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한 쓸데없고 베베꼬인 에세이
분명 그리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질문이 모호하지만, 그 어느 질문보다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결혼, 가족을 이루는 행위 혹은 종족 번식의 약속
결혼은 고도의 사회학적 행위다.
-Maximilian Carl Emil Weber (a.k.a 막스 베버)
결혼을 정의하는 많고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의 이야기에도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종족 번식을 위한 제도로 존재해왔다. 헤겔이 “결혼은 인륜적 관계이다[『법철학』161절「보론」]”라는 명제로 단순한 사회계약적 관계나 종족 번식을 위한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로맨틱한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 바탕에는 결국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대전제를 벗어날 순 없었다. 1만 년 전 농경사회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혼의 형태는 수없이 바뀌었지만, 결국 사회를 지탱하는-넓게는 인륜적 좁게는 개인적으로-고리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오래된 만큼 결혼을 개인의 단위로 해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나 뿌리 깊은 농경사회인 동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찾아봤지만, 결혼에 대한 대부분 자료는 ‘결혼을 하지 않아 큰일 난 우리 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는 결혼을 개인적인 문제보다는 사회적인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결혼으로 생기는 가족, 출산, 그리고 사회유지 단위에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가족, 가족?
이번 추석도 마찬가지였고, 명절이 다가올 때 많은 매체에서는 매년 같은 테마로 이야기를 나열한다. “스트레스받는 명절”에 대한 이야기로. 고등학교 때는 “대학은 어디 갈거니?"란 질문이 보일 테고, 대학교를 가서는 “취업은 언제 할 거니?”란 항목이 눈이 갈 것이며, 취업하고 나서는 “결혼은 언제 하니?”란 항목이 신경 쓰일 것이다. 이제 뉴스에서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족을 보러 갈 기쁨에 설레는 인터뷰보다는, 인천공항의 여행객과 명절 특수를 맞은 여행사에 대한 기사나, 꼰대가 되지 않는 법을 연재하곤 한다.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자. 이 험악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없다를 떠나 언제부터 우리는 친척들의 질문을 불편하게 되었는가.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과거에 비해, 분명 명절은 부쩍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뉘앙스가 커졌다. 이는 가족의 개념이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전통적으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의 가치를 사회 유지의 우선순위에 놓았다면 이제는 조금 더 개인의 삶으로 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많은 명절 스트레스의 본질은 “우리 가족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자격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를 내포하고 있다. 훌륭한 직업을 가진 조카, 명절에 헌신적으로 일하는 며느리, 가족을 책임지는 전통적인 우두머리로서의 어른들, 모두가 말이다. 점차 이것이 불쾌해지고 있다는 것은 결혼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결혼은 가족을 이루는 행위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 알겠다. 그런데 이제는 국가적인 측면에서, 혹은 사회학적인 측면, 개인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한 개념은 “사회 안의 개인" 이 아닌 “개인이 속한 사회"의 삶이다. 이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가진 억압이나 폭력성이 분명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가장 좋은 표본이자, 그것을 거부할 정도로 정체성이 확실해져 가고 있다는 지표다.
가족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결혼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결혼을 “가문과 가문", “가족과 가족"의 결혼으로 보는 세대와 요즘 “개인과 개인", “신랑과 신부"의 결합으로 보는 세대의 충돌, 그 충돌의 어느 지점에 오늘의 결혼은 서 있다.
결혼의 반대말은 이혼이 아니라 비혼이다.
과거 결혼을 결합으로 보는 세대에서, 결혼은 “필수"를 함의하고 있었다. 즉, 성인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서 말이다. 가족을 꾸리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이 남자의 숙명이었다면, 아이를 낳고 남편을 보좌하며 교육을 위해 힘쓰는 것이 여자의 숙명이었다. 오늘날 보기에 조금은 불편하다. 하지만 과거 인류가 동굴에 살던 시절부터 남자는 여자보다 비교적 근력을 사용하기에 좋은 신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출산이라는 종족 번식의 키워드를 가진 여성을 보호하고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적합한 진화를 이뤘다. 이는 단순히 인간 개체에만 보이는 양상은 아니다. 인간과 가장 비슷하게 공동체를 형성하는 몇몇 유인원이나, 늑대 같은 개체들에게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이것이 진화론적으로 “종족 번식”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 그들이,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다.
현대의 결혼을 비춰보자. 과연 결혼은 “필수"를 함의하고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필수여야 하는 이유를 담은 “종족 번식"을 전제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비혼이라는 단어는 개인이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을 것임을 선택하는 것이다. 비혼이 과거에 없던 개념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스스로 선택하는 개념이 아니었고, 단지 할 수 있냐 없냐의 가능성 문제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수많은 트렌디하고 멋진 이유들부터, 어쩌면 조금은 회피성 이유까지 각각의 이야기는 다양하지만,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즉 어느 순간 결혼은 필수를 함의하고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고, 이제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되었다는 뜻이다.
굳이 “부분이나 요소의 집합이 아니라 전체성이나 구조에 중점을 두고 파악한다”는 게슈탈트 이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오늘날 개인은 단순히 사회를 이루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사회는 사회라는 시스템으로서, 개인은 개인의 단위로서 독립된 객체로서 존재한다고-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간에- 생각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개인으로서 ‘결혼'이 가진 전통적인 억압에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아이, 인류가 속한 공동체-당신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에 기여할 것인가.
이 세대는 분명 명확한 지점에 와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결혼은 어디에 서 있는가
그렇다면 이 베베꼬인 필자는 비혼 주의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과연 독일 정도의 사회 수준과 덴마크 정도의 복지 수준을 가진 나라에 당신이 살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에도 비혼을 택할 것인가? 당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개인의 존엄성과 당신의 자아실현을 지켜주는 환경에서 말이다. 이 질문이 정곡을 찌르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누군가는 흔쾌히 “YES”를 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위 언급한 나라들의 혼인율이 세계 최고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YES”를 외친 당신은 그 누구와 어떤 사랑과도 결혼만은 하지 않을 것인가. 필자 또한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무작정 우길 작정이 아니라면 비혼 주의자도 한번 생각해봄직한 이야기이다.
개인의 독립성과 객체성(그 객체가 고유하게 가지는 특성)이 커진 지금 이 시대에서, 비혼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한 도피인지, 아니면 명백한 선택의 범주 안에 있는 한 갈래인지 말이다.
현재 심리학의 토대를 만든 철학자 프로이트는 성적인 욕구, 즉 종족 번식을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무의식 속 욕망은 사회적 교육에 의해 제어되거나 혹은 정제되어 의식으로 표출된다. 그렇다면, 우리 몸이 늙고 병들었을 때, 우리는 정제된 욕구를 쥐고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어렸을 때 생긴 트라우마가 10대 20대를 지나면서 인격 형성에 영향을 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때는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40~50대이다. 즉 결혼이 빛을 발하는 시기 그 시기는 당신의 튼튼한 몸과 강인한 마음이 약해지는 시기이고, 저 도표를 보았을 때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 슬픈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이 없는 글에 실망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과거 전통적인 흐름과는 다른 어느 지점에 와있다. 전통적인 결혼의 의미도, 또는 개인의 행복으로서의 결혼의 의미도 아직 모두 팽팽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서 있든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 이 길에서 당신이 얻을 것, 잃을 것은 명확하다. 어느 게시판에 돌아다니는 특이하다 못해 엽기적인 사례들에 눈독 들이기보단,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할지 들여다봐야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에 대한 삐뚤어진 이야기는 멋진 명언들이나, 몇몇 차트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래서 내가 묻고 싶다.
당신은 그래서 뭐 어쩔 건가.
당신의 결혼은 어디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