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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의사 송태호 Jun 13. 2023

안다는 것이란?

스승님이 나에게 준 교훈.



의대생 시절 처음으로 병원실습을 나가게 되면 청진기를 사게 된다. 이때가 되면 마치 자기가 의사라도 된 듯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우쭐거리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신세로서 의술의 민낯을 관찰만 하게 된다.


약 광고에서 보는 허접한 싸구려 청진기( 아마도 저작권을 때문에 청진기가 나오는 모든 상황에서는 저렴한 청진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가 아니라 앞으로 평생을 같이 하게 될지도 모르는 친구를 고르는 마음으로 청진기를 산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괜히 의사도 되기 전에 겉 멋만 들었다고 선배들에게 혼 날 가능성까지 생각해 적당한 수준의 청진기를 사게 된다. 


나도 그랬다. 


청진기를 목에 걸고 돌아다니는 드라마를 생각했던 나는 그 청진기를 한 쪽 가운주머니에 쑤셔 넣고 인턴까지 생활했다. 물론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의 효용성은 없었다. 내가 수련 받을 당시에는 인턴=잡일,노가다,시다바리 등과 동일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응급실 근무당시에나 겨우 청진기로서의 제 몫을 했을 뿐이고 다른 과를 돌 때에는 기껏해야 L-tube라고 부르는 위관을 환자에게 삽입한 후 그것이 제 위치에 잘 들어 갔는지를 확인 하는 용도 정도가 청진기를 사용하는 경우였다. 심한 심장판막증 환자에게 혼자 몰래 들어가 심장을 청진하면서 내가 배웠던 책에 기술된 소리와 맞춰 보려 했던 적도 있지만 그것도 몸이 너무 피곤해 인턴 초반 몇 번 뿐이었다. 당연히 내과 교수님들이 어떤 청진기를 사용하는지 따위는 미처 관심을 기울일 수도 없었다. 


내과의사가 되기로 결정이 난 후 비로소 나는 내가 평생을 같이해야 할 청진기를 고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청진기를 가진 후에도 청진기를 목에 걸고 다닌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청진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은 내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을 청진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지던트 1년차 때였다. 유언호 선생님은 작달만한 키에 항상 온화한 미소를 가진 교수님이다. 순환기 내과에서 명성을 가지셨고, 대한 순환기 학회장까지 역임하신 글자 그대로 ‘명의’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다. 간경화를 앓고 계셨는데 그 때문에 가끔 입원 하기도 하였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인턴이나 레지던트 1년차인데도 의사 대접을 하려 노력하셨다. 


당신이 환자로 병실에 입원 중에도 회진을 도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심전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베드사이드 강의를 하셨다. 그런 그 선생님의 청진기는 놀랍게도 몇 천원이면 살 수 있는 청진기였다. 의대생이 쓰는 청진기도 몇 만원은 했던 시절이다. 나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선생님께서는 청진기를 들어 보이며 ‘닥터 송. 이게 중요한게 아니야! 이게 아무리 좋아 봐야 ( 당신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 여기가 깨어야 해. 책으로 공부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실제로 들어봐야 아는 거야. 실제로 안 해 본 것은 아는 게 아니야. ‘ 라고 하셨다. 


사실 나는 의대에서 우수한 축에 속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지금은 내과의 인기가 떨어져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인턴을 마칠 즈음 내과를 하겠다고 했더니 당시 내과 수석 전공의는 나에게 내 성적으로 내과는 무리가 아니겠냐며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내과에 처음 들어가서는 기초가 부족해 밤잠을 줄여가면서 학창시절에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당시 나는 자신감을 잃고 점점 위축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 유언호 교수님이 내게 해 주신 짧은 말이 위축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책을 읽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이를 적용하고 그 것이 정확히 들어맞았을 때의 성취감, 환자의 증상이 왜 그런지 몰라 이책 저책 찾다가 해답을 찾아냈을 때의 안도감을 느끼는 것에 점차적으로 익숙해 졌다. '남 보다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아는 것을 실제로 해 보지 않으면 그것은 모르는 것과 다름 없다'는 가르침은 내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이다. 


개원을 하겠다는 나에게 좀 더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넌지시 말씀 하셨던 것도 생각난다. 말도 안 듣고 개원 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을 때에는 반갑게 맞아 주셨다. 몸이 점점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내 박사 논문을 지도하셨고, 몸 상태 때문에 내 선배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부터 고사하던 주례인데도 우리 부부를 위해 기꺼이 해 주셨다. 


그 때는 그것이 고마운 줄 몰랐다. 돌아가신 후에야 그런 일들이 하나씩 생각나며 스승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누굴 가르칠 기회가 없겠지만 스승님의 말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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