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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요리치료연구소 Feb 03. 2017

 첫번째 이야기

-  자폐성향을 보이는 아들을 둔 가정주부  

1. 자폐성향을 보이는 아들을 둔 가정주부  

   

 "회장님,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에.”    


 요리치료로 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게 된다.

나를 처음 만나는 분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내가 회장이랍시고 권위적으로 행세하지 않지만

상대방이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맞아 준다. 나는 그저 아줌마 일뿐인데 ..............    


 지금은 오천 명이 넘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며 회원을 관리한다.


요리치료사를 꿈꾸는 이에게 꿈을 심어주고  교육시켜 배출 시킨 협회의 장이다.

하지만 가끔씩 정말 내가 회장이라고 불릴 만한가,

내가 회장인 게 사실인가 하고 스스로 놀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내가 한국요리심리치료협회의 회장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유년시절의 다복했던 가정과는 달리 대학생이 되었을 때의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는

나는 평범해지고 싶어도 나를 평범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그로인한 어머니의 건강 악화,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라는 생각으로 달랑달랑 붙은 대학은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여고생과 다를 바 없었다.


 대학 시절은 집안일과 조카 돌보는 일로 4년을 보냈고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직장도 없는 나에게 맞선이란 게 들어왔다.


맞선을 봤고  3번 만나고 한 달 만에 결혼하고 이렇게 해서 나는 80년대의 전형적인 “대학졸업과 동시에 결혼이다” 라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무엇인가를 꼭 이루어야겠다는

특별한 꿈도 없이 전업 주부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주부로서 생활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평탄치 않게 이어졌다.

지금에서야 마음 편하게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죽고 싶은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했다.  

   

 "우리 애는 엄청 순해. 먹고 자고 먹고 자고..... .” 순둥이 같은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돌이 지나고 「이 녀석이 천잰가 봐... 똑 같은 것 끼리 모아 났네.」


 돌잔치 때 버려진 주스병, 소주병, 맥주병을 가져다가

앉은뱅이 화장대 위에 모아다가 일렬로 세워놓기를 반복하고 놀았다. 


상표별로 분류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렬로 세워놓았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유심히 들마치 어른이 신문을 보는 것처럼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삼성, 대우, 금성 등의 대기업의 마크였다.


아이는 놀잇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에만 집중하면서 좋아했다.    

 

「진짜 천재 하나 난가 보네... 신문도 보고,  같은 것도 알고.」


이때까지만 해도 마음속으로 흐뭇했다.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 아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용조용한 아이, 먹고 자는 아이, 불러도 반응이 없는 아이였다.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니 좋았다.


그러나 어느 날 주방에서 이것저것 꺼내고 맞추고 줄 세우기를 하면서 놀다가 싱크대에 팔이 끼었는데도 울지도, 엄마를 부르지도 않고 오랜 시간을 서 있는 아이를 보았다. 서서 오줌을 지리면서도 그냥 그 상태로 너무나 평온하게 있는 것을 보고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왜 그러고 있니? 끼였으면 엄마라고 불러야지.」


악을 쓰면서 아이에게 퍼부었다.   

 

“ 분명 귀에 이상이 있을 거야”  아이를 들쳐 업고 이비인후과에 데리고 갔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 이상 없음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 아무 이상 없음“  그런데 왜?    


보통의 아이는 어려움을 당하면 울고, 상처를 입으면 울고, 배가 고프면 울고,

엄마가 안보이면 찾아야 하고 불러야 하고 칭얼거린다. 그리고 엄마 품에 안겨야 한다.

   

이 아이는 어려움을 당해도 울지도 않고 상처가 나도 울지도 않고, 배가 고파도 울지 않는다.

엄마를 찾지도 않고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리고 가슴에 꼭 안아 주려고 하면 눈을 피하고 반사적으로 뒤집어졌다.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생각이 떠오르다가 설마, 아니야,

성장 과정에 있는 일일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면서 남편의 이동으로 창원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창원에 이사 왔을 때에는 젊은 엄마가 단독 주택을 통째로 빌려 산다는 게  

단칸방에서 사는 또래 엄마들에게는 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집을 놀이방처럼 드나들었고

또래를 키우는 아줌마들끼리 아이들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내는 일상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놀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애들이 오지 않는다,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부여잡고 울고 있어도

아줌마들이 아이들 때리면서까지 매몰차게 끌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00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그래 ..잘 어울려 놀지 않고. 혼자서 놀고 말도 안하고 멍하게 있을 때도 있고....」    


 이런 이야기들이 번져 나갔다.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연세 드신 아줌마들이 걱정 담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우짜노 우짜겠노 새댁”   



“괘안아 질거다 다 클라고 그런기다” 하면서  동정어린 위로의 한마디씩 던져 주었다     

        

이사 내려오기 전 이비인후과에서 청각 이상없음

이후 세브란스 병원 소아과에 갔지만 너무 어려서 모르겠다.

너무 어려서 검사가 안된다고 그냥 데리고 가라고 했었다.     


동네 아줌마들의 이야기 대로 라면 우리 아이가 이상한 아이임에 틀림없다.

이대로 아이를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 그런지 어떤 병인지를 알아야 했다.

병이라면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병원 소아정신과에 데리고 갔다.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내 눈에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료실 앞에 있는 조기교육실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내 아이와 비슷한 행동을 했다.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큰 문제가 생겼구나 싶었다.     


예약 일을 기다리는 한 달간 아이에 대한 육아일기를 적었다.   

 

「이 자료를 토대로 볼 때, 아이는 자폐 성향을 보입니다. 

......    

그나마 일찍 오신 게 참 다행입니다, 다양한 검사를 해 봅시다.

......    

그렇지만 조기교육은 일찍 받는 게 좋을 듯합니다. ]    



“조기교육?”    


그로부터 한 달에 두 번 서울을 오가며 검사를 받았다.

너무 어린 탓에 제대로 검사가 이루어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의사선생님은 이제 창원에서 조기교육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면담을 하고  돌아서는 나를 의사선생님은 불러 세웠다.    


[아이가 만 5세 전에 문장이 되는 말

그러니까 엄마 밥 주세요, 엄마 배 아파요

이런 말을 하게 되면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교육 시키세요 .. ]


라고 했다    .



아버지의 직업이 뭐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냐? 뭐 하시냐 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조기교육을 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창원으로 돌아온 난 오만했다. 


내 아이 만큼은 시간이 지나면 말 할 수 있겠지 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아이도 세상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 뜨면서 늦은 밤 눈 감을 때까지 똑같은 말을

수 백번, 수 천번을 반복에 반복을 하면 말하기 교육을 했다.


아이는 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아이 또래의 아이들은 한 두 번 들은 말도 잘 기억해내서 곧잘 지껄이곤 했다.

보통의 아이들이 식은 죽 먹듯이 나이가 차면 저절로 다 습득하게 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내 아이가 문장이 되는 말을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노랬다. 하늘이 노랗다 하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 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소아 정신과 분야의 최고의 병원과 마산, 창원, 진해를 다 뒤져서 찾아낸

특수교육 전문가가 운영하는 조기교육실,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유일한 장애 비장애 통합 어린이집,

집 앞 미술교습소 원장에게 매일 점심을 제공해 주면서 다니게 된 미술학원 등은

새로운 환경을 자주 접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겠지 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했다.    

 

창원에서 수녀님이 운영하시는 어린이집은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아이들을 한명씩 태우고 내리고 하는 시간을 합치면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장애아동을 받아주는 통합어린이집은 드물었고 들어가는 경쟁률도 치열했다.  

수녀님은 아침에는 기도 시간 때문에  거리가 너무 멀어 어린이집 버스가 창원까지 못 간다고 했다.  

버스만 보내 준다면  내가 아침마다 차를 타겠다고 했다.

통학하는 아이들 지킴이가 되기를 자처한 끝에 버스가 창원까지 올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나는 작은애를 업고 큰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 보육교사처럼 버스를 타는 모든 아이들을 돌보면서 어린이집에 도착 했다.   

  

  어린이집이 끝나면 진기한 것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으라는 생각에서 볼거리,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넘쳐나는 재래시장에 자주 갔다.

주변의 나무와 잔디가 있는 곳이 우리의 놀이터로 만지고 뒹굴고 뛰어 다녔다.  

백화점의 어린이 인형극장의 1년 치 티켓을 끊어 인형극도 보러 다녔다.

이 모든 일들이 전문가로부터 이렇게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냥 내 방식대로 할 뿐이었다.     


나중에서야 이 방법이 매우 현명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요리치료의 길을 가게 되면서 헬렌 켈러의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자연 속에서 나무, 잔디, 흙, 새 소리, 시냇물 소리 등을 접하게 함으로써

최고의 교육 효과를 내었다.  


   

또한 조기교육실에서 이루어진 특수교육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반복을 하고 도 반복을 하니 아이는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나의 목표는 일반학교에 보내는 것이 되었다.  

   

큰아이는 일반 초등학교에 진학했고

중학교 때에는 영화 감상평을 엮은 책을 내면서

걱정하고 염려 해 주신 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현재,


건실한 청년으로 나라의 부름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계적인 영화감독을 꿈꾸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자폐아를 둔 엄마의 기도]


지가 나를 알기나 할까 

숱한 날들을 잠 못 이루고 술로 보낸 시간들이 많다는 걸,,,     


지가 나를 알기나 할까 

잊기로 하자고 아니 너를 포기한다고 세상에 점을 찍은 날도 있다는 것을...     


지가 나를 알기나 할까 

피눈물로 무릎 꿇어 두 손 모아 절 위한 기도를 한걸.......     


지가 나를 알기나 할까 

인간하나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입술 꽉 깨문 내가 있다는 것을,,,     


지가 알기나 할까 

오늘도 절 위한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의 맘을 알기나 할까

아들아~~~~~~~


엎드려 간절히 기도합니다.   

 

엄마를 알기나 할까.       

 

-------------------자폐아를 둔 엄마의 기도------------- 





에세이- 먼 길 돌아 여기 서 있네 : 권 명 숙 

http://cafe.daum.net/cookthera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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