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서류
그 후 아내는 지금 만나는 남자와 헤어져도 다른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 하며 아까 말했던 서로의 자유로운 연애 생활을 존중하자고 했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고 진작 해야 할 말을 이제야 뱉었다.
“이혼하자.”
그러자 아내가 뭘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혼하자고.”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제 와서 울고 빌어도 소용없다. 난 마음을 굳혔으니까. 그런데 아내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도, 다시 생각해 보자도 아닌 다른 말이었다.
“난 자기가 그런 말 할 줄 몰랐어.”
“왜?”
“이혼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
대체 이건 무슨 말인가. 잘못은 자기가 다 저질러 놓고 왜 내가 이혼하자 못할 거라 생각한 걸까. 날 얼마나 호구 등’신으로 봤으면 저런 생각이 가능할까. 남아있던 정마저 떨어진다.
“알겠어. 준비할게.”
아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준비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다음 날 한 번 더 이야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이를 재우고 같은 곳에 앉아 이혼까지 앞으로의 생활 규칙을 정했다. 아이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재우고, 회식이나 저녁 약속은 일절 잡거나 참여하지 않는다. 주말에는 사전에 상대 동의를 구하지 않는 이상 아이와 셋이 함께 하기로 했다.
아이 재우러 들어갈 때, 반대 사람은 두 시간씩은 집에 있든 외출하든 자유시간을 가지되 두 시간에 한정하고 뭐 하러 갔는지 사진으로 증빙을 남긴다 등등의 약속들이었다.
이혼완료까지 서로를 구속하는 것도 웃기지만, 큰 틀에서는 아이에게 부모가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부모의 위선적 배려였다.
상간남이랑 회사에서 따로 점심 데이트를 하든 재택 하는 날 몰래 만나든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묻지 않았다. 이미 이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더 그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판사가 그 죄를 물을 거니까.
공장 출장을 가는 날,
내가 쓰고 있던 법인차로 팀 동료들을 태우고 공장으로 이동했다. 본사와 공장의 모든 대리-과장급이 모여 세미 워크샵처럼 회사 발전을 위해 뭘 개선해야 할지 논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표님께 보고하는 간담회 시간을 가졌고 인사팀장님도 동석했다. 하루에 걸친 위 일정을 마친 후 저녁 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나름 또래인 대리-과장급들의 모임이라 그런가 젊은 분위기에 나도 젖어 들었고 잠시 안 좋은 기억을 뒤로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차로 와인펍으로 이동했는데 대표님이 내 옆자리에 앉으셨고 인사팀장님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
“몇 월에 나가고 싶나?”
배려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대표님의 감사한 제안과 다르게 술기 운이 올라오며 “하하하.. 글쎄요” 멋쩍게 웃으며 다같이 짠을 했는데 손이 미끄러지며 와인잔을 깨고 말았다. 내가 술이 약하단 것을 알고 있는 대표님이 이제 음료수 마시라고 음료를 시켜주었다.
지금 대표님은 공채 출신으로 고속 승진을 하며 미국, 유럽 법인 모두 법인장을 지내고 임원이 되었다가 대표로 발탁된 순혈 성골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부대 출신이라는 거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데 중간 입사자인 나를 많이 좋아하고 아껴 주셨다.
어차피 해야 할 말, 그냥 지금 하자.
“죄송합니다만 나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집에 일이있어서.. 아내랑 소송중이라서요.”
대표님과 인사팀장은 깜짝 놀랐고 우리는 따로 자리를 이동했다. 모든 개인 사정을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눈치를 채신 듯했다. 소송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으셨고 변호사에게 들은 대로 아이가 있으면 보통 1년 가까이 걸린다고 대답했다.
두 분은 위로를 해주셨다. 민감한 주제이니 형식적인 위로였지만 감사했다. 대표님은 눈을 감고 생각을 좀 하겠다고 하시더니, 조금 뒤 마침 인사팀장도 같이 있으니 이렇게 진행할 수는 없냐고 물으셨다.
“일단, 지금 복귀 논의 중인 부장이 아이 교육 이슈로 복귀를 미루고 싶어 하는데.. 주재연한은 차서 돌아오라고 했지만 뭐 대표 재량이니까. 그래 김부장은 1년 연장시키고 이혼 소송 끝나고 나가는 건 어때.”
감사한 제안이다.
하지만 양육권이 아내한테 갈 확률이 90%는 될 거라는 변호사의 말을 떠올리며 그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아이가 한참 커갈 때인데, 그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있겠다고.
대표님은 그것도 예상하셨는지 다른 제안을 하셨다.
“그럼 소송 끝나고 나가는 걸로 하되, 3개월 미국 3개월 본사 이렇게 근무하는 건? 거기서 보험이랑 집 계약, 미국 면허 발급 이런거 생각하면 주재원으로 나가긴 해야하는데.. 이런 경우에 주재수당을 어떻게 할 지랑 항공권은 좀 생각해 봐야겠네. 형평성에 어긋나지만 이정도 까지는 내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이 정도까지 배려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이것이 대표님이 본인이 다른 직원들에게 욕먹는 걸 감수해가면서도 배려해주실 수 있는 마지노선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까지 배려해주시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인사팀장, 이거 검토해서 위로 올려. 모든 계열사 주재원 중에 처음 있는 케이스라서 말이 나올 텐데 지금 상황 들었으니 사정 고려해서 최대한 말 안 나오게 잘 해주고.”
인사팀장님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우린 다시 원래 자리로 이동했다. 아내의 외도를 알고부터 계속 허했던 마음이 대표님 덕에 조금은 따듯해졌다.
회사가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 날은 공장으로 출근하여 빈 좌석에 자리를 잡고 오전 근무를 한 뒤, 같이 간 직원들과 함께 공장 점심을 먹고 본사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내가 오늘 할 말이 있으니 아이 재우고 이야기하자 해서 알겠다고 답장했다.
어제 공장 출장이라 아내가 아이를 재웠기에 오늘은 내가 재우고 나왔다. 아내는 이미 주방 의자에 앉아있었고 식탁엔 무슨 서류들이 놓여있었다.
“뭐야 이게?”
내가 자리에 앉자 아내는 대답 없이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
제일 앞에 올려진 서류를 들어보았다.
'이게 당신 생각인 거니..'
아내가 준비한 서류들을 손끝으로 넘기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둘 사이는 조용했지만 안 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 숨소리가 들리는 건지 서류를 눈으로 보고 있는 내 심장이 내는 건지 모를 소리가 쿵쿵 울려댔다.
이혼이라는 단어는 수백번은 검색했음에도 서류에 쓰여져 있는 글자를 다시 보니 감당하기 싫은 현실을 마주한듯 숨이 막혔다. 아내를 쳐다보았다.
“다 봤어?”
아내의 담담한 모습과 차가운 얼굴 뒤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서류를 식탁 위에 내려 놓았다. 다시 눈에 보인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협의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