굴리다가 장난감 자동차가 많다면 열과 행을 맞춰 나란히 줄 세워 놓거나 삐죽하게 튀어 나오는 모습 없이 반듯하게 쭉 맞추어 놓고 그 앞에서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크기와 모양이 일정한 불럭을 균형 있게 늘어놓거나 쌓아 올려놓은 모습도 볼 수 있다. 블록, 자동차, 로봇 줄 세우기에서 상표 스티커에 집중하는 모습도 보인다. 장난감이 많지 않던 시절의 유아가 길거리의 돌도 줄을 세우고, 우유병, 음료수병, 엄마의 화장품도 줄을 세우는 모습을 보았다. 줄 세우기가 제제를 받거나 싫증이 나면 상표에 관심이 이어지고 상표를 나란히 모아 붙이거나 나열하기도 한다. 나란히 줄 세운 장난감들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으며 부모가 불러도 반응이 없는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나의 이야기

자동차를 뒤집어 바퀴 돌리고 상표에 환장하고 화장대 앞에서 줄 세우기를 즐기는 자폐성향이 보인다는 진단을 받은 나의 첫째 이야기이다. 

“우리 애는 엄청 순해. 먹고 자고 먹고 자기만 한다. 그리고 돌잔치 때 남겨진 주스병, 소주병, 맥주병을 가져다가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일렬로 세워놓고 놀아.” “이 녀석이 천잰가 봐. 똑 같은 것 끼리 모아 났네.” 누가 알려주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표별로 정확하게 분류를 하고 또 일렬로 세워 놓았다. 여기에다 특이한 게 또 있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을 그 콩알만 한 녀석이 뭘 안다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 녀석이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니, 아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삼성, 대우, 금성 등의 대기업의 마크(그 당시의 기업 상표)였다. 아이는 이 상표 딱지가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에만 집중하면서 좋아했다. “진짜 천재 하나 난가 보네. 신문도 보고, 같은 모양도 알고.” 이때까지만 해도 우쭐했고 흐뭇했었다. 


돌이 지났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용조용하기만 하던 큰애는 내가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귀에 이상이 있나 싶어서 13개월에 동네 이비인후과에 데리고 가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싱크대에 팔이 끼었는데도 울지도, 엄마를 부르지도 않았다. “너 왜 그러고 있니? 끼였으면 엄마를 불러야지.” 팔은 싱크대에 찡긴 채 서서 오줌을 지리면서도 그냥 그 상태로 너무나 평온하게 있는 것을 보고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아이는 위험하고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울면서 엄마를 부르거나, 엄마 품에 안겨야 하지 않는가? 아이를 안을라치면 눈을 피하고 반사적으로 뒤집어졌다. 엄마인 나에게 매달리는 일도 없고 뭘 해달라는 칭얼거림도 없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생각이 떠오르다가 ‘설마, 아니야, 성장과정에 있는 일일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면서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큰 아이가 24개월에 창원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남편의 발령으로 창원에 이사 왔을 때에는 젊은 엄마가 단독 주택을 통째로 빌려 산다는 게 주위의 또래 엄마들에게는 큰 부러움이었다. 동네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우리 집을 놀이방처럼 드나들면서 자유롭게 놀았다. 창원에서의 생활은 또래를 키우는 아줌마들끼리 아이들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내는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애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아이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부여잡고 울고 있어도 매몰차게 아이를 때리면서까지 끌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00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그래 맞다. 잘 어울려 놀지 않고 혼자서 놀고, 말도 안하고 멍하게 있을 때도 있고.” 아줌마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들이 소문처럼 번져 나갔다.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연세 드신 아줌마들이 걱정 담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새워놓고 “우짜노 우짜노 새댁” 하면서 동정어린 위로를 한마디씩 던져 주었다. “괜찮아 질 거다. 다 글려고 그런 거다.”고 말했지만, 나라고 걱정이 안 되겠는가. 생후 17개월, 창원으로 이사 내려오기 전 세브란스 병원 소아과에 갔지만 너무 어려서 모르겠다. 너무 어려서 검사가 안 된다고 나중에 다시 오라고 했었다. 24개월이 된 아이,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대로 아이를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 그런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병이라면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25개월에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에 데리고 갔다.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내 눈에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진료실 앞에 있는 조기교육실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내 아이와 비슷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큰 문제가 생겼구나 싶었다.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예약 일을 기다리는 한 동안 아이에 대한 육아일기를 적었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이 일기를 보고 하신 말씀은 “이 자료를 토대로 볼 때, 아이는 자폐성향을 보입니다. 그나마 일찍 오신 게 참 다행입니다, 다양한 검사를 받아 보시고. 좀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그렇지만 조기교육은 일찍 받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에 두 번 서울을 오가며 검사를 받았다. 너무 어린 탓에 제대로 검사가 이루어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의사선생님은 이제 창원에서 조기교육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의사의 면담이 있는 날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진료실에서 돌아서는 나를 불러서 “만약 이 아이가 만 5세 전에 문장이 되는 말, 그러니까 엄마 밥 주세요, 엄마 배 아파요. 이런 문장이 되는 말을 하게 되면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교육시키세요.” 라고 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뭐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냐? 어떤 일을 하시냐? 고 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애를 가진 자녀의 조기교육을 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만했다. 내 아이 만큼은 시간이 지나면 말 할 수 있겠지 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아이도 세상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 뜨면서 늦은 밤 눈 감을 때까지 똑같은 말을 수 백 번, 수 천 번을 반복에 반복을 하면 말하기 공부를 했다. 나는 저 만치 뛰어 가고 싶은데 아이는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한두 번 들은 말도 잘 기억해내서 곧잘 지껄이곤 했다. 내 아이는 보통의 아이들이 식은 죽 먹듯이 나이가 차면 저절로 다 습득하게 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내 아이가 말을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하늘이 노란색임을 알았다. 서울대병원 진단 이 후로 나는 아침에 두 눈을 뜨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큰애를 조금이라도 낫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회사원 아빠, 전업주부 엄마인 우리 집의 경제력으로 아이에게 장애를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건강하게 자라면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다해줘도 모자랄 판에 장애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며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소아정신과 분야의 최고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갔고,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유명 의사선생님에게도 매달려 아이의 진료를 부탁했다. 병원에서 일러 준대로 조기교육실을 찾았다. 1992년, 창원, 마산, 진해를 다 뒤져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선생님을 찾았고 그 때 찾은 곳이 자람터 이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밤 12시가 넘어도 조기교육실 원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요청했다. 조기 교육실은 일주일에 세 번씩, 한번에 40분 수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1993년, 조기교육실 외에 마산에서 수녀님이 운영하는 장애-비장애 통합 어린이집에도 보냈다. 처음에는 거리가 멀어 수녀님의 어린이집 통학 버스가 창원까지 못 온다고 했다. 내가 통학하는 아이들 지킴이가 되기를 자처한 끝에 성모유치원에 보낼 수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작은애를 업고 큰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 버스를 탔다. 이와 함께 어린이집 보육교사처럼 아이들을 통솔해서 수녀선생님께 인수인계하는 통학 담당자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조기교육실, 통합유치원과 더불어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라는 심정으로 새로운 환경을 자주 접하게 했다. 집 주변에 있는 대학교와 도청을 자주 찾았고, 볼거리로는 백화점과, 전통시장을 자주 갔다. 먹을거리가 많고 왁자지껄한 사람의 소리가 넘쳐나는 재래시장은 진기한 것들이 많이 눈과 귀를 자극하는 훌륭한 학습장이었다. 백화점 지하 소극장에서 인형극도 많이 보여주었다. 내가 아이에게 행한 자연학습법이 어떤 전문가로부터 이렇게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내 방법이 매우 현명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특수교육과 치료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게 되었을 때 헬렌켈러의 스승인 설리번 선생이 자연 속에서 물소리, 나무, 잔디, 흙, 새소리 등을 접하게 함으로써 최선의 교육을 제공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헬렌켈러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설리번의 헌신에 힘입어 정상인이나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헬렌켈러는 훗날 스승 설리번에 대해 회고하기를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 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희생이 내 아이에게도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조기 교육실은 생후 25개월에 시작하여 6.5세까지 다녔다. 서서히 인지 능력이 생겼고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감했다. 조기교육실에서의 노력은 가정으로 연결되어 복습을 하였고, 반복되는 가르침은 기억을 해 내는 기적을 가져 왔다. 나와 아이가 기억할 수 있는 일은 저 너머에 있어 꺼진 걸로 알았던 희망의 불씨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7세가 되었을 때 남편의 직장이동으로 다시 경기 00시로 이사를 했다. 이 아이는 8세에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1990년생. 그 당시에는 일반학교 안에 특수학급이 없었다. 자녀가 장애가 있으면 무조건 특수학교 입학이지만 특수학교도 많이 없었던 시절이었고 좋은 의미의 맹모삼천지교가 아니라 학교에 보내기 위해 학교 가가운 동네로 이사를 하는 분위기였다. 눈맞춤 안되는 아이, 불러도 반응없는 아이, 장난감의 기능을 거슬리고 줄 세우기를 즐겨 하는 아이, 상표에 집착하고 넋을 놓는 아이. 이러한 내 아이의 모습이 자폐스펙트럼을 나타내는 증상이었다. 진단을 받고 내가 한 일은 놀이터와 시장 방문 등의 자연친화적인 놀이와 눈 맞춤을 위해 검지 손톱에 색칠하기, 나이 눈 옆에 사물을 놓고 호명하기, 미친 듯 좋아하는 상표 대신 연극 포스터 붙여 주고 이야기 해 주기 등이다. 조기교육실을 다닐 때부터 “우리 아이가 이러 한데 이름 한번 불러 주세요.” 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었고 자립을 위한 활동을 시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조기발견과 조기교육의 힘을 믿는다. 이런 글을 쓰면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지금 그 아이는 어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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