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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Oct 15. 2018

동거는 죄가 없다

아찔한 듯 아찔하지 않은 그 이름, 동거

필자가 외국에 잠시 살 때의 이야기이다. 사실 외국은 대부분 정확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하기 때문에, 외국 하숙방은 퇴근 시간에 그 집에 사는 룸메이트들이 다 같이 모이게 된다. 한국인들이 최대한 없는 환경에서 지내보고 싶었기 때문에 현지인의 집을 찾아 flat이라는 하숙을 했었다. 그때 집주인은 한국인 여자친구를 둔 현지인의 집이었고, 난 그 하숙집에 들어온 첫 한국인 flatmate였다. 그들은 같이 집을 모아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관계는 partnership. 즉 결혼이 아닌 동거 중이라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난 그 집주인의 여자친구는 외국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중 동거에 대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상한 답안을 크게 빗나갔다. 아니 어쩌면 내 질문이 바보 같았을 수도.


동거에 대한 내 질문은 이러했다.

“**이랑 같이 사는 거 괜찮아? 결혼 얘기는?”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우리 그냥 같이 사는 중인데?”


저 문답을 굳이 굳이 분석해본다면

나의 “동거"라는 개념에는 결혼이 전제되어있다. 결혼을 하기 위해, 혹은 결혼을 할지 생각해보기 위해, 등등. 그리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최대한 줄이고 그들이 불쾌해하는 private(개인적인)한 질문을 최대한 정중하게 포장하기 위해 ‘동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동거는 같이 사는 것이다.”, “동거는 연애를 하면 선택하는 선택사항이다" 그리고 "동거는 결혼과 관계가 없다.”였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는 더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필자 스스로 “나는 동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시 정리하기 전에는 그녀의 대답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애와 결혼 그 사이쯤 어딘가에

대학 시절 자취촌에서 살았던 나는 1교시  등교할 때면 서둘러 같이 등교하는 커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여자친구 쪽이나, 남자친구 쪽에서 같이 등교를 하기 위해, 혹은 애인을 깨우기 위해 잠시 들렀을 수도 있고, 같은 빌라에 살아서 다른 문을 열고 나왔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다면 “만약 그들이 동거하거나 같은 집에서 같이 잤다면 좋지 않게 보여"라는 전제가 바탕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도 위에 그녀가 한 대답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생각하는 동거에는 분명 “성적인 문제(sexual issue)”와 결부되어있다. (굳이 영어를 쓰는 것은 우리는 문제라고 부르고 그들은 issue로 부르기 때문이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에 따르면 20대들이 동거에 부정적인 이유 1위가 “주변에서 동거 사실을 알 까 봐.”(40.4%)이고, 2위는 “원치 않는 혼전임신을 할까 봐.”(26.3%)이다. 이 조사결과를 리서치하고 나는 ‘반대하는 그들도 동거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1, 2위 대답에는 “성적인 문제"가 나타나 있지,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동거' 자체에 대한 문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거의 본질은 공간이다. 섹스가 아니라

우리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독립을 하게 되면서, 가끔 남과 함께 살 기회들이 생긴다. 기숙사에 처음 보는 얼굴의 룸메이트를 만나거나, 아니면 친한 친구와 함께 대학 생활을 불태울 아지트를 만들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하숙집을 들어가거나, 혹은 아는 사람 집에 얹혀살 기회 등 말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추억이 된 좋은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다시는 동거를 하고 싶지 않은 에피소드들. 


이는 ‘동거'가 단순히 같이 사는 것뿐만 아니라 한 공간에 사는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거가 어떠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본질적으로 같은 현관문을 쓰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회'라고 불리는 거시적 단위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명 ‘개인적인 공간’과 ‘공유하는 공간'이 공존할 것이고 ‘공유하는 공간'을 설정하기 위해 다른 두 사람은 한동안 끊임없이 불편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비로소 그 ‘공유하는 공간'이 형성된다면, 그 둘의 관계도 더 명확해질 것이고 그 동거가 아름다울지, 아님 끔찍한 사생활 침해가 될지 결정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근본적인 명제 위에 “성적인 문제(sexual issue)”를 얹어보자. 그냥 평범한 남이 아니라 연인 관계의 사이라면 개인적인 공간을 서로에게 더 내어줄 수 있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끈끈한 부류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공간"과 “공유하는 공간"은 다른 동거보다 더 쉽게 결정될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는 이상 그 두 동거인들의 공간은 ‘개인적인 공간’과 ‘공유하는 공간'이 위험하거나 혹은 아름답게 섞인-연인관계가 아니면 경험하지 못하는-공간이 될 것이다. 이것이 연인이(엄밀하게 “결혼을 전제한”이 아닌 단순히 “교제 관계에 있는"으로 해석해야 명확할 것이다). 동거를 할 때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상황일 것이다. 여기에 두 연인이 ‘공유하는 사적인 공간'에서 성적인 관계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동거가 “성적인 문제(sexual issue)”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거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것이고, 본질은 ‘어떻게 함께 사느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거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직 그 정도 관계가 아니라서”, 혹은 “개인의 공간을 침해받기 싫어서”라는 대답이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금 더 적절한 대답인 것이다. 이 단락에서 누군가는 분명 “성적인 문제(sexual issue)”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거나, 책임감이라는 부분을 빼놓고 설명했다고 느낄 것이다.

 


책임감과 혼전순결, 동거를 보는 시선들

혼전순결을 자체로 뜯어보거나, 책임감이라는 가치를 철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이 글을 읽던 사람의 반 정도는 욕을 하고 나머지 반은 뒤로 가기를 누를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어느 리서치 조사에서 나오는 미혼 성인 남녀의 성 경험 자료를 가져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2018년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연애와 감정, 그에 따른 선택을 사회의 어느 도덕적 가치가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혼전순결을 고귀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지만,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 폭력적이다. 어느 쪽에도 과도한 도덕적 족쇄를 채우지 않는 게 제일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모두 알면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인 태도를 보자. 단순히 남성과 여성에게 섹스에 대해 대입하는 사회 태도들은 여성들에게 엄청나게 폭력적이다. 위에서 말한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에서 나온 질문의 1위 2위의 남녀의 비율은, 말하지 않아도 명백하다. 부정적이라고 답한 대답의 과반 수치가 여성이었으며, 당연히 1위 2위 대답들도 특히 여성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동거남과 동거녀 두 단어 중, 우리는 무엇을 부정적으로 보고, 또 왜 그런가. 당신은 동거라는 단어를 보고 있는 게 확실한가?


나는 동거를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게 혼자 있고 싶은 날, 내 집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동거나, 결혼을 안 할 생각은 없다. 결혼도 마찬가지이고 ‘개인적인 공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과 함께 살아서 마음적으로, 혹은 금전적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함께 사는 것이 동거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지친 하루 끝에 맞이해주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할 때, 당신이 동거를 선택한다면 분명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게 일상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이고, 혹시 실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늘어나기에 조심하라는 것이고,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 때문에 그 소리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결혼하는 누군가도 언제든 저 위에 동거를 조심하라는 사람들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들도 일상의 익숙함을 조심해야 하고,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택에 ‘평생’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결혼’을 선택했다면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동거보다 어렵고 무거운 결정일 테니까. 


우리는 어쩌면 동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섹스하는 젊은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거는 책임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책임지고 이뤄갈 수 있으면 그뿐이다. 동거를 했다 헤어지는 것도, 이혼을 하는 것도,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다 마찬가지.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다고? 아니. 나는 동거가 결혼 전의 순서라고 보지 않는다. 사귀고, 결혼하기 전에 잠자리를 가진 전 세계 셀 수 없이 많은 커플이 그 순서를 지킨 커플보다 명백하게 불행한가? 동거를 한다고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순서를 지키는 것도 아니며, 섹스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를 쭉 써가니 내 전 집주인의 여자친구 대답에 해줄 말이 생각났다.


“오 좋겠네!




혼자 준비하지 말아요. 같이해요!

즐거운 결혼준비, 웨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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