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세상잡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준 Aug 15. 2019

블랙넛의 항소가 기각된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

자정작용을 상실한 시장의 9년 차 소비자로 살아남는다는 것

래퍼 블랙넛의 항소가 기각되었고 1심 판결이 유지되었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196863


 기사에 따르면 재판부는 "그러한(여성에 대한 성적 희롱) 표현이 다른 문화예술 행위와 달리 힙합이라는 장르에서만 정당하다고 볼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며 "공소 사실 모두 모욕에 해당하고 정당행위로도 볼 수 없다"고 밝혔다. 1심 재판부는 "예술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지만 타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위까지 무제한으로 보호할 수 없다"며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블랙넛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판결을 반기는 모양새다. 그런데 나는, 너무너무 슬프다. 이 사건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이것이 성희롱인지 아닌지 따져야 하는 상황이 너무 슬프다. 


한국힙합은 윤리적 파산 상태다. 무슨 말이냐면, 더 이상 구성원들의 자체적인  필터링으로는 이것이 힙합의 이름으로 용인 가능한 표현인가 아닌가를 따질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블랙넛의 항소가 기각되어서 전혀 기쁘지 않다. 애초에 이게 법정에 서기 전에 사람이라면 옹호해서는 안되는 게 맞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블랙넛의 밥줄이 끊기거나, 대국민 사과를 하거나 했어야 했는데, 누구 사진보고 자위를 했다는 것이 - 그리고 그것이 해당 여성과의 합의 하에 나온 가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힙합 리스너들끼리 성희롱이 맞는지 아닌지 따지고 있는 이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다. 1심 판결 이후, 블랙넛은 저스트뮤직, 인디고 뮤직, 위더플럭 레코즈의 컴필레이션 싱글 'IMJMWDP'에서 이런 가사를 썼다.


내 힙합은 진짜라서 징역 6개월

백화점 대신 법정에서 flexin 

(중략) 랩으로 선 넘지 but I'm not 지코 

법이고 윤리고 시끄러 비켜 

블랙넛은 랩 할 땐 라임만 지켜 

그까짓 공권력 안 쫄려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걸 설명씩이나 해야 하다니). 마치 공권력에 의해 '탄압' 당한 피해자인 양 코스프레 하는 그의 가사는 힙합의 이름으로 여성혐오적 표현을 얼마든지 용인 가능하다는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지적을 할 때마다 리스너들은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옹호하거나, "이래가지고 한국에서 힙합할 수 있겠느냐"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9년차 힙합 리스너다. 나도 이것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이전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결과물을 대중에게 내놓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부터 표현의 자유는 보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그 이후에 부적절한 내용이 있다면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고, 또 비판받아야 한다. 힙합이 예외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힙합이라고 성폭력을 부적절하게 언급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없다. 


2심 재판부는 '힙합이 면죄부는 될 수가 없다'라고 했다. 사실 면죄부가 될 수 있는 행동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게 법을 공부한 전문가의 입에서밖에 나올 수 없는 말인가? 나는 이것을 법정으로 끌고 가야 기어코 해결되는 상황이 너무 싫다. 리스너들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무려 사법부까지 나서서 힙합이 면죄부가 아님을 이야기하기 까지 우린 도대체 무엇을 했나? 


나는 사법부가 예술에 개입하는 것만큼 구린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블랙넛을 옹호하는 당신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와 당신들이 다른 점은, 사법부가 예술에 개입하기 전에 자정작용을 통해 '이것은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이것만큼은 안된다' 라는 논의가 선행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힙합은 그런 기능을 상실했다. 사법부가 개입해야 겨우 이것을 단죄할 수 있다는 점이, 오늘날 한국힙합의 비극이다. 누구는 Mnet이라는 거대자본에 잠식되어 버린 것을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그런거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인은 예술이 윤리와 도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와 동시에 '최소한의 윤리적 팬티'는 입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쇼미더머니4>에서 심사위원 앞에서 바지를 벗는 퍼포먼스를 한 블랙넛은 지금 팬티는 입고 있나 모르겠다. 바지까지 입을 필욘 없지만 (물론 바지를 벗고 돌아다니진 마시길) 팬티까지 벗는건 문제다. 내가 이런걸 설명까지 해야 하나? 래퍼가 되기 전에 시민이 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