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조건, 둘 중 하나만으로 관계는 이어질 수 없다
아는 선배가 최근에 했던 소개팅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상대편 여자분이 너무 조건을 따져서 그만 만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맞선도 아니고 소개팅으로 몇 번 만났을 뿐인데, 재산뿐 아니라 학벌까지 따지는 모습에 질려버렸단다. (조건을 물어 따질 정도면 ‘선’에 가까운 것 같지만,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넘어가기로 한다.)
소개팅이나 선에서 조건을 따지는 여성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수 없이 보고 들어왔다. 이 주제는 어떤 이에게는 여성 비하를 위한 단골 사례로 써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노골적으로 돈, 학벌, 집안 같은 조건을 밝히는 것에 대해 나 역시 부정적이었다. 사랑 없이 할 수 없는 게 연애와 결혼인데, 처음부터 깜빡이 없이 노골적인 질문부터 치고 들어오면 연애는커녕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오히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쉽게 거절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건 따지기'를 활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웬만한 친구들은 시집이나 장가를 다 갔고, 아이까지 하나 둘 낳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결혼에 앞서 조건을 따지는 게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결혼이 목적이고 아이를 낳을 계획이라면 조건은 더 따져봐야 한다. 경제 상황을 미리 솔직하게 터놓지 않았거나, 두 사람이 함께할 미래를 그리지 않고 대충 어쭙잖게 사랑만으로 시작한 커플이 더 불화가 많은 것만 봐도 그렇다. 돈 때문에 매번 부부싸움을 하고, 그에 대한 가치관이 맞지 않아서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봤다. 부부 관계에서 10번 싸울 일이 생겨도, 경제 상황이 만족스러우면 1번도 안 싸운다는 이야기도 맞는 말이다. ‘가난이 대문을 열고 찾아오면 사랑이 창문을 열고 도망간다.'는 옛 말도 무조건 옳다.
3년 전쯤, 가수 이효리가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돈 안 벌고 편하면 (부부 생활을) 잘할 수 있어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명언이다. 예능 <효리네 민박>에서 이상순이 착한 남편으로 그려지고, 둘의 사이가 좋은 것이 세간의 부러움을 산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효리는 덧붙여 “맞벌이 부부가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돌아와서 서로 부딪히면 말이 예쁘게 나가겠느냐."고도 했다. 맞벌이 부부가 다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쪼들리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므로 부딪히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결혼에 앞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으로 돈을 최우선으로 꼽는 사람에게 돌을 던질 이유는 없다는 게 결론이다. 본인이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데,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넓고 안락한 집에 눕고 싶고 앞으로 나을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는 욕심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랑이 우선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훨씬 철들어 보이고 덜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조건만으로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선배의 소개팅 상대처럼 면전에 대놓고 조건을 운운하는 사람이 연애조차 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조건을 볼 것이었다면, 맞선 자리에 나오기 전에 미리 알아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돈이 없으면 사랑은 쉽게 꺼지지만, 돈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빈껍데기뿐이다. 사랑을 지켜주는 건 돈이 될 수 있지만,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다. 이왕이면 이혼하지 않고 한 사람과 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랑 없이 연극으로 버틸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