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lix Park Jan 07. 202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정체를 해소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vuGZ4ZbULUA


(본 글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유머러스하고 경쾌하게 (*scherzando)


나름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중년에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손이 가지 않았던 희한한 느낌의 존재였다. (지금까지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 담백한 문체를 매우 좋아했지만, 그가 쓴 소설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글들이 지닌 구조의 반복과 갈급함이 느껴지는 인물들의 행적을 보인다는 막연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이 지니고 있던 나름의 독서편력에 따른 고상한 척하던 속물근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하루키의 책을 읽고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을 많이 겪어보거나 하루키의 모든 소설이 비슷한 서사 구조를 지녔음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이전까지 내가 이해하고 있던 하루키의 소설구조에 대한 편견은 아래와 같다. (소설은 이제 겨우 두 권 읽어봤으니, 이걸 함부로 말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건방졌는지 새삼 느껴진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 어느 날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는 그 빈자리를 어찌할 줄 모른다. → 남자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행위에 돌입한다. (여자를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빈자리를 둔 채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행적을 추적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 마침내 남자는 빈자리를 메우는 방향을 걷다가 여자가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이전까지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내가 이해하는 하루키라는 작가의 소설들의 구조다. 이전까지는 하루키가 쓰는 소설들은 자연스럽게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래서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선물을 받아 제대로 읽어 본 하루키의 소설은 (어쩌면 작가가 나름의 세계관의 변화 등 작가로서 원숙함이 절정에 다다른 상황에서) 글의 서사 구조와 같은 복잡한 분석을 던지고, 한 사람의 인간이 격렬했던 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인간의 성숙함에 대한 훌륭한 '우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생기 있게 그러다 차츰차츰 느리게 (*animato and rallentando)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와 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원한다.' 그러나 너는 나에게 모든 것을 원한다면, 자신이 있는 '벽이 있는 도시'로 와야 함을 이야기한다. 너에 대한 생각이 우선인 나는 자연스럽게 네가 말한 '그 도시'를 너와 동일시하며 사라져 버린 너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결국 '나'를 벽이 있는 도시로 넘어가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벽이 있는 도시에서 그(나)는 마침내 그녀(너)를 만난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간직해 온 갈급함이자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 철학과 같은 그의 '결정적 순간의 미학'은 마침내 '진짜'그녀를 만남으로써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삶의 한 순간에 대한 강렬한 기억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


그녀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그는 자신이 기존의 세상을 바라도록 하던 눈을 상처 내고, 도시의 규칙에 따라 바깥세상에서 활동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었던 '그림자'를 분리한다. 이제 그는 온전히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바깥세상의 상황은 이제 그에게 보이지 않을뿐더러 (눈) 살아가기 위한 수단 (그림자)도 완전히 분리했으니, 그에게 남은 건 오랜 세월 꿈꿔온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과정뿐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소원인지 아니면 젊은 날의 한 순간에 담긴 추억을 기록한 스냅숏에 스스로를 영원히 구구속하는 행위인지는 알 수 없다.


도시에 자리 잡은 그에게 주어진 일은 도서관으로 출근하여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다. 그는 그 꿈들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라는 것은 알지만, 정확히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에게 그 행위는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너'와의 시간이 곧 '나'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을까? 이대로 바깥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고, '나의 그림자'도 어디가 진짜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 



2. 조금씩 조금씩 혹은 점점 (*poco a poco)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중년에 접어든 평범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너와 함께 했던 도시의 기억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는지, 혹은 자신의 꿈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이제 꿈을 떠나 현재의 사회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현실'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다른 일을 찾아 흘러 흘러 아주 깊고 조용한 소도시 (혹은 마을정도일지도 모른다)로 흘러들어 간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나'는 '꿈'을 읽는 존재가 아닌, 누군가의 꿈으로 건설된 도서관을 총괄하는 사람이 된다. 도시에서의 '나'가 하나하나의 꿈을 읽고 있었다면, 여기의 '나'는 작지만 마을의 구성원들을 위해 설립된 도서관이 잘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나'는 도서관을 만든 이를 만나고, 그 도서관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자신과 비슷하게 기존에 속한 영역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와 연인이 된다. 


물론 '너'가 없는 '나'는 계속 그 빈자리를 자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빈자리와 상관없이 삶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이곳에서 '나'는 자신이 도시에서 겪은 일의 데자뷔를 계속 겪는다. 그리고 그 데자뷔와 현실은 중첩되고 포개지기 시작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 소설 속 '나와 너'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나'를 인도해 주던 '환상적 존재'는 '나'가 바라보는 시야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려지다가 사라지고, '나'는 그 부재를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한 빈자리의 일부와 같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도시의 기억과 중첩되기 시작한 '현재'는 '너'와 '현재의 연인'에 대한 차이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그녀 (커피숍 주인)는 '너'만큼의 강렬한 감정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 현재의 연인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주고자 하던 그리고 그렇기에 모든 것을 욕망하던 '너'와의 관계와는 다르다. '나'는 그녀에게는 '따뜻함'만을 원한다. 그리고 그 '보다 긴 시간성'안에서 파악되어야 할 그것을 차분히 욕망하는 순간, '나'는 마침내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


너를 만난 나는 이 순간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이 사라짐을 느끼고 그 안에서 너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우리'에게 이 '순간'은 명명할 필요도 이름 지을 필요도 없다. 그저 여름 해 질 녘, 강가에서의 선명한 그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너'는 나에게 진실을 말해준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3. 하나하나 확실하고 세게 (*marcato)


변함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도시의 '나'는 어느 날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를 보게 된다. 도시의 다른 존재들은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는 오직 '나'의 눈에만 보일 뿐이다. 그는 나에게 차분히 전해준다. 바깥세상의 당신의 그림자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아니 어쩌면 누가 그림자이고 실체인지 우리들은 알 수 없다고.


그리고 차분하게 이어서 이야기해 준다. 자신은 당신의 꿈 읽기를 계승하러 왔으며, 당신의 마음은 이세 새로운 움직임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한다고. '나'는 그의 이야기는 결국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을 내린다. 


그리고 그가 떠난 그 자리에는 '부드러운 어둠'만이 내리며 소설은 끝난다.



4. 섬세하게 (*delicato)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한 사람이 자신의 '오래된 꿈'이자 '그림자'를 내려놓고 성숙함과 함께 그다음의 여정으로 차분히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모습을 그려내는 하나의 우화라고 생각하며 감탄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쓸 수 있는 '감정의 양'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간혹 가다 이를 무제한으로 쓰는 것과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거나 자신의 그러한 지속적 감정의 소모를 몸과 마음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는 경우가 대다수일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이 책을 먼저 읽고 하루키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작정하고 썼던 젊은 날의 이야기인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니 특히나 그 감정의 파고가 다르게 처리됨이 느껴진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비극적인 결과를 맞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과 다르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속의 '나'는 그 과정을 '성찰'이라는 행위를 통해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 


(두 소설 사이의 소설들은 아직 읽지 못했기에, 다른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러한 감정의 파고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지금부터 찾아서 읽어볼 만한 나름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순간 '너와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우리'가 되어 그 순간에 영원히 남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하루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이러저러한 사건들 (하루키는 특히나 사랑을 메인으로 쓰는 듯하다 - 이건 다른 소설들을 좀 더 읽고 나중에 정정할지도 모르는 주관이다)의 의미는 결국 우리가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외려 확실하게 새겨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 본인이 후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수가 정해져 있고, 그걸 어떻게 어레인지 하느냐가 결국 관건이라고 한다면, 본 작품은 무엇보다도, 개인이 성숙해지며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하나의 '우화'이지 않을까?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