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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May 09. 2022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얼마 전 왼쪽 눈이 계속 뻐근하게 아파서 안과에 다녀왔다.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병원만 가면 긴장하게 된다. 접수를 하고 의자에 앉아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진료실로 들어가 증상을 이야기하자, 의사 선생님께서 몇 가지 질문 후에 눈 사진을 찍어 보여주며 설명하셨다.


"여기 점처럼 생긴 것들 보이시죠? 이게 염증세포인데 환자 분처럼 렌즈 삽입술을 한 경우에는 렌즈 위로 염증세포가 약간씩은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사진 보시면 오른쪽에 비해 왼쪽이 염증세포가 확실히 많죠? 이렇게 염증이 생겨서 통증이 있으셨을 거예요. 아마도 건조증 때문일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포도막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니 확실히 왼쪽에 점 같은 것들이 많았다. 포도막염이라니, 자가면역질환을 배울 때 책에서나 보던 병명을 직접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일단 염증을 치료하는 안약이랑 인공눈물을 처방해드릴게요. 안약을 써도 통증이 계속 있거나 염증이 심해지면 렌즈를 제거하셔야 될 수도 있습니다."


렌즈를 제거해야 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수술하고 10년 가까이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렌즈를 제거하면 다시 안경을 써야 하나? 다른 방식으로 수술을 할 수 있으려나? 안 그래도 눈이 나쁜데 염증이 계속되면.. 설마 실명되는 건 아니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극단적인 상황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근심 가득한 내 얼굴을 보고 의사 선생님은 일주일 정도 안약을 써보고 염증이 치료되면 괜찮으니 크게 염려하지 말라고 덧붙이셨지만, 이미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나에게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사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다. 엄마 아빠는 다 시력이 좋은데 왜 나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안경을 쓰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니가 TV를 너무 가까이서 많이 봐서 그렇지~~"라는 핀잔이었다. 뭐,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공부하느라 책을 많이 봐서 그런 건 아닐 테니...


성장과 함께 시력은 점점 나빠졌고 안경의 렌즈도 점점 두꺼워졌다. 압축을 두 번 세 번씩 해도 두꺼운 렌즈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눈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쓰다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렌즈의 세계에 입문했다. 두꺼운 안경을 벗을 수 있다는 해방감도 잠시, 렌즈도 만만치 않게 불편함을 알게 되었다.


처음 사용한 소프트렌즈는 얇고 말랑말랑한 재질이라 이물감이 없어서 편했지만 장시간 끼고 있으면 눈이 건조하고 충혈도 되었다. 그리고 렌즈를 끼다가 잘못해서 떨어뜨리면, 얇아서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아 심봉사처럼 바닥을 더듬으며 렌즈를 찾아 헤매곤 했다.


그래서 공기투과성이 좋고 혹시나 떨어뜨려도 찾기 쉽다는 하드렌즈로 바꿔보았다. 그런데 하드렌즈는 다소 딱딱한 재질이라 착용감이 불편했고, 소프트렌즈처럼 안구에 완벽하게 밀착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렌즈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람에 한 번은 안구 뒤쪽으로 넘어가 혼자 식겁을 했다.


결국 하드렌즈에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소프트렌즈로 돌아왔고, 렌즈와 안경을 번갈아 사용하며 불편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친구의 추천으로 렌즈 삽입술을 알게 되었다. 눈이 많이 나쁜 편이라 라식이나 라섹은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 친구가 알려준 렌즈 삽입술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수술한 강남의 안과까지 가서 다양한 눈 검사를 하고 당일날 수술 예약도 잡았다.


렌즈와 안경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용감하게 수술을 결정했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눈에 렌즈를 삽입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수술을 하는 내내 눈을 뜨고 있어야 되고, 안압이 높아지면 렌즈를 넣을 수 없기 때문에 몸에 힘도 주면 안 된다. '여기 피난다, 지혈해!'라고 말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소리도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멘탈이 필요했다.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양손을 꼭 쥐다가도 힘 빼라는 꾸중에 슬그머니 손을 펴야 했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나온 순간 심봉사가 눈을 뜬 것처럼 환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렌즈와 안경에서 벗어나 내 눈으로(물론 렌즈를 삽입한 눈이지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안경을 쓰지 않고도 시계가 또렷하게 보이다니.. 신세계였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감격하며 현대의학의 발전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점차 당연하게 느껴졌다. 10년쯤 되니 마치 원래 내 눈인 것처럼 수술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다.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여태껏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특별히 아픈 곳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 나 역시도 그러하다. 아니,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다.


예전에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심술궂은 신이 나타나 '너의 감각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느냐'라고 묻는다면? 다소 엉뚱한 상상이지만 오감이라고 말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사실 모두 소중한 감각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시각이었다.


우리 조상님들 역시 시각의 중요성을 아셨는지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을 남기셨다. 나에게도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화면을 보며 글을 쓰고, 책도 읽고,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도 보고,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도 보고, 약사로서 일도 하려면... 시각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내 눈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앞으로는 눈을 아끼는 마음으로 인공눈물도 자주 넣고 잘 관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 동안 안약을 열심히 넣고 눈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통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혹시 몰라 안과에 한 번 더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 사진을 보여주며 염증이 없어졌으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확답을 받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약국에서 근무하면 매일같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고 상대하지만, 사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륜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다양한 경험을 할 가능성이 많아지니 보다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연륜의 힘이다.


하지만 내가 이번에 느낀 것은 조금 다른 맥락이었다. 나이가 들면 스스로 겪어본 질환도 많아질 테니 환자들을 대할 때 공감의 폭도 넓어진다는 것. 당장 나 역시도 약국에 포도막염 환자가 오면 좀 더 잘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걱정되는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예전에도 약국에 포도막염 환자가 온 적은 있었지만, 단순히 약사로서 그 질환을 대할 때와 내가 직접 환자가 되어본 후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사람은 자신의 일일 때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나도 포도막염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찾아본 적은 없었다. 포도막이 구체적으로 눈에서 어떤 부위인지, 치료는 어떻게 하는지, 경과는 어떠한지. 이렇게 찾아봄으로써 그 질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공부하고 더 많이 알게 된다. 그 결과 다음에 그 질환을 가진 환자가 오면 더 잘 설명해주고 공감해줄 수도 있다.


가만, 그럼 좋은 약사가 되려면 다양한 질환을 많이 경험해야 되는 건가? 많이 아파봐야 좋은 약사가 될 수 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를 뻔.. 하다가 이건 지나친 비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프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하면 될 것을... 대신 혹시나 아프게 되면 그때는 연륜이 좀 더 쌓였음에 감사하며 또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나저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눈을 너무 혹사시킨 것 같다. 빨리 인공눈물을 넣고 잠시 쉬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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