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퇴근했다.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으면 조금은 잡생각이 사라진다.
며칠 뒤면 판결문이 변호사 사무실에 도착할 것이다. 판결문을 기다리는 시간은 이상했다.
이미 다 끝난 일 같다가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변호사가 결과를 알려주었고 아내의 부정행위가 인정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겪은 고통을 위로 받을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친구들의 고생했다는 말들이 위로가 되다가도, 막상 혼자 있으면 전혀 다른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라도 아내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지 않을까.
혹은 내가 쓴 기록들이 오히려 나를 불리하게 만들까.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바보 같은 내 말이 판사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판결은 이미 내려진 건데, 아직 판결문을 받지 못했으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전거를 타며 생각했다.
만약 판결문을 읽었을 때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항소를 해야 하는 걸까.
그 다음에는 무엇을 붙잡고 버텨야 할까. 이 싸움을 시작한 이유가 과연 그만한 결과로 돌아올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다시 스스로를 타이르듯 말해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고 이제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고.
금요일 오후 늦게 판결문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서 퇴근 후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변호사는 다른 사건으로 지방에 가 있는 터라 사무실 직원에게 판결문을 전달 받았다.
당장 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집에 가서 외투만 벗고 소파에 앉아 판결문을 봉투에서 꺼내보았다.
마음을 다잡고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가장 첫 줄에 있는 문장이었고 부부로서의 관계를 종결시키는 선고였다.
인정사실로 피고들이 직장동료 사이로 교제를 하며 함께 숙박업소에 투숙한 것이 적혀 있었다.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그 책임은 부정행위를 한 피고에게 있으며 명확하게 아내가 ‘유책 배우자’라고 쓰여 있고 피고(반소원고)의 이혼 청구를 기각함이 써있었다.
아내가 주장한 혼인관계의 파탄이 나의 취미활동, 개선 요구 및 본인의 사회생활 무시, 의처증으로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할 증거가 없으며 따라서 피고의 주장은 기각한다고 적혀있었다.
피고2 상간남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써있었다.
제 3자가 부부의 일방과 부정행위를 함으로서 부부공동생활을 침해하거나 유지를 방해하고 그에 대한 배우자로서의 권리를 침해하여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불법행위를 구성하는바, 위 인정사실 및 앞서 든 각 증거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2는 피고1이 배우자가 있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부정행위를 하였고, 이로 인하여 원고와 피고의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보이므로, 피고2는 원고가 받은 정신적 고통을 위자할 의무가 있다.
위자료 액수는 원고와 피고의 혼인기간,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 경위, 발각 이후의 피고2의 태도 등 제반 사정을 참작하여 2,000만 원으로 정한다. 피고2의 위와 같은 불법행위 책임은 피고1의 책임과 부진정연대채무 관계에 있다.
이 부분에서 기분이 나빠졌다.
상간남은 소송 중 어떠한 입장도 표출하지 않고 전부 아내의 주장에 묻어 있을 뿐이었는데 어떤 태도 등의 제반 사정을 참작한다는 말인가.
총 위자료는 2,500만원 이었고, 그 중 피고 1과 피고2가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금액은 2,000만원 이었다.
위자료는 내가 소송을 제기한 날로부터 판결일 까지는 이자 연 5%, 그리고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고 써있었다.
재산분할은 원고 45%, 피고1이 55%로 결론이 났다.
판단근거로 혼인기간 동안 피고1의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은 점, 분할 대상 재산의 취득 경위 및 형성에 대한 각 기여 정도, 원고와 피고1의 나이, 직업, 소득, 경제력, 부양적 요소 등 여러 사정을 참작했다는 내용이고 그 아래로는 재산에 대해서 어떻게 분할하라고 상세히 써있었다.
다음은 양육권이다.
사건본인의 친권자 및 양육자로 피고를 지정하며 양육비는 이번 달부터 사건본인이 성년에 이르기 전 날까지 월 90만 원 씩을 매월 말일에 지급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면접교섭은 별지3 기재와 같이 할 수 있다고 써있었고 그 내용은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일요일 18시까지. 설 및 추석 연휴 기간 중은 협의하여 1박 2일. 그리고 여름 및 겨울방학 중엔 협의하여 각 4박 5일.
방법은 원고가 사건 본인의 주거지 내지 협의된 장소로 데리러 가고, 마친 후에는 다시 해당 장소로 데려다 주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피고에 대한 협조 의무 조항도 있었다.
원고와 사건본인의 면접교섭이 원만하게 실시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하며, 이를 방해해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법적인 문서로 받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혼소송을 한 큰 이유 중에 하나가, 혹시라도 아내가 아이를 안 보여 준다 거나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내의 외도도 그럴 리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발생한 건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준수사항에 서로 아이 앞에서 상대를 험담하지 않고, 상대의 양육방식을 존중할 것.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요구를 아이를 통해 전달하지 마라고 쓰여있다.
이렇게 약 15개월의 소송 결과를 받고 나니 허탈함이 몰려온다. 판결문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이길 거라고 예상했던 결과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나왔다. 아내는 유책 배우자였고, 상간남은 불법행위자였다.
법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써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15개월 동안 붙잡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은 느낌이라기 보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치고 난 뒤의 허전함에 가까웠다.
양육권에 관련된 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다.
친권자 및 양육자로 피고를 지정한다는 문장은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 문장 하나로 나는 함께 사는 아버지에서 ‘시간을 나누어 만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한 달에 두 번, 정해진 토요일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사람.
아이의 일상에 함께 하는 게 아닌 그 시간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사람.
판결문은 나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문장은 위로가 되었다.
면접교섭에 적극 협조하여야 하며, 이를 방해해서는 아니된다는 문장.
이 문장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볼 수 있다는 권리를 문서로 확인 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송은 끝났지만,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부부라는 관계는 판결로 정리되었지만 아버지라는 역할은 정리되지 않는다.
판결문을 덮고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이 결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싸움의 끝은 승패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어떤 아버지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