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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09. 2020

당신의 첫 직장생활은 안녕하십니까

강렬했던 나의 슬기로운 첫 직장생활의 추억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직업을 택한 계기나 동기가 있을 거예요.


지난주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흉부외과 전문의 김준완 역할의 정경호 배우가 극 중에서 자신이  흉부외과를 선택한 이유가 에피소드 형태로 잠깐 나왔어요. 아마 전문의가 되기 전 지도하던 지도 교수와 함께 심장 수술에 들어갔다가 심장 수술을 마치고,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직접 느끼고서는 감동을 받아 흉부외과 전문의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오더라고요.

  저는 사실 대학 때 학부 생활을 하면서 정보공학을 전공했어요. 학부에서 전공을 선택한 것도 단순히 컴퓨터 언어 계통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정보공학을 선택했고, 그나마 관심이 가고 흥미가 있었던 쪽이 데이터 통신이어서 전산 통계보다는 정보공학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에도 적성과는 상관없이 어렵게 입사했으니 별 고민 없이  다녀야 했고, 결혼을 해야 하니 돈도 벌어야겠고 뭐 그런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이유로 회사를 다녔죠. 당연히 신념을 갖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많았던 하루하루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입사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입사원인 저에게 그 당시 팀에서 꽤나 중요하게 진행 중이었던 프로젝트의 백업 업무가 주어졌고, 관련 회의 때마다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죠.


   사실 신입사원 때에는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고, 선배들이 시키는 뒤치다꺼리 하는 게 전부였지만 가끔씩 선배들이 중요한 회의 하려고 회의실로 몰려가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서 업무 관련해서 중요한 이슈들을 이야기할 때 막연히 저 관련 업무에 나도 일원이었으면, 저 대화에 나도 끼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업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젠 월급값을 할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어요. 막상 회의에 참석해보니 선배들끼리 이야기나 논의하는 게 전부였고,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신입사원이 이해하고, 대화에 끼어들기란 쉽지가 않았죠. 회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제게는 벅찬 일이었어요. 이렇게 1주일을 보낼 즈음에 팀장님이 따로 회의실로 저를 불렀죠.


 "철수 씨, 할만해? 처음 제대로 된 업무에 투입이 되었는데 이제 좀 일하는 거 같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은 많이 힘듭니다. 팀장님.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만한 역량도 안되고요. 제가 아직은 준비가 안된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내겐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불이익이 주어지더라도 역량도 안 되는 신입이 감당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고, 부담도 많이 되는 업무였어요. 그냥 솔직히 얘기하고 조금 부담이 덜한 업무에 할당되기를 기대했죠. 팀장님과 면담 후 하루가 지나고 다시 팀장님의 호출이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업무 지시가 있어서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조금 후회가 되었죠. 그렇게 지시한 업무는 프로젝트 진행 전 사전 파일럿(Pilot) 시험 구성 및 제안하는 제품의 전체 기능에 대한 시험 및 리포팅이었어요.


  프로젝트 자체가 워낙 사이즈가 있었고, 시험망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장비(라우터: 네트워크 통신장비)가 필요한 일이었죠. 신입사원 혼자 구성하기에는 벅찬 업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그 순간에는 팀장님이 징징(?) 거린 저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런 내 속내를 아셨는지 업무 지시가 끝나고 회의실을 나가면서 한 마디 하셨죠.


 "철수 씨, 이기종(서로 다른 제조사의 장비) 구성이 필요하니 이길동 대리가 지원해 주도록 지시할게. 진행 보고는 1주일 단위고, 한 달 뒤에 모든 시험 결과 리포트 및 프레젠테이션 준비해."


  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사실 혼자 하기에는 너무 까마득했는데 지원해 줄 선배가 팀에 거의 넘버 투, 쓰리급의 실력을 갖춘 사람인 데다, 워낙 온화한 성격이라 신입 동기들 간에도 편하게 생각하는 선배 중 한 명이었죠.  이후 한 달간 밤, 낮을 가리지 않고 팀장님이 지시한 업무에 매달렸고, 많은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원서를 뒤져보고, 매뉴얼을 찾아보고 다른 구축 사례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1주일 단위의 보고도 처음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빨리 팀장님에게 내가 이룬 성과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 때가 있을 정도로 참으로 신나게 일을 했었던 거 같아요.


  이렇게 한 달을 무사히(?) 마치고 최종 보고서를 팀장님 메일로 보내고, 팀원 전체를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프레젠테이션 진행을 하는 동안 베테랑 엔지니어들 답게 선배들은 꽤나 디테일한 질문들을 던졌고, 꽤나 당당하게 답하는 저를 대견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지더라고요. 프레젠테이션이 무사히 끝나고 잠깐의 정적 후에 팀장님 이하 선배들의 박수와 '수고했어', '철수 씨, 이젠 혼자 고객사에 나가도 되겠어', '준비 많이 했네' 등의 칭찬을 듣는 순간 정말 머리에서 발끝까지 '찌릿'하는 전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순간 전 '그래, 이 일을 선택하길 잘했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20년이 넘는 직장 생활 동안 그때의 '짜릿'했던 전율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내 기억에는 아마 이때의 전율이 내 회사생활의 첫 짜릿함을 맛 본 '찌릿'의 경험인 것 같아요. 이 당시 만들었던 보고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다시 보면 도움이 되는 교본 같은 문서일만큼 제게는 의미가 큰 일이었죠. 가끔 아끼던 후배가 먼저 퇴사하려고 하면 제가 전달해 주는 보물 같은 문서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날의 그 순간만큼은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아있을 거 같아요. 회사 생활하면서 이 '찌릿'한 경험들 한 번씩은 모두 있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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