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일상의 파문 (波紋)
K, 저는 당신이 언제나 본인이 원하는 삶과 현실 간의 격차를 당신의 예외적인 비범함으로 메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도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주변인들에게 그 열정의 불씨를 나눠주고 있지요. 저는 언제나 회의하지 않고 분명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당신의 모습이 부럽습니다.
이번 편지는 회의하지 않는 당신과는 다르게 인생 전반을 항상 회의하는 자세로 바라보는 제가 어떻게 인생의 다른 방향으로 그 방향을 바꿀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제 인생의 방향 전환은 제 의도와 상관없이 우연한 계기에 서점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친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의 다음 구절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그리고 이 마법과도 같은 글귀처럼, 작가는 우연히 접한 하나의 순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통째로 바꿀 수 있는지를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한 평생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친 고전문학에 해박한 교사입니다. 외골수적인 성실함으로 자신의 일 이외에는 그 어떤 감흥도 없던 그는 아주 사소한 사건을 겪으면서 자신의 인생에 파문이 일어남을 느낍니다. 파문을 어떻게 가라 앉혀야 할지를 모르던 그는 결국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익숙하고 정돈된 삶’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이로부터 결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익숙한 삶을 규정하던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던 학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기며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납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의 손에는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아마데우라는 이름의 포르투갈인이 쓴 책 한 권이 들려있고, 그는 책의 저자와 그가 살아온 궤적을 따라 리스본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의 이러한 여정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책의 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이 매력적인 도피 과정은 책을 읽는 저 또한 매혹했습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글귀와 함께 인생의 방향 전환은 요란스럽지 않음을, 외려 차분하게 이루어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그리고, 한 달 뒤 저는 이러한 매혹적인 주인공의 스스로를 찾기 위한 여정이 담긴 책을 읽으면서 리스본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소설 속 그레고리우스는 눈부신 리스본의 아침을 바라보며 어떤 여행 계획도 세우지 못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리스본은 ‘자신의 익숙한 삶으로부터 도망쳐 스스로를 찾고자 온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그의 행적을 따라온 저에게도 포르투갈이라는 장소는 휴가지라는 느낌보다는 막막한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습니다. ‘앞으로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라는 생각은 리스본 시내에서도, 포르투로 향하는 기차에서도, 포르투 시내를 가로지르는 도루 강 위의 동루이스 다리 위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이전처럼 성실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나를 정의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당신처럼 이미 그러한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분에게는 이와 같은 반복적인 사고의 프로세스와 끊임없는 회의에 기초한 행보는 매우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지(理智)'적인 삶을 지향하는 저에게 있어서는 매우 답답하고 지난한 이 과정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꿔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우연으로 접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은 저의 방향 전환 속도를 좀 더 가속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