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른 봄 날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셨다. 그리고 내 나이 쉰여섯에 고아가 되었다.
아버지를 여읜 후,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는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든이 훌쩍 지난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3여년을 제대로 거동 못했다. 어머니는 병이 생기기 직전까지 계속 입원한 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었고 쉬엄쉬엄 하라는 자식의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술을 받은 아버지 곁을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지키다가 병원 앞 집에서 주무셨다.
뇌졸중은 그런 병구완 도중 새벽에 집에서 생겼다. 같이 살던 조카에게 전화를 받고 새벽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난 ‘올 것이 왔구나.’라는 의사로서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본 어머니는 혼돈 그 자체였다. 일련의 검사 과정을 거쳐 혈관 중재술을 했지만 너무 늦었다. 왼쪽 팔과 다리의 마비 뿐 아니라 음식을 삼키는 연하 기능의 장애도 왔다.
응급실에서 어머니는 한사코 치료를 거부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섬망 상태이었기 때문이었다. 재활 병원에서 어머니는 그 어떤 환자보다 병을 이기려는 의지가 강했다. 강도 높은 재활 치료에도 결코 힘들다고 하지 않았으며 재활을 시작한 지 2~3개월 후에는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걸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척추 골절 때문에 병원 생활이 연장되었고 두 분은 각각 다른 병원에서 가끔 서로의 병원을 방문하는 기막힌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겨울에 쓰러진 어머니가 치료받던 재활 병원 근처에는 공원이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첫 해 봄을 나는 휠체어를 탄 어머니와 함께 공원을 거닐며 보냈다. 결혼 후 이십여 년 동안 부모님을 뵌 횟수보다 두 분이 아프시고 뵌 횟수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 다 내 탓 같아 후회된다.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Covid19 사태 때문이었다. 각 병원에서 면회를 제한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점점 악화되었다. 사태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외로움은 어머니를 더 약하게 만들었다. 부축을 받으면 걸었던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걷지 못했고 점점 투정이 늘었다. 재활이 끝나 아버지가 계신 요양 병원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아버지는 직장암까지 발견되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 상태를 말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두 분이 같이 있어 조금 안심이 되나 싶었지만 어머니는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고집 센 성격으로 변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힘겨워 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암 부위의 급격한 대량 출혈 때문에 손쓸 도리도 없이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대학 병원으로 옮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충격 때문에 병이 악화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병원 근처의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옮겨 의사의 특권인 진료라는 명목으로 가끔 어머니를 본 지 6개월 만에 어머니는 낮잠을 주무시다가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어머니는 강아지 같은 분이었다. 강아지가 그렇듯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고, 관계없는 일에도 참견을 했지만 어설픈 점이 많았으며 겁도 많았다. 당신의 기분이 얼굴에 또렷이 나타났다. 당신 뜻대로 안 된 경우 토라지기도 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살갑게 굴었다. 약사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평생 약사의 일을 해 본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퇴직 후 무료함도 달랠 겸 약국을 열라는 내 말에 겁난다며 손사래를 친 것도 다 어머니의 성격 탓일 것이다.
모든 자식이 그렇진 않겠지만 나는 어머니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가 양념 게장을 좋아했는지 몰랐고, 과일 중엔 포도를 좋아해서 앉은 자리에서 한 송이를 다 드실 정도라는 것도 집사람의 말을 듣고 알았다. 반려견을 좋아하는 것도 우리가 강아지를 키우면서 부모님 댁에 데리고 갔기에 알 정도였다. 무뚝뚝한 아들은 딸이 없었던 우리 어머니의 속내를 알지 못했고, 눈치 없는 아들보다 눈치 빠른 며느리가 어머니를 더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물론 내 입에는 맛있었지만 객관적으로 손맛이 있진 않았나보다. 고모부 중 한 분은 어머니의 쌀밥을 제일로 쳤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다른 음식이 별로 였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식구들 모두 인정하는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파절이다. 파를 길게 썰고 갖은 양념을 해서 새콤,달콤, 그리고 약간 매콤한 파무침은 맛을 본 누구나 다 엄지를 내밀게 만들었다. 나 만을 위한 특식도 있었는데 감자를 직접 갈아 약간의 야채를 섞어 지져낸 감자전은 한 소쿠리가 있어도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한편 어머니는 강인한 생활인이었다. 유복한 외가 삼 남매 중 막내였지만 시부모님은 물론 시누이들과 시동생까지 한께 살고 있는 우리 집에 시집온 이래로 항상 고군분투했다. 당시 집의 수입원이 오로지 아버지 한 분이었기에 근검절약은 생활 그 자체였다. 위로는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형제들을 잘 돌보았다고 구청에서 수여하는 ‘효부상’을 받았을 정도이니 그 고생을 몇 마디 문장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장성하여 어머니께 꽃이라도 사가면 좋아하시면서도 핀잔을 주셨고 이름 난 제과점에서 빵을 사가면 비싼 걸 사왔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이른바 명품은 우리 부부가 신혼 때 사다 드린 버버리 가방이 유일했다.
내가 의사가 된 무렵부터 어머니는 심장 질환을 앓고 있셨다.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심장판막증이었다. 사실 내가 의사가 되는 데에는 할머니의 영향이 크지만 심장을 전공한 데는 어머니의 병이 영향을 미쳤다. 일흔이 넘으신 다음부터는 심부전증이 생겨 호전과 악화를 거듭했다. 어머니의 흉부 엑스레이를 처음 보게 된 의사는 엄청나게 큰 심장을 보고 나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다시 확인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보름마다 내 병원을 방문해서 진료를 받고 나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 당신의 큰 낙이었다. 자식 걱정이 항상인 어머니는 우리 병원에 환자가 많으면 얼굴이 환해졌고 아무도 없이 썰렁하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쓰러지기 전 해의 어느 봄날에 우리는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벚꽃 길을 걸었었다. 조금만 빨리 걸어도 어머니는 숨이 차 뒤로 쳐졌기에 신경 써서 팔짱을 끼고 걸으며 아름다운 봄날을 보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런 데이트를 자주 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내 휴대폰에는 어머니와의 통화가 녹음되어있지만 아직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 부모의 관심을 적게 받은 사람은 쉽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지만, 부모님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항상 마음에 부담이 있다고 하는데 후자가 바로 내 경우일 것이다. 이제는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이 없는 고아가 되었지만 항상 현재를 열심히 살며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머니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