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장을 잇는 윤퇴청 대표 이재정, 활동가 김나율, 김철규
* <더 넓은 광장을 그리는 사람들> 세 번째 연재입니다. 분량상의 문제로 다듬은 버전은 오마이뉴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34280
지난 4개월 간 열렸던 탄핵 광장을 돌이켜봤을 때, 매주, 매일 따뜻한 집구석을 벗어나 광장으로 나와서 ‘광장의 얼굴’이 되었던 사람들 덕분에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귀찮음을 기어이 극복하고 광장에 나와서 깃발과 응원봉과 피켓을 흔든 사람들이 진정한 광장의 주인일 것이다.
그렇게 광장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곁에서 광장을 좀 더 안전하고, 즐겁고,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의 장으로 만들었던 이들이 있다. ‘윤석열 퇴진을 위해 행동하는 청년들(이하 윤퇴청)’이 그중 하나다. 광장에 가면 항상 있는 이들,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 일상을 버려가면서까지 안전한 광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최근 윤퇴청은 ‘광장을 잇는 윤퇴청’으로의 조직 전환이 있었다. 더 넓은 광장을 그리기 위해 파면 이후에도 열심히 뛰는 대표 이재정, 메시지 담당 김나율, 홍보 및 조직운영 담당 김철규를 지난 19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다음은 윤퇴청 멤버들과의 일문일답.
윤퇴청, 광장의 반가운 얼굴이 되다
- 윤퇴청의 탄생으로 돌아가보고 싶습니다. 윤퇴청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됐나요?
재정 : “비상계엄이 발생하기 전에도 대학가에서는 교수나 연구자를 중심으로 시국선언이 나오고는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생이나 청년이 중심이 되어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와 제 주변 친구들이 이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대응을 해보자 해서 11월 23일부터 청년 시국선언을 쓰게 됐습니다. 활동이 일단락되던 시점에 계엄이 터지는 바람에(웃음). 그때 모였던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윤퇴청의 윤곽이 만들어졌어요.”
철규 : “사실 계엄만 아니었으면 윤석열 정부가 야기한 불평등의 문제에 대응하는 청년들의 활동을 천천히 진행해보려고 했는데요, 이렇게 빠르게 할 생각이 없었죠(웃음).”
- 계엄 이전에도 세 분 모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활동해왔던 거로 알고 있어요. 각자의 영역이 어디였는지, 그것이 윤퇴청 활동과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나율 : “그전에는 독립출판으로 퀴어 그림책을 만들었고요. 지금은 정치학교 ‘반전’에서 상근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세상을 바꾸는 방식을 문화에서 정치로 옮겨간 셈이죠. 읽고 쓰는 일을 계속 했었고 불평등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다 보니 광장이 열린 시점에 윤퇴청에서 메시지 대응으로 함께 활동했던 거예요.”
재정 : “저는 대학에서 학내 민주화, 대학 기업화 반대 운동을 했고, 여성단체와 국회에서 성평등 관련 활동을 해왔어요. 윤석열 정부하에서의 성차별적 정책 노선이 담론적으로도 평등 의제를 후퇴시켰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던 차에 계엄으로 윤퇴청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내가 활동해온 분야들이 이 정부하에서 후퇴하고 있는 위기 국면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이 컸어요,”
철규 : “이전부터 지역에서 정당을 기반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등 다양성과 소수자 의제 기반의 청년 활동을 해왔어요. 다양성과 청년 의제를 다루고 있는 저도 역시 이 위기의 순간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재정님이 제안을 해주셔서 윤퇴청에 결합을 하게 됐습니다. 했던 활동들이 사람들을 조직해내는 일이다 보니 윤퇴청 안에서도 네트워크 업무를 많이 하게 됐네요.”
- 광장에서 윤퇴청이 어떤 존재로 다가오길 바라면서 활동을 하셨나요?
재정 : “저는 당시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단체가 없던 상황이었는데요, 아시다시피 소속이 없으면 집회에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가게 되거든요(웃음). 소속된 조직은 없지만, 집회는 가고 싶은데 함께 나갈 수 있는 동료가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느꼈고, 그런 시민들에게 윤퇴청이 광장에서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나율 : “그래서 윤퇴청의 첫 기조가 ‘광장의 반가운 얼굴이 되자’였어요. 광장에 가면 항상 있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싶었고, 항상 있으니까 안심하고 언제든 가면 되는 공간이었으면 했어요,”
철규 : “저희가 이름부터 윤석열 퇴진을 위해 행동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윤석열 퇴진을 외치면서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건 모순적인 거잖아요(웃음). 시민들과 계속 연결되면서 광장에서 만나면 반가운 동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저기 가면 혼자라고 느끼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고 든든하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 광장의 반가운 얼굴이 되고자 했던 노력이 시민들에게 잘 와닿았다고 보시는지.
재정 : “집회를 처음 나와본 사람들이나 소속된 조직이 있어본 적이 없는 분들이 함께 연결되는 경험을 윤퇴청이 하게 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부심이 있어요. 저는 여성운동을 했다보니 제 주변에 제 아젠다에 동의해주는 친구들이 활동가가 아니어도 많은 편인데, 유독 남성분들이 집회에 같이 갈 친구들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특히 그들은 진보적인 아젠다에 관심 있으면 쉽게 비난받는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보니 그런 분들이 윤퇴청에서 모일 수 있었던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나율 : “실무 인력이 적다 보니 급하면 그냥 참여자분들한테 ‘죄송한데 이것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드리기도 했어요(웃음). 특히 연구 관련 활동을 부탁드리는 경우가 있었고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그분들이 어디선가 자기소개를 할 때 ‘윤퇴청에서 활동하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소개를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분들이 소속감이 생겼다는 말씀을 해주신 게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 재정님은 탄핵 정국에 정말 많은 직책을 두면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보이는 활동을 하셨는데요, 다른 분들도 역시 많은 시간을 여기에 들였을 것 같아요. 일상과 투쟁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한 자신만의 노력이 있었다면.
- 나율 : “재정과 철규는 사실상 실패했고요(웃음), 특히 재정은 한남동 키세스 시위 때 쓰러진 적이 있을 정도로 이 둘은 일상을 돌보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저는 같이 사는 친구도 있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발달장애인 친구를 돌봐야 하는 일정이 있다 보니 일상을 책임감 있게 꾸려나가야 하는 강제성이 생긴 거죠. ‘우리 둘 다 집회를 나가면 우리 집 고양이는 누가 돌보고 집안일은 어떻게 하겠냐’는 생각이 컸어요.”
- 재정 : “그래도 중간에 친구들 만나면 정치나 시국 얘기 절대로 안 하는 모임을 몇 번 잡기도 했어요(웃음). 친구들이 저한테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려고 집회에 나가지 않는 그 시간동안 제 일상을 지켜주기 해 엄청 노력해줬거든요.”
-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광장을 지켜내는 활동을 계속 하셔야 했잖아요. 그렇게 하게 한 각자의 동력이 있었다면.
나율 : “저는 분노요. 윤석열이 구속되고 나서 한동안 살짝 풀려 있었는데요, 구속이 취소되고 나서 엄청 화가 나더라고요. 소위 ‘광화문 초대장’이 발송된 거죠. ‘아 (광장) 간다고, 갈게!!’(웃음).”
철규 : “시민들의 헌신 덕분이었어요, 남태령 때 무박 2일로 그 추운 겨울 날에 밤을 새고, 한강진에서도 집에 가지 않는 시민들을 보면서 이들을 그냥 두고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종의 부채감이기도 한 것 같아요. 매번 나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광장을 벗어나서 광장을 얘기한다는 건 너무 모순적이니까요.”
재정 : “반짝반짝 빛나는 시민들을 보며 이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공간을 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박근혜 탄핵시위 때 광장이 얼마나 빨리 닫힐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공을 너무 쉽게 가로챌 수 있다는 걸 이미 경험해봤잖아요. 이번에는 광장의 주역인 소수자들이 지워지지 않으려면 이 안에서 버티면서 서사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비상행동의 탄핵집회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토론회나 농성장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해서 진행하셨어요. 어떻게 해서 기획하게 됐는지도 궁금해요.
철규 : “국민의힘(이하 국힘) 장례식이 생각이 나요. 12월 7일 탄핵안이 부결되고 난 뒤에 민주주의 정당으로서의 국힘은 사망했다, 고 선언하고 장례식을 치른다면서 부고장까지 준비했거든요(웃음). 그게 트위터(현 X)에서 조회수가 폭발하는 걸 보고 일이 너무 커졌다 싶은 거예요. 그걸 대전에서 장례지도사 일을 하는 청년분이 보고 ‘제가 장례를 진행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셨고요. 실제로 오셔서 축문도 직접 써서 읽으셨어요. 향연님이 그걸 보고 전봉준투쟁단에 전달을 해서 상여 투쟁을 하자고 제안하셨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죠.”
재정 : “농성장 프로그램은 정말 단순한 이유였어요. 활동가들이야 농성장이 꾸려지면 참여하는 데에 익숙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농성장은 낯선 곳이란 말이에요. 이왕 사람들이 모일 거라면 함께 참여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재밌는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 판단한 거죠. 가장 처음에 ‘밤새 민주주의 관련 서적 읽기’를 했고, 그걸 시작으로 민중가요 배우기, 타로점 보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일단 논의하다가 재밌겠다 싶으면 추진한 거에요.”
- 추진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나율 : “해야 할 것 같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거죠(웃음). 사실 윤퇴청에는 추진력이 좋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어? 너 타로가 취미야? 그러면 농성장 와서 타로점 좀 봐줘’ 이렇게요.”
철규 : “사실 저희가 광장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것들이 뭔지 알아채는 감각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렇다 할 소속도 없으니 기동성도 좋았고요. 그래서 비상행동 회의를 하면 ‘윤퇴청은 이번에 또 뭘 하던데?’라는 반응이 자주 나오더라고요.”
청년이 열어가는 새로운 광장,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 청년의 관점에서 광장을 열고 윤석열 탄핵을 외친다는 건 어떤 의미였던 걸까요?
나율 : “청년세대를 ‘정치에 관심도 없고 나라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닌 애들’ 같은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저항심을 많이 느끼던 차였어요. 그렇지만 윤석열 정부하에서 이태원 참사나 ‘입틀막’ 사건 같이 청년들에게 가해졌던 행태들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느꼈던 거죠. 청년들은 보이는 것만큼 납작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재정 : “특히 청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판단과 문제의식하에 움직이는 거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회적 참사나 불공정의 문제를 경험하는 공통적인 세대적 감각도 핵심 키워드에요. 지금 청년이 직면한 문제를 광장을 활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해요,”
철규 : “제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직접적으로 관통하는 나이대인데요, 두 참사의 순간들이 무척 생생해요. 이번 광장을 통해 청년들은 이기적이고 각자도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프레임을 극복해냈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세대로 거듭났다는 게 핵심인 것 같아요. 바뀌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굳어버릴 것 같은 사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동력이 생겼다고 느낍니다. 그 중심에 소위 ‘말벌 시민’들을 포함한 청년들이 있는 거고요.”
- 그런 와중에, 당시 극우 청년들의 발흥이 더 주목받았던 것 같아요. 고민이 많아지셨겠어요,
재정 : “탄핵집회는 진보화된 여성들만 오는 곳이고, 반대 집회는 극우화된 남성들만 가는 곳이라는 프레임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언론들이 많았거든요. 다만 완전히 ‘저쪽’으로 가버린 특정 집단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철규 : “저는 극우 청년의 행태를 경찰이 방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극우 집단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직접 행사하고 있음에도 제지를 하려는 의지가 안 보여요. 특히 안국역에서 극우 청년들이 접근해서 위협을 가하니까 제가 경찰한테 제지 안 하고 뭐 하냐고 명확하게 말했단 말이에요. 근데 경찰은 귀찮다는 듯이 그냥 빨리 지나가라고만 했죠.
언론도 문제인 게, 당연히 법원을 침탈하는 행태에 대해 왜 이러는지 분석하긴 해야죠. 그런데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청년들의 수도 분명 많단 말이에요. 단순히 이걸 중계하듯이 대조하면서 전하는 건 굉장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런 모습들이 방관을 넘어서 극우 청년이 발흥할 수 있는 판을 깔아서 부추기는 일이 되는거죠.”
- 윤퇴청 멤버뿐만 아니라 참여하는 시민들도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적 성향, 소속된 단체가 다양했을 것 같은데, 그런 다름의 문제를 윤퇴청은 어떻게 다루셨나요?
재정 : “지지하는 정당이나 선호하는 정치인은 다를 수 있어도 비슷한 감수성과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으면 큰 다툼 없이 이어나갈 수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윤퇴청 단톡방의 운영 원칙의 하나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지지나 과한 비난은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소위 ‘팬덤 정치’라고 하는 게 강한 정치적 풍토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는 무조건적 비난이나 지지를 벗어나서 정치 얘기를 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철규 : “파면 당일 세상이 어땠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저는 ‘광장처럼만 정치하면 너무 좋겠다’고 말했거든요. 모두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이좋게 연대를 했던 것처럼, 충분히 서로를 존중하면서 기분 상하지 않게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서로가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거든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더 많이 나오는 민주주의가 더 튼튼하고 지속 가능하다는 데에 광장의 사람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탄핵 이후, 조직을 개편하여 ‘광장을 잇는 윤퇴청’으로 활동하신다고요. 개편 과정에서 있었던 고민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광장을 잇는다는 것’이 윤퇴청 멤버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재정 : “탄핵이 됐다고 이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아쉽다는 마음이 컸죠. 특히 윤퇴청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애정을 품고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광장의 반가운 얼굴이 되자는 의지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일상의 광장을 만들면서 광장의 목소리를 정치적 변화로 끌어내자는 비전을 ‘광장을 잇다’는 컨셉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나율 : “광장에서 나온 구호 중에 ‘윤석열은 광장으로 우리는 일상으로’가 있었잖아요. 광장 말고 집에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 게 당연하죠. 그런데 우리가 원래 살던 일상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같은 사람들의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현실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우리가 그런 수준의 일상 회복을 하기 위해 광장에 나섰던 게 아니니, 일상 속에서 광장을 열자는 재정의 말을 크게 공감을 하게 됐어요. 광장이 남아 있는 일상이라면 돌아가고 싶은 일상일 수 있겠다 싶은거죠.”
- 탄핵 이후, 사람들이 관심을 좀 더 가져줬으면 하는 의제가 있으신가요.
나율 : “남태령과 한남동에서 농성장을 지키면서, 하루 이틀 거리에서 밤새는 것도 건강에 무리가 많이 간다는 걸 느끼셨을 것 같아요. 거리에서 사는 것이 일상인 홈리스 분들은 어떨지 이번 기회에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정 : “저는 더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광장을 열었으면 해요. 광장 자주 오시는 분 중에는 나는 이렇게 광장 계속 나와서 싸우고 있는데 정작 내 일터에서 임금을 떼먹히거나 대학에서 페미니즘 동아리 하나 만드는 것도 힘들다는 분들이 계세요. 각자의 공간에서 광장을 이어나가는 활동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철규 : “적어도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존재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죠. 차별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는 소수자들이 너무 많아요. 또, 노동자들도 고공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도 너무 비참하죠. 내일 모레(5월 21일)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의 노동자들이 고공에 오른 지 500일이 되는 날이에요. 별 탈 없이 건강하게 내려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